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 108 ·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버지니아 울프, 의식은 시간의 모양을 가진다
솜이 찢어지는 순간에서 스스로 닫을 수 있는 문까지. 의식에는 시간의 두께가 있고, 그것을 쓰는 일에도 삶의 받침이 필요하다.
1. 솜
울프에게는 ‘cotton wool’이라는 표현이 있다. 솜이다.
『과거의 스케치』에서 그녀는 삶의 상당 부분이 이런 것으로 싸여 있다고 쓴다. 일어나고, 먹고, 일을 하고, 돌아온다. 하루가 지났는데 무엇이 남았는지 말하기 어렵다. 그 시간이 가치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안을 지나면서도, 자신이 지나고 있다는 느낌은 또렷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가끔 솜이 찢어진다.
어떤 소리, 꽃 한 송이, 말 한마디가 발을 멈추게 한다. 정보가 하나 늘어난 것과는 다르다. 눈앞의 것이 다른 밀도를 얻는다. 이런 충격은 기쁨이 되기도 고통이 되기도 한다. 선명함이 늘 행복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를 ‘moments of being’, 존재의 순간이라고 부른다.
세인트아이브스의 침대에서 반쯤 잠든 채 파도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다른 기억에서는 문 앞 화단을 보다가 꽃과 그것을 키우는 땅을 하나의 전체로 느낀다. 파도와 꽃이 한 번의 깨달음 속에 함께 등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둘 다 남았다. 오래 뒤에도 그 감각은 종이를 건너 읽는 사람에게 닿는다.
순간이 지나면 솜은 다시 닫힌다. 그래도 평범한 날들은 급히 적어 둔 사건 목록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밑에는 무늬가 있다. 글쓰기가 그것을 드러낼 수도 있다.
소설로 솜을 찢는 일. 울프에게 들어가는 한 길이다. 그녀의 작업 전부는 아니지만,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다.
2. 의식의 흐름
그녀는 소설이 삶을 보여 주는 방식을 바꾸었다.
『댈러웨이 부인』의 주요 사건은 런던의 하루 안에 담긴다. 클래리사는 꽃을 사고 저녁 파티를 준비한다. 하지만 소설은 그녀의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피터, 셉티머스, 루크레치아, 거리의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감각이 있다. 전쟁의 상처, 지난 사랑, 지금의 교통이 같은 도시에서 교차한다.
이야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다음에 무엇이 일어났나’뿐 아니라 ‘저 소리가 무엇을 떠올리게 했나’에서도 이야기는 일어난다.
울프가 기억과 내면, 비선형적 시간을 소설에 처음 가져온 사람은 아니다. 그녀가 특히 생생하게 하는 일은 바깥의 하루와 안쪽의 긴 세월이 서로를 통과하게 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설명하는 주석으로 줄이지 않는다.
시계는 아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런던의 아침에는 벌써 보턴의 여름과 피터의 말, 샐리의 입맞춤이 들어와 있다. 모든 과거를 문자 그대로 한꺼번에 떠올린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에는 과거를 완전히 밖에 가둘 밀폐된 문이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읽으면 무언가를 안다는 일에 시간의 두께가 생긴다. 방금 판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끌림과 두려움, 다 말하지 못한 후회가 있다. 앎은 지금 답 하나를 받는 일만이 아니다.
그녀를 콩트와 포퍼 옆에 놓기 위해 두 철학자가 시간을 잊었다고 할 필요는 없다. 소설이 의식의 과학 법칙을 증명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느끼게 한다. 관찰이나 추측이라고 부르는 한순간이 구체적인 사람에게 속하면, 그 안에는 이미 긴 길이 들어 있다는 것을.
3. 울프와 피히테
피히테를 읽을 때 자기를 정립하는 자아는 주체의 활동으로 질문을 이끌었다. 울프를 읽으면 그 질문에 물소리가 더해진다. 이 나는 고정된 점보다는 강에 가깝다.
물론 피히테의 자기 정립은 시계의 일 초 동안 일어나는 심리 사건이 아니다. 설명이 추상적이라고 그의 자아에 역사나 시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소설이 학설을 반박했다는 선언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거리를 바꾸는 것이다.
멀리서는 하나의 나다. 가까이 가면 오늘의 클래리사, 보턴의 여름, 피터가 만지작거리는 주머니칼, 선택하지 않은 삶, 런던의 종소리가 있다. 이것들은 줄을 서서 차례로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방향에서 같은 현재를 바꾼다.
울프는 사람을 기억 목록으로 만들지 않는다. 망각과 오해, 빈 곳도 삶에 참여한다. 경험에서 깨끗하게 뽑아낼 수 있는 나를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시간을 걷어 내면 추상적 윤곽은 남을지 몰라도, 바로 이 사람은 달라진다.
이 시리즈의 읽기에서 피히테는 주체의 활동을 앞으로, 매클린톡은 몸과 오랜 친숙함을 앎 속으로, 울프는 시간의 주름을 눈앞으로 가져온다. 한 사람씩 전용 구역을 맡는 것은 아니다. 함께 읽는 것은 나를 그렇게 얇은 것으로 두지 않기 위해서다.
4. 우리가 내릴 수 없는 판결
1941년 3월 28일, 정신질환으로 다시 심하게 고통받던 울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
남편 레너드에게 남긴 편지에서는 그때의 두려움이 들린다.
그녀는 이전의 고통이 되풀이될 것을 두려워하며, 목소리가 들리고 집중하기 어렵다고 쓴다. 레너드가 준 행복과 보살핌도 쓴다. 무거운 문장이다. 그러나 작별 편지 한 통이 병력 전체는 아니고, 미래가 결코 달라질 수 없었다는 증거도 아니다.
쉰아홉 살이었다. 죽음은 상실이지, 작품이 기다려 온 아름다운 마지막 문장이 아니다.
여기서 굴원을 떠올리기는 쉽다. 두 이름은 강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굴원의 생애는 아주 먼 전기 전통을 통해서도 전해진다. 두 처지를 같은 그림처럼 겹칠 수 없다.
더구나 한 죽음은 저항이고 다른 죽음은 패배라고 나눌 수는 없다. 깔끔하게 들리지만 우리가 마련한 설명 속에 두 사람을 가둔다.
『이소』의 가치에는 굴원의 죽음이라는 도장이 필요 없다. 시의 존엄과 저항은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독자가 시인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는 행동이 아니다.
울프 역시 자신이 쓴 솜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다. 일상 경험의 비유를 그대로 질병의 설명으로 삼을 수는 없다. 되풀이되는 고통 사이에서 그녀는 살고, 일하고, 사랑했다. 작품은 죽음으로 향하는 일방통행로가 아니었다.
집중하기 어렵다는 말에는 그래도 멈추어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의력이 손상되었다고 존재할 자격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쓰지도 읽지도 못하고, 겪는 일을 설명하지 못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있다. 돌봄과 응답이 필요하다. 베유의 주의는 여기서 고통받는 사람을 향해야지, 아직 주체라고 할 수 있는지 가리는 시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이해가 달라진다면 ‘이제 왜 죽었는지 알겠다’여서는 안 된다. 어떤 고통은 하나의 비유에 들어가지 않는다. 마지막 날에서 거꾸로 삶 전체를 계산하며 읽을 수 없다. 살아서 느끼고 쓰던 날들로도 돌아가야 한다.
5. 울프와 프루스트
의식과 시간을 말하면서 프루스트를 비켜 가기는 어렵다. 이 묶음에 별도 글은 없지만, 여기서는 두 작가를 만나게 하고 싶다.
차에 적신 유명한 마들렌이 콩브레를 불러낸다. 의지의 단추를 눌러 과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화자는 먼저 흔들리고, 그다음 이해하려 한다. 어두워졌던 세계가 조금씩 모양을 얻는다.
울프를 읽을 때는 감각이 조금 다른 경우가 많다. 런던을 걷는 클래리사에게 보턴은 삽입된 배경 설명만이 아니다. 옛사람과 말, 사랑과 선택이 지금 내딛는 발의 무게를 바꾼다. 기억은 현재를 잠시 멈추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를 구성한다.
대조를 빌리자면 프루스트는 잃었던 것의 귀환을, 울프는 과거가 이미 여기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둘을 딱 잘라 나누지는 못한다. 프루스트도 시간을 겹치고 울프도 망각과 회복을 쓴다. 둘 다 시계의 한 칸이 삶의 한 칸을 재기에 부족하게 만든다.
6. 울프와 앞선 사람들
앞 글의 용수는 바닥도 받침에 의존한다며 발밑을 보게 했다. 울프는 이른바 지금을 보게 한다. 지금 역시 밀폐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작은 바닥은 아니다.
용수가 시간을 없애고 울프가 되살린다는 뜻은 아니다. 용수는 시간이 관계에 어떻게 의존하는지 묻는다. 그의 공을 시간은 없지만 의식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만들 수는 없다.
울프의 작업은 소설에서 일어난다. 의식이 거리에서 옛여름으로 옮겨 갔다가 종소리에 돌아온다. 과거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현재는 기억을 비운 뒤에야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아니다.
앞의 아홉 글에 나온 동작도 두꺼워진다. 콩트의 관찰, 포퍼의 추측, 디랙이 방정식에 귀를 기울이는 일, 매클린톡이 옥수수를 오래 보는 일, 베유의 기다림. 그들을 일 초 안에만 사는 사람으로 줄이지 않아도 울프가 더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행동 안에 쌓인 삶을 보게 하는 것이다.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력 없는 현재는 드물다. 당신은 주름 위에 서 있고, 그 아래로 이미 걸어온 길이 이어진다.
그래서 용수와 같은 문 앞에 둘 수 있지만, 동일한 의식 공간을 발견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은 사물이 자성으로 성립하는지 묻고, 다른 사람은 경험의 출렁임을 언어에 담는다. 서로 울릴 수 있어도 답이 같을 필요는 없다.
이 시리즈의 상상에서 용수는 문틀을 세계의 마지막 경계로 삼지 말라고 한다. 울프는 문 가까이 데려가 어떤 소리와 오래전 시간을 통과시킨다. 서로를 비추는 지점은 독자가 직접 들을 수 있다.
7. 자기만의 방
1929년에 나온 『자기만의 방』은 앞서 여성과 소설에 관해 했던 강연에서 발전했다.
요구는 구체적이다.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여성의 처지에 관한 질문이다. 더 높은 추상적 명제로 올려놓아야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질문을 따라가면 생각에도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보인다.
자기만의 방. 주의력의 물질적 조건.
시끄러운 거실이나 아이를 돌보는 틈에도 중요한 생각은 떠오른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많다. 하지만 해낼 수 있다는 것과 늘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다르다. 끊임없는 방해, 돈 걱정, 부르면 언제나 응답해야 하는 의무가 미완의 문장 하나를 어떻게 닳게 할까.
울프가 보이게 하는 것은 영감만이 아니다. 닫을 때를 자신이 정하는 문, 부를 때마다 내주지 않아도 되는 시간, 후원자의 마음부터 맞추지 않고 쓰게 하는 수입이다. 책의 연 오백 파운드는 그 시대의 구체적 금액이지 오늘날 모두에게 적용할 문턱이 아니다.
매클린톡의 실험실과 옥수수밭, 베유의 공책과 혼자 있는 시간도 이 질문에 들어온다. 하지만 공책 한 권이 안정적인 지원과 같지는 않다. 방도 보수도 집안일을 나눌 사람도 없는 여성은 얼마나 많은가. 떠오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글이 될 때까지 자라지 못한 생각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생각이 없다는 뜻도, 문을 닫으면 천재가 저절로 나온다는 뜻도 아니다. 큰 대가를 치러 남긴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도 지원이 필요 없다는 증거로 쓰지 말자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 고요와 자기 삶을 움직일 여지는 더 많은 목소리에게 출구를 주어야 한다.
8. 다리 위
이 상상의 다리에서 울프가 정확히 언제 도착했는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은 아니다. 이번에는 도착을 하나의 과정으로 그린다. 세인트아이브스의 정원, 블룸즈버리의 거실, 런던 거리, 호가스 출판사에서의 일. 그녀가 걸어온 장소도 함께 도착한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주머니는 무겁다.
시간이 들어 있다. 파도 소리, 어머니의 얼굴, 그림 그리는 버네사, 비타 색빌웨스트의 편지. 완벽한 기억 보관소가 아니라, 걸을 때마다 서로 닿는 드문드문한 무게다.
조금 떨어진 곳에 베유가 보인다. 누가 더 말랐는지, 더 고통받았는지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은 타인의 목소리에 자리를 내주려 했고, 다른 사람은 다 말해지지 않은 삶들을 문장 안에 담았다. 우선 서로를 볼 수 있다.
굴원도 물가에 있다. 강에게 둘의 자기소개를 맡길 수는 없다. 그도 그녀도 죽음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시와 소설, 살아온 세계가 있다. 이 다리는 둘에게 같은 결론을 서둘러 써 주지 않는다.
그녀는 자리를 찾아 난간에 기대고 물을 본다.
물이 움직인다. 빛 한 겹이 지나가고 다음 겹이 따른다.
그녀의 문장이 떠오른다. 의식이 결코 끊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다. 과거의 무엇이 지금 수면의 색을 여전히 바꾸고 있어서다.
멀리서 빅벤이 울린다. 몇 시일까.
종은 분명 시간을 알리고 낯선 사람들을 한 도시의 리듬에 놓는다. 하지만 지금은 숫자만 전하지 않는다. 방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무언가를 통과한다. 들린다. 갑자기 마음에 닿는다.
존재의 한순간.
그러고는 솜이 다시 닫힌다.
하지만 이제 안다. 솜 아래에는 무언가가 있다.
읽기 안내와 출처
솜과 존재의 순간은 『과거의 스케치』에서 나오며 이후 Moments of Being에 수록되었다. 침대에서 듣는 파도와 화단의 기억은 별개다. 『댈러웨이 부인』(1925)은 여러 인물의 내면을 오간다. 보턴, 주머니칼, 샐리의 입맞춤, 종은 원작을 대조했다.
울프는 1941년 3월 28일 59세로 사망했다. 편지는 요약하며 불확실한 집필일을 사망일과 같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영국도서관 Add MS 57947에는 그달의 여러 편지가 있고, 유타대 전사는 날짜의 유보와 레너드의 발견 기록을 남긴다. 편지는 병력 전체가 아니다. 질병과 손상된 주의력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지 않으며 굴원의 죽음도 본받을 저항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프루스트는 『스완네 집 쪽으로』의 마들렌 장면을 참고한다. 비교는 두 작가의 절대적 분업이 아니다. 『자기만의 방』(1929)은 1928년 강연에서 발전했으며 수입 액수는 오늘의 보편적 문턱이 아니다. 피히테, 용수, 베유와의 비교 및 다리 장면은 해석과 상상이지 실제 대화나 학설의 동일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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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