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향한 우정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미뤘지만 반쯤 답한 질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문자 그대로 자기 친구일 수 있는가를 일단 미룬다. 바로 다음 문장에서는 사람이 “둘 또는 그 이상”인 한 자기우정이 가능해 보이고, 최고의 우정은 자기 자신을 대하는 관계와 닮았다고 한다. 이름의 문제는 미뤘지만 우정의 원천은 미루지 않았다.
상대 자신을 위해 좋은 것을 원하고, 그가 계속 살기를 바라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함께 산다는 우정의 표지는 좋은 사람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에서 먼저 나타나 친구라는 또 다른 자기에게 간다. 아무 자기관계나 출발점은 아니다. 좋은 사람은 욕구와 판단이 조화를 이루고 자신과 함께 있기를 견딘다. 나쁜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자기 행동을 떠올리기 싫어 사람들 속으로 달아난다.
확장인가 새로운 판단인가
SAE도 자신을 목적으로 대하는 자리와 타인을 인정하는 자리 사이에 조건을 둔다. 자기관계가 자기봉쇄나 자기 식민화가 되면 밖으로 가는 윤리적 관계의 토대가 무너진다. 여기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닿는다.
그 다음 구조는 갈라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친구를 대하는 형식은 좋은 자기관계가 밖으로 확장된 것이다. SAE에서 “나는 목적이다”는 “너도 목적이다”를 논리적으로 낳지 않는다. 안정되고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 가치와 권리를 자기 집단에만 남길 수 있다. 타인이 목적의 원천임을 인정하는 일은 전 단계에서 자동 발생하지 않는 별도의 판단이다.
일상에는 두 문장이 있다. 자신과 잘 지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과, 자신만으로 완전히 만족한 사람이 타인을 인정할 이유를 못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논쟁은 자기관계가 중요한가가 아니라 밖으로 가는 한 걸음이 자라나는가, 새로 선택되는가에 있다.
좋은 자기는 어디서 오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점은 형성의 역사를 추적할 때 나타난다. 덕은 습관에서 생긴다. 입법자는 시민의 습관을 만들며 좋은 정체와 나쁜 정체가 여기서 갈린다. 10권에서 논증과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통하지 않는다. 씨앗을 받아들일 흙처럼 영혼이 먼저 습관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법이 중요한 이유는 부모의 말보다 큰 강제력을 가지고 삶 전체의 형성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적 돌봄을 우선하지만 도시가 실패하면 각자가 자녀와 친구를 교육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개별 교육은 의사가 한 환자를 보듯 더 정확할 수 있다. 그래도 몇 사람을 잘 교육하려는 사람은 보편을 알고 입법자의 능력을 배워야 한다. 자기관계에서 품성, 습관, 교육, 법, 입법으로 사슬이 이어진다.
위치 지도는 교육과정이 아니다
SAE는 층위·분기·보증·조건을 기록한다. 다른 길이 점유되는 지점과 인정이 실패하는 지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몸·가정·학교·도시에서 그런 능력이 여러 해에 걸쳐 어떻게 생기는지 자동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함양은 타인의 길이 막히지 않을 조건을 만드는 일이지만, 공간을 마련하는 것과 걸을 능력을 만드는 것은 다르다.
장인의 도제 관계를 보면 차이가 선명하다. 엄격한 스승과 오래된 작업장의 질서 안에서 배우고 나중에 같은 기준을 전한다. 기준의 기원을 거슬러 가면 언젠가 관습 속으로 사라진다. 구조 지도는 각 단계의 책임을 그릴 수 있지만 실천의 생성과 재생산까지 이미 설명한 것은 아니다.
첫 인정자는 어디서 왔는가
『윤리학』 마지막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입법자가 되는 법을 묻는다. 실제 정치가는 경험을 말로 잘 전하지 못하고 자기 자녀에게도 능력을 물려주지 못한다. 소피스트는 정치와 수사를 혼동한다. 그래서 그는 기존 정체들을 모아 무엇이 도시를 보존하고 파괴하는지, 어떤 법과 관습이 필요한지 조사하자는 작업표를 낸다. 윤리학의 끝은 정치학의 시작이 된다.
SAE에는 “아무도 나를 사람으로 인정한 적이 없는데 처음 타인을 사람으로 인정한 이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우연한 능동성은 누가 했는지 말하지만 능력이 형성된 경로는 말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법과 교육은 강제와 배제라는 위험을 안고도 윤리 능력의 제도적 역사를 묻는다. 퇴행을 기록하는 일과 그것을 다음 연구의 과제로 바꾸는 일은 같지 않다.
그래서 우정의 기원은 단순한 심리 묘사에 머물지 않는다. 좋은 자기 관계가 타인에게 열리려면, 학교와 법과 관습이 낯선 사람의 목적도 실제 이유로 다루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자기 존중과 타인 존중 사이에는 저절로 건너지는 다리가 없지만, 반복되는 공동 판단은 그 다리를 학습 가능한 습관으로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