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E와 데카르트의 『성찰』 · 여섯째 글 · 빈자리의 향방
비어 버린 그 자리
한 번의 요청과 한 번의 허락, 서로 다른 두 시점의 뜻이 나중에는 책을 편집하는 근거가 됩니다.
1647년 프랑스어판에서 제4답변을 넘기면 다음은 가상디의 제5반론이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짧은 글이 있습니다.
저자의 글
제목은 제5반론에 관한 저자의 선언입니다.
그는 먼저 처음의 방식을 다시 설명합니다. 초판이 나오기 전에 소르본의 박사들뿐 아니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모든 학자에게 성찰을 검토받고 싶었다. 반론과 내 답변을 제기된 순서대로 성찰 뒤에 인쇄하여 진리가 더 분명해지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어 제5반론은 가장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고 길기도 했지만, 저자를 소홀히 대하지 않으려고 순서대로 실었다고 합니다. 그가 인정하지 않은 것을 그의 이름으로 돌리지 않도록 교정쇄도 사람을 통해 보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방향이 바뀝니다. 그가 나중에 큰 책을 써서 내가 반론을 출판했다고 불평했는데, 마치 그의 뜻을 거스른 것처럼 말하며 사적으로 가르쳐 주려고 보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제 기꺼이 그 뜻을 따라 이 권에서 빼겠다. 다른 반론을 번역하는 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 묶음을 생략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독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독자들이 아쉬워하지 않도록 이 자리에서 일러두겠다. 최근 반론을 다시 읽고 그 큰 책의 새 재반론도 읽으며 답해야 할 곳을 골라 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치’와 ‘이 자리에서’
하나는 ‘마치’입니다.
바로 전에는 교정쇄를 보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어 상대의 불평을 전할 때에는 마치 그의 뜻을 거스른 것처럼 말한다고 씁니다. 그 불평을 인정하지도 명확히 반박하지도 않고, 불평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자리에서’입니다.
선언문은 자신이 어디에 놓였는지 압니다. 제5반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서서, 빈자리를 대신해 말합니다.
책 끝까지 넘겨 보면
제6반론과 답변을 읽어도 책이 끝나지 않습니다.
또 선언문이 있는데, 이번에는 번역자가 썼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책의 논리를 철저히 이해하려고 번역했다고 합니다. 제4반론까지 옮기자 원고가 다른 이를 거쳐 데카르트에게 갔습니다. 데카르트는 정중하게 몇 마디 하고 계속 번역해 달라면서, 번역자를 격려하고 수고도 덜어 주려고 제5반론은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프랑스어 새 판본에서 빼려 했으며, 증거로 원래 자리에 자신의 선언을 놓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번역자는 말합니다. 이 반론은 큰 학식으로 이름난 분의 글이니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 데카르트가 답하지 못해 뺀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생겨서는 안 된다. 더구나 그러면 독자에게 책의 가장 큰 덩어리가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번역했습니다. 제5반론과 답변, 관련 편지를 함께 책 맨 뒤에 배치했습니다.
같은 요청, 두 설명
한 권 안에 같은 일의 설명이 둘 있습니다.
저자는 가상디의 뜻을 따르려고 생략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번역자는 자기 수고를 덜어 주고 그 밖에 특별한 사정도 있어서 생략을 부탁받았다고 합니다.
둘 다 당사자가 직접 썼고 같은 책에 실렸습니다. 제6반론과 답변을 사이에 두고 앞뒤에 있습니다. 설명을 하나로 맞추지 않고 둘 다 인쇄했습니다.
번역자가 남긴 이유는 저자 자신의 방식과 연결됩니다. 상대가 무게 있는 사람일수록 그 공방을 보여야 하며, 한 묶음을 빼면 답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읽힐까 걱정됩니다. 저자의 선언 끝에는 다시 읽었으나 답할 곳을 못 찾았다는 결론만 남았습니다. 번역자는 판단할 자료를 다시 인쇄했습니다. 첫째 글에서 봤듯, 검토를 견뎠다고 말만 해서는 안 되고 검토 자체를 종이에 놓아야 합니다.
어떻게 넣었을까
여기서 번역자가 저자 몰래 넣었거나 명령을 거슬렀다고 읽기 쉽습니다.
둘 다 아닙니다. 20세기 초 전집의 두 편집자는 분명히 썼습니다. 번역자는 빼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대로 번역했고, 반론과 답변을 넣어도 된다는 허락을 데카르트에게 얻었습니다. 다만 원래 자리에 놓지 않고 제6반론과 답변 뒤, 책의 마지막 부분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편집자들의 표현은, 데카르트의 의견에 반했지만 그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647년판의 제5반론은 이렇게 정해졌습니다. 저자가 생략을 부탁했고, 다시 수록을 허락해서 책 끝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백오십여 년 뒤
1904년, 두 편집자는 프랑스어판을 담는 권에서 제5반론과 답변을 뺐습니다.
인쇄는 허락했지만 번역문을 직접 살피지 않았으니 직접 승인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이 전집은 저자가 직접 교정하고 승인한 것만 싣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선언과 번역자의 선언, 편지라는 세 관련 문서는 그대로 인쇄했습니다.
그래서 이 권에는 제5반론에 관한 말들은 다 있지만 제5반론은 없습니다.
편집자들에 따르면 1647년판에서 다섯째 묶음을 없애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승인한, 본래 원했을 법한 모습이 됩니다. 그들의 판본은 그 모습을 따랐습니다.
생전에 나온 프랑스어판 가운데 그런 책은 없었습니다.
같은 두 편집자가 라틴어 원문을 담는 권에서는 달리 했습니다. 다섯째 묶음을 원래 자리에 두며, 처음 생각에 더 충실하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빼 달라고 했던 말은 일시적인 기분에서 흘러나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편집자들은 말했습니다.
두 권의 이유는 같은 원칙, 저자 자신의 손을 거쳤는가에 닿습니다. 1642년 라틴어판은 그의 곁에서 인쇄했고, 편집자들은 아마 직접 돌봤을 것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어의 그 번역문을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권이 인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시점에 품었던 그의 두 의향입니다.
그 상자
집안 어른이 돌아가시면 누군가 정리해야 합니다.
장 안에 상자가 있습니다. 그 물건들은 필요 없다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하지만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누가 묻자 일단 두자, 맨 아래에 놓아 두라고 했습니다.
정리하는 사람은 상자 앞에 섭니다. 둘 다 본인이 한 말입니다. 어느 말을 따를까요.
맺으며
책은 하나의 배치에서 출발했습니다. 반론을 인쇄해야 근거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는 배치입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빈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대신해 말하는 것으로는 그의 요청 하나와 허락 한 번이 있고, 나중에는 처음 생각과 본래 원했을 법한 모습도 더해졌습니다.
모두 그의 이름 아래 놓였지만 다섯째 묶음을 같은 곳으로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들은 아직 인쇄되어 있습니다.
SAE와 나란히 읽기 · 선택해서 읽는 곁글
『SAE 제1비판』은 첫머리에서 몇 가지 쓰는 법을 세웁니다. 받아 맡은 것은 무엇이고 어떤 지위를 가지며 무엇에 근거하고 다른 길은 있는지 하나씩 밝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독자가 그 쓰는 법을 어긴 곳을 잡아낸다면 바로 그것이 기대하는 쓰임이라고 합니다. 1647년판에는 생략할 이유와 생략하지 않을 이유가 모두 인쇄되어 독자가 직접 맞춰 볼 수 있습니다. 곁글이지 논증은 아닙니다.
관련 SAE 산문 읽기본문·판본·출처
한국어판은 Non Dubito에 공개된 중국어 산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데카르트 원전이나 전문 논문의 완역이 아닙니다. 기존 영어판도 영어권 독자에게 맞춰 독립적으로 썼으며, 중국어 간체판과 번체판에는 전문이 있습니다. 인용과 판본 차이에 관한 한정은 각 편의 주석에 남기고, 참고한 본문과 편집자 설명의 링크를 따로 제시합니다. SAE와 나란히 놓는 곁글은 본문 뒤에서 선택해 읽을 수 있으며, 역사 속 논쟁을 결판내는 논증이 아닙니다.
본문과 판본에 관한 주석
주로 1647년 프랑스어판의 저자 선언과 번역자 선언, 아당·타네리 전집 제7권과 제9권의 서문 및 편집자 설명에 근거합니다. 의견에는 반하지만 허락을 얻었다는 구분은 편집자가 명시한 것이며, 인쇄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동의도 얻었다고 추론한 것이 아닙니다.
상자는 이 연작의 비유입니다. 저자의 요청, 나중의 허락, 후대 편집자의 선택을 서로 다른 층위로 남기고, 기록 밖의 동기를 보태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