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 108 · 자기 자신이 되기
장자를 꿈꾸다
칠원의 관리, 호수의 물고기, 나비의 꿈. 세계를 깎아 나눌 때마다 그 바깥에 남은 것으로 되돌아가는 사람.
1. 칠원의 관리
장자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사마천은 『사기』 「노자한비열전」에 짧은 두 문단을 남겼다. 몽 땅 사람, 이름은 주. 한때 몽의 칠원에서 관리로 일했고 양 혜왕, 제 선왕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 책은 십여만 자이며 대체로 우언이라고 한다. 한대 역사가가 그린 윤곽이지, 모든 항목이 따로 검증된 이력서는 아니다.
그 두 문단에는 태어난 해도 죽은 해도 없다. 집안 내력, 어린 시절, 배움의 과정도 없다. 벼슬에 대해서는 칠원리라는 이름만 남는다.
칠원리. 대개 옻나무밭을 관리하는 작은 벼슬로 이해한다. 전국시대의 관직들 사이에 놓인 작은 이름이다. 장주가 제도와 접했던 사람임은 보여 준다. 그러나 평생 거친 모든 직책을 나열해 주지도, 오늘의 행정 등급으로 환산하게 해 주지도 않는다.
이어서 기록은 하나의 거절로 향한다.
어떻게 칠원을 떠났을까. 쫓겨났을까, 그만두었을까, 임기가 끝났을까. 사서는 말하지 않는다. 빈칸은 빈칸으로 두자. 이 전기의 무게는 퇴직 절차가 아니라 다음 제안에 대한 대답에 실린다.
『사기』에서 초 위왕은 장주의 재주를 듣고 후한 예물을 보낸다. 사신은 높은 재상의 자리를 제안한다. 장주는 웃는다. 역사가는 그 웃음을 남겼다.
금은 큰 이익이고 재상은 귀한 자리다. 하지만 제사의 소를 본 적이 없는가. 여러 해 먹이고 비단을 입혀 큰 사당으로 끌고 간다. 그때 홀로 노는 작은 돼지가 되고 싶어진들 될 수 있겠는가.
어서 가라. 나를 더럽히지 말라. 나는 더러운 도랑에서 마음껏 노는 편이 좋다. 나라를 가진 사람에게 굴레 씌워지기보다 벼슬하지 않고 내 뜻을 즐겁게 하겠다는 대답이다.
그는 제안의 매력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매력과 맞바꾸는 것을 본다. 최고의 대접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남의 용도로 징발된 물건이 되었을 수 있다. 수놓은 비단이 아름다워질수록 새끼 돼지의 자유는 멀어진다.
작은 관리와 재상은 이 전기의 양 끝을 이룬다. 장주가 모든 관직을 직접 경험했다고 할 필요는 없다. 지위가 너를 높일 때 너를 남의 목적에 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옷감은 달라도 고삐는 같을 수 있다.
이 글이 따라가는 첫 번째 되밀림이다. 완전한 경력으로 세상을 모두 꿰뚫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웃음이 있다. 가장 큰 보상에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하게 맡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
2. 숫돌
장자에게는 친구가 있었다. 논적이 있었다고 해도 좋다. 아마 둘 다였다.
혜시, 곧 혜자. 변론으로 이름난 전국시대 사상가이며 후대에는 명가로 분류된다. 『장자』는 그를 양나라의 재상으로 그리며 장주와 거듭 말을 주고받게 한다. 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있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거절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구조의 서로 다른 쪽에 서 있지만 말은 계속 상대에게 닿는다.
그 대화는 중국 철학의 글 가운데 유난히 아름답다.
「추수」의 한 장면에서 누군가 혜자에게 장자가 자리를 빼앗으러 왔다고 한다. 두려워진 혜자는 사흘 밤낮으로 수색하게 한다. 장자가 제 발로 찾아와 새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쪽 바다에서 북쪽 바다로 날아가는 원추라는 새가 있다. 오동나무에만 앉고, 대나무 열매만 먹으며, 단 샘물만 마신다. 올빼미 한 마리가 썩은 쥐를 얻었다. 원추가 위를 지나자 고개를 들고 위협하는 소리를 지른다. 제 쥐를 빼앗길까 봐서다.
그대는 지금 양나라를 가지고 나를 그렇게 위협하는가. 질문 하나에, 온 힘으로 지키던 보물이 갑자기 작아 보인다.
이 대화들에서 혜자는 장자의 숫돌이다. 이름을 가르고, 이유를 캐고, 주장에 근거를 요구한다. 백마는 말이 아니라는 논변은 더 직접적으로 공손룡에게 속한다. 그것을 혜시에게 옮기지 않아도 이 논쟁 세계의 날은 충분히 예리하다.
이 글은 구별하는 일을 ‘깎기’라 부른다. 끝까지 깎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가장 유명한 장면은 호수(濠水)라는 강 위의 다리에서 벌어진다.
두 사람이 산책한다. 장자가 물고기를 보며 말한다. 저토록 여유롭게 헤엄치니 저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다.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혜자가 묻는다.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모른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장자가 되묻는다.
혜자가 논증을 조인다. 나는 그대가 아니니 그대를 모른다. 그러나 그대가 물고기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도 분명하다.
장자는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대는 내가 어디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느냐고 물었다. 이미 내가 아는 것으로 놓고 물은 것이다. 나는 이 강 위에서 안다.
‘안지’라는 말은 어떻게 아는가와 어디서 아는가 사이를 움직인다. 마지막 답을 엄밀한 논리적 증명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다른 울림을 들어 보자. 서로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선언하기 전에, 두 사람은 이미 같은 다리에서 같은 강을 보고 있다.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다. 첫 번째 칼질이다. 그러니 물고기를 알 수 없다. 두 번째다. 앞 문장은 차이를 세운다. 뒤 문장은 차이가 왜 반드시 이해를 막는지 설명해야 한다. 한 추론을 묻는 것이지 역사 속 혜시를 허무주의자라 단정하거나 모든 논리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대답이 우리를 뒤로 민다. 각자의 조각 속으로가 아니라 구별이 아직 다 담지 못한 만남으로. 사람은 물고기가 아니다. 그 차이는 남는다. 그러나 함께 여기 있는 경험도 차이 하나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 남은 것을 이 글은 ‘자르기 이전’이라 부른다. 두 번째 돌아옴. 구별은 말을 했지만 모든 말을 끝내지는 않았다.
3. 동이를 두드리다
「지락」은 장면을 바꾼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다.
혜자가 조문을 온다. 장자는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한다.
같이 살며 아이를 기르고, 늙어 죽은 사람 아닌가. 울지 않는 것도 그렇거늘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까지 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혜자의 항의에는 무게가 있다.
장자는 처음 죽었을 때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고 답한다. 그러고는 시작을 살폈다고 한다. 본래 생이 없고, 형체도 없으며, 기도 없었다. 아득하고 어렴풋한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 기가 생기고, 기가 형체로, 형체가 생명으로 바뀌었다. 이제 다시 변하여 죽음으로 간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이어지는 것과 같다.
그녀는 천지라는 큰 방에 편히 누워 있다. 곁에서 계속 울부짖는 것이 이 변화에 통하지 못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그만두었다고 한다.
죽음도 자연이니 슬픔은 필요 없다는 명령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출발하지 않는다.
먼저 슬펐다.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순서가 중요하다. 그는 처음부터 인간의 아픔 바깥에 있던 사람이 아니다.
그다음에 되짚는다. 죽음, 생명, 형체, 기,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한 걸음 물러설 때마다 보는 자리가 멀어진다. 끝이 이전의 모든 것을 홀로 설명할 권리를 잃는다.
슬픔은 끌이다. 죽음이 살아 있던 연결을 끊고, 끊긴 자리에 통증이 남는다. 이야기 속 장주는 그 통증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에 밀려 죽음 이전, 형체 이전, 기 이전으로 간다.
이 글은 그 먼 곳을 혼돈이라 부른다.
생과 사가 관계없는 두 세계가 아니라 더 큰 변화 안에 놓인다. 그렇다고 사계절의 비유가 같은 사람이 봄처럼 돌아온다고 약속하지는 않는다. 남겨진 사람에게 언제까지 울 수 있는지 기한을 정하지도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이 장면 속 장주가 죽음을 바라보는 자리다.
그는 울음을 멈춘다. 사랑도 남고 상실도 남는다. 다만 아내의 생 전체를 마지막 순간에서만 보지 않게 된다. ‘사랑과 상실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이 글의 철학적 비유이지 한 여성의 고유한 생을 지우는 말이 아니다.
세 번째 돌아옴. 죽음의 절단은 실제지만 변화 전체를 담지는 못한다.
4. 나비의 꿈
이제 가장 유명한 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며 제 삶을 즐겼고 주를 알지 못했다. 문득 깨니 분명히 주다. 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가, 나비가 주가 되는 꿈을 꾸는가. 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고 본문은 말한다. 이것을 물화라 한다.
꿈에서는 나비임이 세계를 채웠다. 깨어나면 주라는 자명함이 돌아온다. 그런데 그 두 확실함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를 심사도 없이 다른 하나의 최종 재판관으로 세우기가 어려워진다.
진실과 환상, 깸과 꿈, 정체성과 변화. 여러 질문이 열린다. 여기서는 해석들의 순위를 매기지 않고 한 줄기를 좇는다. ‘누구’를 확정하려는 사람은 자기 이름을 쥔 손을 조금 풀 수 있는가.
나비가 장자를 꿈꾼다. 이것을 A라 하자. ‘주를 알지 못함’ 속에서 익숙한 이름이 잠시 물러난다. 나비가 감각도 구별도 없는 동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주라는 정체성이 모든 자리를 차지하지 않게 된다. 그 이름에 고정되지 않은 생이 이름 있는 사람을 꿈꾼다.
장자가 나비를 꿈꾼다. 이것을 B라 하자. 자기 정체성에 익숙한 사람이 잠든 동안 그 옛 이름이 지배하지 못하는 삶에 들어간다.
어느 쪽인가. 본문은 둘 사이의 최종 판결을 주지 않는다.
A와 B는 형식논리의 명제와 그 부정이 아니다. 고전논리에서 이중부정을 없애면 A로 돌아간다. 그 규칙은 장자가 논리 바깥으로 나갔다는 증명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부정의 부정’은 읽기의 회전을 가리킨다. 한 답에 붙박이지 않으면서 반대 답에도 서둘러 이사하지 않는 일. 모름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모름은 입증된 제삼의 우주 상태가 아니다. 읽기가 잠시 머물 자리다. 누구의 꿈을 누가 소유하는지 결정하기 전에, 꿈이 ‘누구’의 자명함을 어떻게 흔드는지 본다.
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는 문장을 잊으면 안 된다. 차이는 있다. 느슨해지는 것은 차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영원히 못 박으려는 충동이다.
물화에서 이 글이 읽는 것은 차이를 다 지우지 않으면서 변하는 정체성이다. 자기 이름이 감옥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이 그 말의 유일한 뜻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두 이야기가 모두 생길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 글의 철학적 연장이다. 잠시 그 자리를 모름이라 부른다.
앞의 장면들이 돌아온다. 칠원과 재상에서 사회적 역할의 앞쪽으로, 강 위 다리에서 주객의 절대적 벽 앞쪽으로, 동이에서 한 생의 종점 앞쪽으로. 꿈은 더 멀리 데려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아직 당연하지 않은 곳으로.
그 줄기 끝에 다른 우언, 다른 이름이 있다.
5. 혼돈
「응제왕」 끝에 세 임금이 나온다. 남해의 숙, 북해의 홀, 가운데의 혼돈.
숙과 홀은 혼돈의 땅에서 자주 만나고 후한 대접을 받는다. 은혜를 갚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 일곱 구멍이 있는데 혼돈만 없다. 그것을 만들어 주기로 한다.
하루 하나씩 뚫는다. 이레째 혼돈이 죽는다.
이 짧은 이야기는 장자를 읽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다.
구멍은 능력이다. 눈은 밝음과 어둠을 가르고 귀는 소리와 고요를 가른다. 알아볼 수 있는 세계가 생긴다. 이 글의 그림에서 구멍 하나는 칼날 하나이기도 하다.
두 손님은 죽이려 하지 않았다. 차이를 결핍으로 여겼다. 주인을 정상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진심 어린 선의가 죽음이라는 결과를 막지는 못한다.
혼돈은 여기서 아직 남의 척도대로 깎이지 않은 생의 모습이다. 능력이 악인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가져야 할 유일한 모양이 될 때 위험해진다. 두 사람은 자기들의 정상을 건네면서 혼돈 자신의 사는 법에는 자리를 남기지 않았다.
구멍이 하나 늘면 혼돈은 조금 줄어든다. 장비가 완성되었을 때 도움을 받던 이는 더는 없다.
앞의 장면들을 곁에 놓아 보자.
제도는 작은 벼슬이나 높은 자리를 준다. 자신의 위치가 보인다. 하지만 사람을 자리로만 정의하면 제사의 소에게 벌써 예복을 입히는 셈이다.
사람과 물고기의 구별은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절대적인 담이 되면 아직 이해해야 할 만남을 밖으로 밀어낸다.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방향은 존재를 잴 수 있게 한다. 끝에서만 보면 형체조차 생기기 전의 변화를 잊는다.
이름은 나라고 말하게 한다. 그 이름이 굳으면 물화의 움직임이 가려진다.
시각, 논리, 정체성, 제도는 쓸모 있다. 쓸모는 비용을 묻지 않아도 된다는 면허가 아니다. 얻은 것이 무엇을 가렸는가. ‘혼돈 일부의 죽음’은 그 대가를 그리는 비유다.
장자의 글도 언어와 구별과 논증을 쓴다. 모든 차이의 거부라는 편에 놓을 수 없다. 그래도 독자는 거듭 밀려 돌아온다. 구성에서 빠져나간 것이 너무 크다. 일이 끝났다고 말하려면 아직 볼 것이 많다.
혼돈.
여기서 부정의 부정은 두 동작을 잇는다. 절단이 연속을 나누고, 생긴 구조가 담지 못한 것을 무용하다며 버린다. 배제된 가치가 처음을 다시 보라고 요구한다. 두 번 부정하면 혼돈이 자동으로 도출된다는 공식이 아니라 해석의 길이다.
무용의 용. 재목이 못 되는 나무의 긴 수명. 동이의 노래. 나비의 변화. 깎을 때마다 돌아오고 깊이 깎을수록 멀리 돌아오는 사람의 모습이 이어진다.
6. 다른 세 사람과의 거리
네 편의 글을 나란히 놓자.
이 비교의 그림에서 니체는 망치로 가치를 시험한다. 신의 죽음이 물려받은 근거를 흔들고, 진리는 비유와 인간의 창조까지 거슬러 질문된다. 유한한 사람은 그래도 행동에 이유를 주어야 한다.
죽음을 알면서 의미를 만든다는 것은 이 연작의 표현이지 니체의 전문 용어가 아니다. 그가 타자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한 문장에 그의 작품을 가둘 수도 없다. 우리가 이어 가는 질문은 자기 극복이 어떻게 남을 단순한 재료로 만들지 않는 인정으로 향하느냐다.
칸트는 이성으로 경계를 가른다. 현상과 물자체, 선험적 조건과 경험, 정언명령과 가언명령. 세계를 두 물건으로 자른 뒤 다시 꿰매는 것이 아니다. 『판단력비판』은 자연과 자유 사이의 이행을 다룬다. 다리는 근거 있는 비유지만 한계도 있다.
앎을 제한하는 일은 자유와 도덕적 행동의 자리를 여는 일이기도 하다. 경계가 가두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왕양명은 마음으로 방향을 돌린다. 대나무의 회상, 용장, 심즉리, 지행합일, 치양지. 욕망과 습관과 편견의 먼지를 턴다. 흙을 걷어 보물을 찾는 고고학자가 떠오른다.
그렇다고 수양이 세상에서 안방으로 철수하지는 않는다. 실제 일들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 행동은 여전히 판단의 대상이며 군사적 승리가 철학을 입증하지도 않는다.
장자의 우언은 깎이는 쪽으로 눈을 돌린다. 보는 능력이 생길 때 보이지 않는 것은 어디로 가는가. 앎이 자리 잡을 때 미지의 것은 어디 놓이는가. 도덕적 판단을 하면서 분류하기 힘든 생을 미리 지우지는 않았는가.
선악을 구별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척도를 적용하는 바로 그 순간 척도가 치르는 대가를 묻는다.
니체의 망치는 창조로 계속 나아간다. 칸트의 경계는 이성이 앎을 자처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 양명의 전환은 실제 일에서 이치를 찾고 실천하는 방식을 바꾼다. 장자의 모습은 그에 비해 깎기 이전으로 밀려난다. 구멍 없음이 결함 아니라 그 자체의 온전함으로 보이는 곳이다.
이 글은 남은 것의 편에 서는 자리를 장자에게 남긴다. 다른 세 사람이 손실, 한계, 환원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한 적 없다는 주장은 아니다. 조명을 바꾸는 것이지 최종 순위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망치, 메스, 고고학의 모종삽. 맞은편에는 칼날을 받는 혼돈이 있다. 그쪽에서 건설은 손실로도 보인다. 진보가 비용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읽고 남길 말은 그저 ‘깎지 말라’가 아니다. 깎은 뒤 다시 보라. 혼돈으로, 무하유지향으로, 그 한 칼로 다 담을 수 없는 것으로 돌아보라. 독자가 가져가는 말이지 장자의 원문을 가장한 어록이 아니다.
우언의 혼돈은 실제로 죽는다. 그 결과를 지워 선의의 손님들을 면책할 수 없다. 한편 이 글의 철학적 연장에서 혼돈은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미 만들어 놓은 구별이 세계를 다 담지 못한다는 이름이다.
깊이 깎을수록 다 담기지 않은 것은 멀리 물러난다. 구조는 끝나도 남은 것의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들이 우리를 되돌려 완성이 무엇을 두고 왔는지 보게 한다.
7. 무하유지향
혜자가 큰 나무 이야기를 한다. 가죽나무인데 줄기가 울퉁불퉁하여 먹줄에 맞지 않고 가지는 구부러져 자와 그림쇠에 맞지 않는다. 길가에 서 있어도 목수는 쳐다보지 않는다. 그대 말이 꼭 그렇다. 크기만 하고 쓸 데 없어 모두 버린다.
장자의 대답은 나무를 곧게 만들라는 말이 아니다.
무하유지향, 넓고 빈 들에 심으라 한다. 곁에서 아무 일 없이 거닐고 그 아래 자유롭게 누워 자면 된다. 도끼가 수명을 자르지 못한다. 제공할 용도가 없다면 무엇에 시달리겠는가.
무하유지향. 주인을 알리기보다 자리를 여는 이름이다.
도피로 읽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다른 가능성, 철학적 자리를 따른다. 정해진 쓰임이 유일한 척도가 아니게 될 때, 남는 것이라 판정된 생은 어디에서 자리를 얻는가.
유용한 나무는 쓰러진다. 들보, 가구, 관이 된다. 재료로서의 가치가 그 나무를 죽이는 이유가 된다.
무용한 나무는 선다. 목수가 지나친다. 재료의 체계에서 배제되었기에 그 안에서는 얻기 어려웠을 시간을 얻는다. 도끼에 짧아지지 않은 수명이다.
무용의 용은 우언 안에서 용도의 척도를 뒤집는다. 배제된 모든 사람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아니다. 제도 밖에서도 사람은 다친다. 추방을 아름답게만 그려서는 안 된다.
남겨 두는 것은 좋은 목재가 됨을 증명하지 않아도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자리다.
비단 입은 소는 사당으로 간다. 유용하고, 죽는다. 휜 나무는 길가에 남는다. 무용하고, 산다. 두 그림이 서로를 밝힌다.
이 글의 장자는 재목이 못 되는 나무를 고른다. 사신을 통한 초왕의 초대는 거절이 반드시 무능을 뜻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나무는 쓸 수 없음이 무가치와 같지 않음을 보여 준다.
모든 관직을 제단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무엇이든 징발하려는 목록이 잠깐 멎으면 된다. 무하유지향은 그 멎음에 장소를 준다.
8. 네 사람
연작이 상상한 다리로 돌아가자. 역사 속 만남이 아니다. 네 사상의 길을 한 장면으로 그린 것이다.
다리 어귀에는 칸트와 왕양명이 선다. 니체는 부정에서 출발해 그쪽으로 걸어온다.
장자는 다리 위에 있지 않다.
아래 있다. 물속에, 그 강물 속에, 물고기들과 함께 있다.
다리는 이쪽과 저쪽 기슭을 잇는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마주한 두 기슭이라는 구분도 이미 깎기의 결과다. 그 앞에 물이 있다. 장주를 물속에 놓으면 만들어진 통로가 잊기 쉬운 것이 보인다.
칸트는 목적의 왕국을 보고, 양명은 마음의 밝음을 바라보며, 니체는 걷는다. 아래에서 장주가 세 사람을 올려다보고 웃는다.
다리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리는 좋다. 사람을 건너게 한다. 웃음은 그림에 질문 하나를 더할 뿐이다. 만드는 일에도 대가가 있다. 얻은 모양은 무엇을 가렸는가.
동일성과 모순, 시공간과 인과, 생명과 의식, 유한한 삶의 의미 부여와 의심으로 흔들리지 않음. 이 층계는 이 연작의 구성이지 장자의 예언이 아니다. 초기 논문은 열 층이라 불렀다. 옛 번호를 지금의 DD 주소로 곧바로 바꿀 수도 없다.
방향은 말할 수 있다. 주체는 목적이며 단순한 수단만은 아니다. non dubito란 이 구조적 사실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것이지 자기가 언제나 옳다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15DD 자기 입법 주체는 상대의 인정을 돌려받기를 기다리지 않고 타자의 목적 지위를 인정할 수 있다. 16DD 쌍방향 non dubito는 함께 사는 모든 일에서 상호 인정을 지속하는 이상이다. 한 번의 협력이 성공했다고 완성되지는 않는다.
이 말들을 그림 안에 놓는 것은 오늘의 질문을 하기 위해서다. 옛사람을 우리 이론의 저자로 징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혼돈이라는 질문은 남는다. 계단이 아무리 높아도 그것이 다 담지 못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된 우언이 새로운 질문을 만난다. 미리 증명해 주려는 만남이 아니라 다시 보게 하는 만남이다.
네 사람. 니체는 가치의 근거를 흔든다. 칸트는 사람이 목적이라는 지위를 밝힌다. 양명은 양지를 행동으로 가져간다. 장자는 다리 아래 물로 우리의 눈길을 내린다. 모든 옆모습에는 선택이 있다. 누구도 다른 이들의 모든 일을 대신 끝내지 않았다.
물은 계단 수를 다 세지 않았다. 지금도 그 밑을 흐른다.
아득하고 어렴풋한 사이, 아직 모양이 굳기 전.
무하유지향.
그는 다리 어귀까지 걸어갈 필요가 없다. 이미 물속에 있다. 물에는 다리가 필요 없다.
읽기 안내와 출처
『사기』 권63은 후대의 전기다. 『장자』의 대화는 전해진 철학적 장면으로 읽으며 녹취나 확정 연보로 보지 않는다. 칠원리라는 기록이 유일한 관직이었다거나 이후 절대 벼슬하지 않았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원추와 썩은 쥐, 호수(濠水)의 다리에서 나눈 대화는 「추수」, 동이는 「지락」, 나비는 「제물론」, 혼돈은 「응제왕」, 나무는 「소요유」에서 온다. 고전 문장은 원문에서 옮기거나 풀어 썼다. 백마 논변을 혜시 개인의 명제로 돌리지 않는다. 안지의 말놀이와 물화에는 여러 해석이 있다.
깎기·구성·남은 것, 부정의 부정, 네 사람의 다리는 저자의 해석과 문학적 상상이다. A와 B는 형식논리의 모순 명제가 아니다. 초기 열 층과 현행 DD 주소는 같지 않다. non dubito는 판단과 행동에 대한 비판을 막지 않는다.
칸트의 목적 자체는 Self-as-an-End라는 이름의 사상적 접점이지 동일한 학설은 아니다. 세 사람과의 비교는 선택적이며 양명의 군사적 승리를 철학의 증명으로 삼지 않는다. 이야기 속 애도의 끝은 남에게 부과할 규범이 아니며 무용한 나무도 배제된 이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기』 권63: 장자 전기 · 『장자』 「추수」: 원추, 썩은 쥐, 호수(濠水)의 다리에서 나눈 대화 · 『장자』 「지락」: 동이와 생사의 변화 · 『장자』 「제물론」: 나비와 물화 · 『장자』 「응제왕」: 일곱 구멍과 혼돈 · 『장자』 「소요유」: 큰 나무와 무하유지향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