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못해 쓰는 전쟁론
침묵에도 대가가 있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철학은 전쟁 철학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하면 이 영역 전체를 승리, 국익, 복수의 언어에 넘겨주게 된다. 이 글은 전쟁을 시작하는 사람이나 안전한 곳의 구경꾼을 위한 것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전쟁 안에 들어가면서도, 나올 때 자신을 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 방향을 건넨다.
주인공은 전쟁이 아니라 함양(cultivation)이다. 함양은 주체가 다른 주체와 부딪치고 관계 맺으면서 판단과 고유한 방향을 깊게 만드는 과정이다. 전쟁은 이 지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다. 그 과정이 이미 끊겼을 때 다시 길을 열기 위한 비상수단일 뿐이다.
정의가 아니라 구조에서 시작한다
법과 전쟁은 비슷한 층에 있다. 법은 일상의 충돌이 함양을 끊지 않도록 처리하고, 전쟁은 극단적 충돌 뒤에 함양이 돌아올 조건을 회복하려 한다. 둘 다 수단이며 목적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출발점은 ‘우리 편이 정의롭다’가 아니다. 주체성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억압된 주체성은 저항과 기억, 재구성으로 돌아온다는 구조적 관찰이다. 따라서 질문은 선악 판결보다 구체적이다. 이 행동이 함양의 회복을 여는가, 아니면 새로운 단절을 만드는가.
이 기준은 먼저 안쪽을 향해야 한다. 자기 행동을 점검하면 성찰이지만, 타인과 과거를 심판하는 면허로 쓰면 기준 자체가 지배의 도구가 된다.
철학은 방향만 건넬 수 있다
비군사적 길이 정말 다 막혔는지, 확전이 필요한지, 멈출 때가 왔는지는 현장의 정보와 책임을 가진 사람이 판단한다. 조용한 방의 철학자가 군인과 정치가의 결정을 대신할 수 없다.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방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전쟁이 언제까지 함양의 귀환을 돕고, 어느 순간 자신을 목적으로 삼아 함양을 삼키는가. 역사 사례도 누가 옳았는지 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상적 구조를 보이기 위해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