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선은 배우는가, 주어지는가
네 가지 기원
1권 9장은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묻는다. 학습과 습관, 다른 훈련으로 얻는가, 신이 나누어 주는가, 아니면 우연히 만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능성을 똑같이 다루지 않는다. 신학의 문제는 다른 탐구로 미루지만 먼저 판돈을 낮춘다. 신이 보내지 않고 덕과 배움으로 얻더라도 행복은 여전히 가장 신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다. 기원이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행복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도 넓어진다. 덕의 능력이 심하게 손상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배움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 이를 수 있다. 우연은 더 나쁜 대우를 받는다. 자연과 기술과 좋은 원인은 가능한 최선으로 향하는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인간의 선을 운에 맡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한다. 조건부 이유이지 엄밀한 증명은 아니다.
기원은 가격표가 아니다
이 첫 동작은 오늘도 중요하다. 성공을 운이나 특권 탓으로 설명해 가치까지 없애고, 믿음이 어느 문화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논박이 끝났다고 하며, 즉흥적 행동을 진정성 때문에 높인다. 기원은 조건을 설명하고 공로를 나누고 숨은 의존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우연히 생겼다”에서 “가치 없다”가, “어렵게 했다”에서 “좋다”가 나오지 않는다.
SAE는 발생과 타당성의 분리를 규칙으로 삼는다. 역사는 감사 안의 증거가 될 수 있지만 먼저 왔다는 이유만으로 판결을 내릴 수 없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에 SAE가 하기 어려운 일을 한다. 행복이 이미 최고선이므로 그 가치가 어떤 기원이 어울리는지 제한한다. 처음에는 기원에서 가치를 떼고, 다음에는 가치로 기원을 제한한다.
최고의 활동
10권은 네 기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질문, 행복의 가장 높은 활동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행복이 덕에 따른 활동이라면 우리 안의 가장 좋은 부분이 하는 활동이 최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놓고, 가능한 한 불멸해져 우리 안의 최선에 따라 살라고 한다.
사유하는 부분이 권위를 가지고 더 좋기 때문에 각 사람 자신에 가장 가깝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는 ‘보인다’와 이유가 붙어 있다. 아무 조건 없는 전신 초상은 아니다. 그는 바로 한계를 놓는다. 관조하는 사람도 인간으로서 함께 사는 한 일상의 덕과 외적 조건이 필요하다. 최고 활동이 복합적인 인간 삶을 지우지 않는다.
정상 없이 얻는 것
SAE는 이 건축을 거부한다. 한 책임이 답을 받고, 검토 가능한 구분이 만들어지고, 배제된 주체가 인정되는 국소적 획득을 기록한다. 그것은 고정된 최고 상태까지의 거리를 줄인 것이 아니다. 완성이 불가능한데 왜 계속하느냐는 질문은 애초에 SAE가 놓지 않은 목적지를 가정한다.
이 거부에는 비용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부분을 ‘가장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SAE는 이 결정에서 이 능력이 지배적이고 이 약속이 지금의 나를 표현한다는 주소 있는 문장만 말할 수 있다. 자기묘사는 묘사하는 행위를 포함하지 못하고 대상인 주체는 쓰는 동안에도 변한다. “이것이 나다”는 책임 있는 말일 수 있지만 영원한 봉인은 아니다.
끝에 돌아온 우연
10권 마지막에서 우연은 작은 자리로 돌아온다. 법과 정체의 자료는 이미 판단 능력이 형성된 사람에게 유용하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우연히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번역에 따라 타고난 판단력으로 읽기도 하지만 논증의 위치는 같다. 한 번 맞힌 결과가 그 결과를 반복할 능력을 증명하지 않는다.
양쪽은 기원과 타당성을 분리한 뒤 갈라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정된 최고선의 가치가 적절한 기원을 제한하게 한다. SAE에는 그런 명령을 내릴 정상이 없다. 이 결과가 이 주소에서 근거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삶을 하나의 완성형에서 떨어진 거리로 재지는 못한다. 그 겸손은 하나의 척도를 피하는 힘이며 동시에 전역적 방향을 잃는 대가다.
한 번의 훌륭한 선택도 능력의 기원을 확정하지 못한다. 좋은 교사를 만난 행운, 안정된 제도, 타고난 기질, 오랜 연습이 한 순간에 겹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불운한 결과가 곧 성품의 실패를 뜻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행복을 배움과 선물 가운데 하나로만 분류하기보다, 각 조건이 어느 층위에서 작동했는지 분해해야 한다. SAE는 국소적 판단의 근거와 수혜·비용을 기록하게 하지만, 어떤 삶이 전체로서 최고인가를 대신 결정하지 않는다. 최고의 선에 관한 마지막 판단은 여전히 실천자의 몫이며, 그 판단에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한 행운을 인정하는 겸손이 포함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