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권한을 주었는가
전쟁은 파견된 수단이다
클라우제비츠와 『지구전론』은 전쟁이 독립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전쟁은 외부의 정치 목적이 파견한 수단이므로 그 목적에 보고해야 하고, 목적이 달성되면 멈춰야 한다. 군사적 성공이 스스로 목표가 되는 것을 막는 중요한 형식이다.
하지만 이 형식에는 밧줄의 다른 끝이 고정되어 있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정치 목적이 방어에서 보복으로, 보복에서 상대 체제의 재편으로 커지면 전쟁은 목적에 충실한 채 끝없이 확대될 수 있다. 수단을 묶는 규칙만으로는 권한을 주는 쪽의 팽창을 막지 못한다.
실행하는 조직도 움직인다
마키아벨리가 비추는 것은 다른 층위다. 목적이 그대로여도 전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집단은 전쟁의 지속에 이해관계를 갖는다. 여기에 클라우제비츠의 ‘마찰’이 겹친다. 지연된 정보, 피로, 공포, 날씨와 지형은 원칙을 없애기보다 그 원칙을 적용할 판단 재료부터 닳게 한다.
그래서 기준은 전장에서 그때그때 계산하는 문장이 아니라, 마찰이 시작되기 전에 사람과 제도 안에 자리 잡아야 한다. 실행자를 판단하지 않는 기계로 만들어 마찰을 없애려 한다면, 지키려던 주체의 자리도 함께 사라진다.
동원의 이유와 허용 기준
SAE에서는 함양이 자기 소멸을 스스로 허가할 수 없다. 전쟁이 넓어질 때마다 더 온건한 길이 정말 닫혔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기준은 국가 의지나 지도자에게서 권위를 빌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반박 가능한 관계의 상태에 기대야 한다.
“조국을 위하여”는 사람을 움직이지만 구조적 기준은 구호가 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기준이 약한 것은 아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구체적 이유와 행동을 허용하는 기준은 서로 다른 일을 한다. 둘을 공적 행동 속에서 연결하면서도 동원의 언어가 기준을 삼키지 않게 하는 방법은 아직 남은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