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은 걷는 사람 안에 있지 않다
본다는 것은 사건에 무엇을 더하는가
신의 예지와 자유의 문제에 답하면서 철학의 여신은 평범한 인간의 사례부터 꺼낸다. 지금 일어나는 사건을 본다고 해서 보는 행위가 사건에 필연을 더하는가. 보에티우스는 아니라고 답한다. 여신은 지식과 관련된 모든 필연을 가짜라고 지우지 않는다. 신이 미래 행위를 본다면 그 행위는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강한 명제를 인정하고, 필연이 적힐 주소를 바꾼다.
같은 행위가 신의 지식과 맺는 관계에서는 필연적이고 그 자체의 본성에서는 자유롭다. 내가 어떤 사람이 걷는다고 안다면 그가 걷는 것은 조건적으로 필연이다. 알려진 것은 그 관계 안에서 다를 수 없다. 그러나 걷기의 본성이 의지나 다리를 강제하지 않았다. 필연은 ‘걷는다고 알려진 한에서’에 속하지 걷는 사람의 몸 안에 있지 않다.
떠오르는 해와 걷는 사람
여신은 같은 두 사례를 두 번 쓴다. 해가 뜨고 한 사람이 걷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지만, 관찰자의 같은 시야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두 사건이 같은 양태를 갖지는 않는다. 하나는 자연의 질서에, 다른 하나는 자발적 행동에 속한다.
또 실제로 일어나는 순간에는 어느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둘 다 발생 전부터 필연이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현실성의 필연을 사건의 기원으로 소급해 보내면 안 된다. 두 경우 모두 표지를 떼고 운반한 판단이 환상을 만든다. 한 주소에서 참이었던 말이 다른 주소로 가면서 예전 권위를 그대로 행사한다.
반박하지 않고 주소를 다시 붙이기
SAE에서 판단은 사물에서 하나의 값을 계산해 내는 함수가 아니다. 판단 대상과 구별 행위가 맺는 관계다. 어느 법정, 어느 층위, 어느 분기와 전제에서 나온 판정인지 주소가 붙는다. ‘내가 그가 걷는다고 안다면 그는 걷는다’는 지식과 사건의 관계에서 참이다. ‘그러므로 그는 걷기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은 필연을 행위자에게 밀수한다.
철학의 여신의 강점은 첫 문장을 인정하는 데 있다. SAE도 관할을 넘은 명제를 무조건 삭제하지 않고, 출처와 효력을 다시 기록해 유효한 자리로 돌려보낸다. 『위안』은 단순 필연과 조건적 필연의 구분으로 한 매듭을 푼다. SAE는 같은 주의력을 계속되는 감사로 만든다. 판정이 나올 때마다 주소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사후에 덧붙인 필연
결정이 끝난 뒤 조직은 흔히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설명한다. 살펴보면 이전에 특정 약속을 받아들였고, 그 조건 아래에서 이번 결정이 따라왔음을 알게 된다. 첫 문장은 필연을 결정 자체에 넣는다. 두 번째 문장은 누군가 책임져야 할 앞선 행위로 돌려보낸다. 앞 문장은 장부를 닫고, 뒷 문장은 저자를 찾는다.
회고도 같은 불가피성을 만든다. 결과를 안 뒤에는 모든 단계가 그 결말을 향한 것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알았다’는 사람에게 사건 전에 실제 돈을 걸었을지 물어볼 수 있다. 걸지 않았을 사람의 사후 확신을 사전 필연으로 기록할 수는 없다. 환상의 구조를 이해해도 보이는 방식은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한 번의 정답보다 습관이 필요하다. 필연이 나타날 때마다 누가 그것을 거기에 적었는지 묻는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