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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미학 · 미학의 갈래 · 01 / 13 · 혼돈의 아름다움

별자리를 알아보아도, 하늘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

이름은 보게 해 주기도 하고 다 보았다고 서두르게도 한다. 별 지도를 내려놓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든다.

Han Qin ·

아이가 스마트폰을 눈앞으로 들자 화면의 선도 따라 움직였다. 마침내 찾은 별을 옆 사람에게 하나씩 가리켰다. 막 도착했을 때는 밝은 점뿐이었는데, 이제는 이름도 있고 이어진 모양도 있었다.

어른이 말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조금 더 보자.

아이는 그렇게 했다. 방금 알아본 모양은 여전히 있어서 화면 없이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선 바깥에도 별이 있었고 안에도 있었다. 조금 더 보니 몇 개가 또 눈에 들어왔다. 그 선들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하늘이 선을 따라 말끔히 나뉜 것은 아니었다.

아주 흔한 일이다. 우리는 무언가 알아보면 대개 다음 일을 한다. 길을 알아보고 걷고, 글자를 알아보고 읽고, 사람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른다. 알아본 뒤 일부러 돌아보는 일은 드물다. 방금 붙인 이름이 무엇을 잡아 주었고 무엇을 잡지 못했는지 말이다.

때로 아름다움은 그 돌아봄에 있다.

덜 알아야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별을 설명하고 나면 밤하늘이 더는 아름답지 않게 될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저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멀고 왜 빛나는지 알면, 시에서 쫓겨나 자료표만 남을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름 하나를 배운 뒤 눈앞의 것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빛의 점들이 몰려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까운 별도 있고 먼 별도 있다는 사실을 알자 평평하던 모습에 깊이가 생긴다. 이름이 별들을 종이에 가두기는커녕 종이에서 이웃이라고 저기서도 이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같은 하늘에서 별을 익히는 사람은 모양을 보고, 연구하는 사람은 거리를 묻고, 길을 가는 사람은 방향을 찾는다. 제멋대로 이야기를 꾸미는 것이 아니다. 각자 근거가 있고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도 있다.

여기서 머물고 싶은 것은 원래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 안 것이 얼마나 구체적인지 보이고, 다른 앎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도 보인다.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다르다. 상자 속 선물이 무엇인지 맞힌다면 열었을 때 궁금증은 사라진다. 하늘은 아직 열어 보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이름과 위치를 알고 나서도 눈앞에 남고, 알아보았다고 일이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지키려고 일부러 지식을 막을 필요는 없다. 이름을 안다는 것만으로 다 보았다고 서둘러 넘어간다면 사물이 가려질 수도 있다. 더 자세히 보게 한다면 눈을 다시 돌려놓을 수도 있다. 이름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배운 이름을 마지막 말로 삼느냐가 문제다.

지도를 펼친 자리

불빛 없는 밤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탁자에 지도를 펼친다. 길이 마을 옆을 지나 산기슭을 돌아 다른 길에 닿는다. 가 본 사람이 굽이를 가리키며 여기는 가파르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돌아가면 가게가 있었고 어릴 때 거기서 아이스크림을 샀다고 기억한다. 지도에는 가게가 없다. 그렇다고 지도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지도는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다.

다른 지도로 바꾸자 등고선이 촘촘해지고, 가파르다는 말에 눈으로 확인할 근거가 생긴다. 앞의 도로지도가 거짓이 된 것도, 새 지도가 어린 시절의 가게를 대체한 것도 아니다. 여러 관점이 같은 탁자에서 저마다 어떤 부분을 밝혀 준다. 어느 쪽도 앞으로는 이렇게만 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더 자세한 지도를 만들 수 있다. 가게 이름과 수종, 지층, 옛길을 더해 좋은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더 보충할 수 있다는 생각과 언젠가 한 지도가 땅을 대신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다르다.

앞의 생각은 일을 더 하고 싶게 한다. 뒤의 생각은 어느 한 가지 작업에 최종 판정권을 몰래 준다.

내가 말하려는 아름다움은 데이터베이스에 빈칸이 몇 개 남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빈칸은 채울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잘 그린 지도들 사이에 있다. 지도마다 정말 무언가 보았지만 발밑의 땅이 앞으로 오직 그 모습으로만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 진지하게 알아볼수록 이 공존은 덜 모호해진다. 만물이 신비하다고 먼저 선언하지 않아도 이미 볼 것이 있다.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전부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별하늘로 돌아가자. 빛나는 점을 이어 모양을 만들다 보면 빈 곳이 눈에 띈다. 저기에도 별 하나가 있으면 모양이 더 비슷할 텐데.

그렇다고 하늘이 이 그림에 별 하나를 빚지고 있을까?

그림에 획이 하나 부족하거나 관측 기록에 항목이 빠졌다고는 할 수 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늘은 그 그림처럼 생기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선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늘의 일부가 모자란다고 판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 부족하지 않다는 말은 우주를 다 세어 보니 온갖 것이 들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이 커진 또 하나의 목록과 너무 닮았다. 거두어야 할 것은 그 한 걸음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려고 세운 기준을 돌아서서 하늘에 건네고 따르라고 명령하지 말자는 것이다.

원논문은 이 방향을 ‘혼돈의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어수선함이나 흐릿함, 아직 정리되지 않음을 떠올리기 쉽지만 치워야 할 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방이 어지러운지는 이미 물건이 놓인 곳과 놓여야 할 곳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여기서는 그보다 앞을 묻는다. 방금 내가 나눈 틀이 무슨 권한으로 눈앞의 모든 것에 무엇이 부족한지 선언할 수 있을까?

이름도 구분도 전혀 없는 곳으로 실제로 물러나 순수한 전체를 직접 경험할 수도 없다. 전체라는 말부터가 이미 구분이다.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돌아보는 것이다. 이름도 생겼고 선도 그었지만 그것들이 얻지 못한 권한이 무엇인지 다시 보는 일이다.

선을 지우라는 요구는 아니다. 아이가 익힌 별자리는 남겨도 되고 지도도 주머니에 넣어 가도 된다. 지식이 줄거나 신묘함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눈앞의 것이 이번 설명에 자신의 전부를 내주지 않아도 된다.

다 본 뒤에는, 집에 가도 된다

그저 무슨 일이든 단정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느냐고 할 수 있다.

그 충고만 남는다면 정말로 부족하다. 메모지에 써 붙이고 겸손하자고 스스로 일깨우는 것은 다른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구체적인 순간이다. 그림은 여전히 유효했고 새 관점도 옛것을 모두 밀어내지 않았다. 저마다 성립하면서 함께 눈앞의 것을 더 풍부하게 드러낸다. 원칙을 외운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멈춘 것이다.

거꾸로 설명할 수 없으면 아름답다고 할 수도 없다. 화면에서 제멋대로 튀는 잡음은 알아보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별하늘보다 깊지 않다. 잘 보지 못한 것과, 잘 본 다음에도 이것이 마지막 시선은 아니라고 아는 것은 다르다.

멈춘 뒤 드는 기분은 달라도 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 돌아갈 산길을 걱정하는 사람, 춥다며 짐을 챙기는 사람도 있다. 하늘을 보았다고 반드시 감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사람이 내일 밤 다시 와도 길 찾는 데만 정신이 팔릴 수 있다. 그렇다고 얕은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은 한 번 보았다고 날마다 이행해야 할 의무가 아니다.

아이가 휴대폰을 다시 집었다. 이번에는 하늘을 향하지 않고 방금 익힌 이름을 적었다. 내일도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떠나기 전 한 번 고개를 들었다. 그 별들은 이제 잘 찾을 수 있었다. 곁에는 다른 별도 많았다.

조금 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었다.

원논문과 참고 자료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되었으며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기술적인 원논문 전체의 번역은 아닙니다. 각 글의 집필 설명에는 논의를 위해 만든 장면과 실제 연구·사료로 확인한 내용의 구분을 남겼습니다. 이론 논문은 영어·중국어로 읽을 수 있습니다. 미술 작품 소개는 한국어판이 있지만, ‘일상의 발견’과 예전 장문 ‘예술가는 죽었다’는 기존 영어·간체 중국어판으로 이어집니다. 그 본문까지 이번에 한국어로 다시 쓴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쓴 바탕과 범위

『혼돈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썼다. 아이가 별을 익히는 장면과 탁자에서 지도를 보는 장면은 논의를 위해 만든 예시이며 실제 사건의 보도가 아니다. 원논문의 한 줄기를 따라갈 뿐 사상사 논의를 다시 서술하지 않는다. 여기서 혼돈은 과학의 카오스 이론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