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지고 노는 겁니까
듣는 사람이 논증을 다시 조립하다
제3권 끝무렵 철학의 여신은 어떤 것도 신의 본성에 거슬러 신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큰 결론에 이른다. 보에티우스가 끼어든다. ‘나를 가지고 노는 겁니까.’ 출구 없는 이유의 미로를 엮은 것인가, 아니면 신적 단순성의 놀라운 원을 스스로 접어 닫은 것인가. 그는 여신이 답하기 전에 비난과 가능한 변호를 함께 내놓는다.
이어 행복을 최고선으로 놓은 데서 시작해, 최고선이 신 안에 있음, 신과 선과 완전한 행복의 동일성, 신성에 참여함, 만물이 하나를 추구함, 선을 통한 세계 통치까지 일곱 단계를 재구성한다. 문제는 결론의 내용만이 아니다. 어느 단계도 체계 바깥에서 근거를 받지 않고 내부의 다른 문장에서 신용을 빌리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빌려준 보증인가, 대상의 모양인가
철학의 여신은 놀고 있지 않다고 답한다. 신적 형상은 바깥으로 흩어지지도, 외부에서 무엇을 받지도 않는다. 파르메니데스의 완전한 구처럼 움직이지 않으면서 변하는 세계를 돌린다. 그러므로 이 대상에 관한 말이 바깥 근거를 쓰지 않는 것은 결함이 아니라 충실함이다. 플라톤의 말처럼 담론은 주제와 닮아야 한다.
그럼에도 겉모양이 같은 두 진단이 남는다. 잘못된 순환 논증에서는 문장들이 얻지 못한 권위를 서로 공짜로 빌려준다. 내재적 사유에서는 언어가 외부 지점을 허용하지 않는 대상의 구조를 따른다. 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느 쪽인지 결정할 수 없다. 오류인지 닮음인지, 혹은 주장 범위를 줄이라는 표시인지 별도의 판정이 필요하다.
SAE가 자기 원을 장부에 적는 법
『SAE 제1비판』은 모든 인식이 잔여를 남기고 이후의 인식도 이전 행위를 소급해 완전하게 만들 수 없다는 명제를 심사한다. 이 명제를 가장 강한 지위로 올리려면 그것이 말하는 바를 이용해 증명해야 한다. 검증 자체가 또 하나의 인식 행위가 되어 새 잔여를 남긴다. 또한 모든 가능한 주체를 SAE 인식론의 관할에 넣어야 한다.
SAE는 이 원을 숨기지 않고 명제의 자격을 한 단계 낮춘다. 책임지고 받아들이지만 교체 가능한 공준으로 남기며, 침범할 수 없는 진리로 만들지 않는다. 더 단단한 중심은 훨씬 얇다. 부정을 부정하는 행위도 이미 부정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 한 점의 확실성을 체계 전체에 배급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왕좌로 쓰지 않는 것이다.
내 말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기
논쟁 중 상대가 어제와 방금 전 내가 한 말을 차례로 배열할 때가 있다. 모든 문장은 내 것이지만 그 구조는 처음 본다. ‘왜 그런가’라고 물을 때마다 답이 같은 건물의 다른 방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고리에 갇힌 것일 수도 있고 주제가 정말 외부 발판을 주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보에티우스의 중단은 여신이 원을 선택하기 전에 미로와 원을 모두 보존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위안』은 순환을 대상에 대한 충실성으로 읽는다. SAE는 지키고 싶은 명제의 권위를 낮추는 근거로 읽는다. 같은 모양을 보고 다른 장부 항목을 적는다. 쟁점은 원의 존재가 아니라, 누가 그 원의 의미를 결정하며 그 판정에 재심의 문이 남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