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 108 ·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용수, 바닥마저 비어 있다
용궁에서 의자 한 개로 돌아온다. 공은 삶을 빼앗지 않는다. 우리를 받치는 것이 영원히 아무 받침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1. 여덟 번의 부정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영원하지도 끊어지지도 않는다. 같지도 다르지도 않는다. 오지도 나가지도 않는다.
여덟 개의 ‘아니다’. 네 쌍의 부정. 『중론』 첫머리에서 부처에게 경의를 표하는 게송이다.
용수, 곧 나가르주나는 보통 기원후 2~3세기 무렵의 인물로 본다. 전승은 그의 출신을 남인도와 연결하지만 정확한 생애는 확실하지 않다. 『중론』은 약 오백 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여덟 부정은 씨앗 같다. 인과와 운동, 시간과 존재를 묻는 가지들이 여기서 뻗어 나간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꽃이 시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어제와 오늘의 연결을 지우자는 뜻도 아니다. 같은 의자를 알아보거나 누군가 문으로 들어왔다고 말해도 된다. 질문은 다른 데 있다. 조건을 전부 걷어 낸 뒤에도, 스스로 성립하는 탄생과 소멸, 같음과 다름이 홀로 남을 수 있을까.
생성과 소멸, 지속과 단절, 같음과 다름, 오고 감. 익숙한 구분들을 하나씩 다시 손에 든다.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고 서둘러 판정하려는 게 아니다. 생각을 돕던 도구가 언제부터 아무 조건도 필요 없는 최후의 토대가 되었는가.
앞의 여덟 글은 앎의 내용과 방법을 따라왔다. 콩트에게 무엇이 지식인가. 포퍼는 그것을 어떻게 시험하는가. 디랙의 방정식은 관찰보다 먼저 갈 수 있는가. 굴원의 아름다움도 앎인가. 피히테에게 아는 사람은 어디에 서 있는가. 매클린톡의 느낌과 베유의 주의는 무엇을 알아내는가. 그리고 대처는 언제 생각을 멈추는가.
용수는 질문을 한 층 아래로 옮긴다. 무엇을 아는지, 어떻게 아는지, 누가 아는지 묻되, 그 질문에 쓰이는 개념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이제 말하지 말라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도구도 자신을 마지막으로 움직이지 않는 바닥이라고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바닥마저 비어 있다. 바닥 위에 서서 틈을 논한다고 생각했는데, 용수가 아래를 보게 한다. 발밑의 이 널빤지도 여러 조건이 받치고 있다. 혼자서 자신을 지탱하는 것은 아니다.
2. 용궁
용수의 생애는 확실한 역사보다 전설을 통해 더 많이 전해진다.
5세기 초 구마라집은 『중론』을 중국어로 옮겼다. 그가 번역했다고 전하는 『용수보살전』에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나온다. 총명한 브라만 청년이 세 친구와 몸을 숨기는 술법을 배운 뒤 왕궁으로 들어가 궁중 여인들을 해친다. 일이 드러나 친구들은 죽고 그는 살아 나와 출가한다. 경계의 뜻을 담은 전설이지, 확인된 이력서가 아니다. 거기 나오는 성적 가해도 영리한 소년의 장난으로 넘길 일은 아니다.
전설은 이어진다. 그는 많이 읽었지만 불교의 가르침에도 아직 부족한 것이 있다고 여겼고, 새로운 가르침을 세우려 하기까지 했다. 그때 큰 용이 그를 바닷속 궁전으로 데려가 경전의 보고를 열어 준다. 그곳에서 읽은 것은 지금껏 알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돌아온 그는 대승불교를 알리고 논서를 쓴다.
용궁을 지도에서 찾지 않아도 이야기의 전환은 읽을 수 있다. 배울 만큼 다 배웠다고 생각한 사람이 상상하지도 못한 넓이와 만난다. 용궁은 영리함에 주는 상만이 아니다. 그 영리함에 만족하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는 곳이기도 하다.
앞서 읽은 디랙이 떠오른다. 방정식은 당시의 관찰이 닿지 못한 곳으로 그를 이끌어 반물질을 가리켰다. 물리 세계 바깥이 아니라, 아직 보지 못했던 그 세계의 일부였다. 용궁은 전설이고 방정식은 계속 검증할 수 있는 이론이다. 둘을 같은 종류의 증거로 쓸 수는 없다. 다만 글을 읽는 이미지로서, 둘 다 ‘내가 이미 아는 것’이 ‘전부’가 되지 못하게 한다.
『중론』으로 돌아오자. 용수는 용궁에 다녀왔으니 자기 말을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쓰는 틀을 하나씩 되묻는다. 인과는? 물어야 한다. 운동은? 역시 물어야 한다. 변화와 존재도 마찬가지다. 일상 경험을 삭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독립적인 본성만으로 성립한다는 생각을 풀어내려는 것이다.
대신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바닥을 내주지도 않는다. 해체해 간 끝에서 말한다. 공. 그런데 그 공마저 새 바닥으로 삼을 수는 없다.
3. 질문의 네 모서리
용수의 특징적인 논변 가운데 하나는 질문의 네 모서리를 살펴보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 catuṣkoṭi, 흔히 사구라고 부른다. 어떤 자성의 주장을 비판할 때는 네 입장이 모두 물러나게 된다.
어떤 것이 자기 본성만으로 성립할 수 있는지를 쉬운 그림으로 그려 보자. 발을 디딜 곳은 네 군데다.
자성으로 존재한다.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으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으로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먼저 ‘있다’를 붙든다. 반문을 만나면 ‘없다’로 물러난다. 그다음은 ‘둘 다’, 마지막에는 ‘둘 다 아니다’로 간다. 하지만 같은 자성의 전제를 안전하게 숨길 곳만 찾는다면, 답을 바꾼다고 원래의 문제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넷이라는 수를 들으면 불교의 사무색처가 떠오를 수 있다.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이것들은 선정의 경험과 그에 대응하는 존재 영역을 말한다. 네 가지 논리적 참값이 아니다. 공무변처도 ‘모든 법은 공하다’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수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사구의 기원을 설명할 수는 없다.
문학적으로는 울림이 있을 수 있다. 마침내 도착한 듯하지만 그곳을 마지막 거처로 삼을 수 없다는 울림이다. 그러나 선정의 단계가 논증의 네 단계는 아니다. 비상비비상처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해탈인 것도 아니다. 용수는 네 하늘의 철학 지도를 그리는 대신, 무슨 권리로 어느 한 답을 영구히 고정하느냐고 묻는다.
중국어에는 ‘想入非非’, xiǎng rù fēifēi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에는 터무니없는 공상에 빠진다는 뜻으로 흔히 쓰이지만, 사전은 그 불교적 배경을 비상비비상처와 연결한다. 일상의 가벼운 놀림에 오래된 수행 언어의 울림이 남아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변화이지만, 사무색처와 사구가 한 체계라는 증거는 아니다.
‘서양에는 배중률이 있었고 용수가 그것을 뒤집었다’는 한마디로 정리할 수도 없다. 아무 문장에나 네 번 아니라고 하는 것도, 참과 거짓이 쓸모없다고 선언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자주 묻는 것은 이쪽이다. 고르라고 내민 네 답이 모두 똑같이 버티기 어려운 전제를 짊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니 말장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있다’ 위에 서서 세계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조건에서 독립한 존재라면 발밑이 흔들린다. ‘없다’로 물러난다고 저절로 안전해지지 않는다. ‘둘 다’와 ‘둘 다 아니다’ 역시 같은 검사를 받아야 한다.
아무 조건도 필요 없는 디딤돌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용수가 우리를 떨어뜨리려는 것은 아니다. 절대 움직이지 않는 바닥부터 찾아야 살 수 있다는 오해를 느슨하게 하려는 것이다. 널빤지는 있다. 받침도 있다. 서로 힘을 빌려 주고 있다. 없는 것은 모든 것에서 떨어져 있으면서 혼자 버티는 바닥이다.
오해를 걷어 낸다. 당신은 여전히 여기 있다. 설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다. 자신을 받쳐 주는 것을, 정작 그것은 영원히 아무 받침도 필요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아도 된다.
4. 용수와 부처
008편에서는 석가모니를 읽었다. 부처는 연기를 보도록 가르친다. 일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조건에 따라 멎는다. 용수는 이 길을 따라 자성을 묻는 질문을 깊이 밀고 간다.
불교 전통은 정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고통과 해탈에 관한 여러 설명이 있다. 이런 분류가 전부 후대에 처음 등장한 것도, 모든 부파가 모든 개념에 자성을 부여한 것도 아니다. 위험은 더 구체적이다. 경험을 분석하던 칸이 스스로 성립하는 최후의 단위로 굳을 수 있다.
이 시리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을 때 만난 위험과 닮았다. 분류가 너무 잘되면 분류 역시 하나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이것은 이 글의 비교이지, 아리스토텔레스와 불교 논사들이 같은 학설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용수는 질문을 그 칸들에 돌려준다. 연기로 세계를 설명한다면, 설명 도구에 이르러 멈추어서는 안 된다. 칸에도 조건이 있다. 칸에도 자성은 없다. 칸도 공하다.
공 또한 공하다.
여기서 손을 놓기가 가장 어렵다. 공이 새 바닥이 되고, 그 위에서 ‘이번에야말로 진짜를 찾았다’고 말한다면 집착의 대상만 바꾼 셈이다. 공은 우주 뒤편의 재료가 아니다. 개념을 다 해체한 뒤 남는 신비한 무엇도 아니다. 자성이 없다는 사실마저 또 하나의 자성으로 만들 수 없다.
조건에 따라 생겨나는 것은 자성을 결여한다. 그것은 의존하여 성립하는 이름이며 중도다.
제24장 18게송의 뜻을 쉽게 풀면 이렇다. 한역의 게송은 ‘我說即是無’라고 쓰고, 널리 알려진 인용에서는 ‘공’이라고 한다. 뒤의 주석도 ‘공’을 써서 관계를 밝힌다. 이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조건으로 성립하므로 자성이 없다는 뜻이다. 공이 설명하던 것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절대자가 될 수도 없다. 중도는 있음과 없음의 중간에서 타협하는 길이 아니라, 두 극단에 붙잡히지 않는 길이다.
5. 발밑으로 한 층 더
이번 흐름으로 돌아가 보자.
콩트는 틈을 메우고 없다고 했지만 바닥은 인정했다. 포퍼는 틈과 과학 사이에 선을 그었다. 디랙은 바닥 가장자리에서 소리를 들었다. 굴원은 물속에서 시를 썼다. 피히테는 아는 사람이 설 자리를 물었다. 매클린톡은 몸으로 느끼고 베유는 주의를 기울여 기다렸다. 대처는 다시 생각하는 문을 닫았다.
이 문학적 풍경 속에서는 누구에게나 잠시 발을 딛는 자리가 있는 듯하다. 분류, 검증, 방정식, 시, 몸, 주의, 결단. 그들의 철학이 같은 실체적 토대를 믿었다는 뜻은 아니다. 용수에 이르면 질문이 다시 발을 받치는 쪽으로 내려간다는 뜻이다.
그 토대라고 해서 자동으로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독립해서 스스로 존재하는 바닥은 없다. 자성으로 보장되는 틀도 없다. 그렇다고 지식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는 사람, 알려지는 것, 알아가는 과정이 모두 조건에 의존한다. 닫혀 있는 두 자족적 실체 사이로 물건을 옮기는 방식이 아니어도 앎은 일어난다.
이 흐름을 이야기로 그리자면 가장 깊이 아래로 향하는 순간이다. 앞의 여덟 사람과 틈의 존재, 위치, 그 안의 무엇을 이야기했다. 용수는 고개를 숙이게 한다. 여덟 편을 이야기했으니 서 있는 곳도 보자. 밟고 있는 그것 역시 공하다.
6. 허무주의가 아니다
여기쯤 오면 반문이 거의 저절로 나온다. 전부 비어 있다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 아닌가. 허무주의 아닌가.
용수라면 새로운 집착을 보게 할 것이다. 이제는 ‘비어 있으면 중요하지 않다’에 매달리고 있다. 그 매달림도 풀어야 한다.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자성이 없다는 뜻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하는 방식. 용수에게 그런 방식으로 있는 것은 없다. 사물은 조건에 의존하고 조건이 바뀌면 바뀐다.
그런데 의존하는 것이 곧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앉은 의자에는 나무, 못, 목수, 설계가 필요했다. 그래도 당신은 분명 그 위에 앉아 있다. 의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독립적이지 않고 영원하지 않으며 혼자 자신을 받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은 의자를 빼앗지 않는다. 의자에 대한 오해를 걷어 낸다. 홀로 성립하는 영원한 실체인 줄 알았는데 조건들이 잠시 모인 것이었다. 조건이 바뀌면 의자도 바뀌고, 조건이 풀리면 의자도 무너진다. 받침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의자도 유지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와는 거리가 멀다. 상상한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뜻도 아니다. 실제로 작용하는 것들은 먼저 자성을 가져야만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의자는 없다. 그래도 앉을 수 있다.
그 차이는 크다.
7. 용수와 베유
용수와 베유. 보통 2~3세기에 놓이는 인도의 불교 사상가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에 깊이 이끌렸던 20세기 프랑스 사상가.
같은 종착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떤 몸짓은 서로를 비출 수 있다.
베유의 주의는 설명부터 하려는 나를 조금 물러나게 한다. 그제야 다른 사람이 드러날 자리가 생긴다. 곁에 용수를 놓고 읽으면 질문이 하나 더 따라온다. 물러나는 나와 내가 바라보는 상대를 여전히 각각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두 존재로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베유는 중력과, 자아가 만들어 낼 수 없는 은총을 말한다. 그녀의 신은 용수의 공이 아니다. 다만 안과 밖은 둘을 함께 읽는 자리에서 다시 질문이 될 수 있다. 은총은 밖에서 온다고 말하자마자, 그 바깥을 또 하나의 방으로 그려 버리지는 않는가.
이 비교에서는 무아조차 새 훈장이 될 수 없다. 나는 이제 나를 없앴으니 너보다 높다는 식으로 말이다. 용수의 질문은 그 만족의 자리에도 닿을 것이다. 그 자리 역시 혼자 성립하지 않는다.
두 길이다. 한 길에는 플라톤과 기독교의 울림이 있고, 다른 길은 연기와 반야의 전통에서 온다. 교차해서 읽을 수는 있다. 하나의 길로 합칠 필요는 없다.
베유는 나의 물러남을 보여 준다. 용수를 읽으면 불편한 질문이 더해진다. 물러남마저 내 소유로 삼지는 않을까. 동양이 서양보다 높다는 순위표가 아니다. 막 힘을 푼 손도 다른 것을 다시 움켜쥘 수 있다는 이야기다.
8. 다리 위
이 상상의 다리에서 용수가 어떻게 올라왔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냥 거기 있다. 언제나 있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다리에 들어와 자리를 찾고 선다. 그는 앉아 있다. 다리를 포개고, 다리 널빤지 위에. 왼쪽도 오른쪽도 가장자리도 아니다. 그냥 가운데 앉아 있다.
콩트의 달력이 그의 페이지로 넘어간다. 칸에는 ‘철학 / 종교’라고 적혀 있다. 용수가 보고 미소 짓는다. 분류. 또 분류다. 칸도 공하고 달력도 공하다. 분류도, 철학도, 종교도 공하다. 공마저 공하다.
포퍼가 다가온다. “당신의 공은 반증할 수 있습니까?”
용수는 곧바로 답하지 않는다. 이 상상의 만남에서는 먼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시험하려는 겁니까. 자성이 없다고 말해도 어떤 문장이 저절로 비판을 면제받지는 않는다.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는 구분도, 어떤 조건에서 쓰이는지 보아야 한다.
피히테가 틈 위에 선다. “내가 틈입니다.” 용수가 바라본다. 틈도 공하다. 나도 공하다. 틈 위의 나도, 틈도, 그 위에 선다는 일도 자성이 없다. 전부에 대해 그렇게 말한 다음에는 무엇이 남을까.
거기 앉아 있는 용수가 남는다.
오직 자기 자신만으로 성립하는 실체로서가 아니다. 조건이 잠시 여기 모여 있다. 조건이 풀리면 그는 같은 모습으로 남을 수 없다. 유지되는 동안 그는 여기 있다.
베유가 멀지 않은 곳에서 보고 있다. 자기 설명을 서둘러 앞으로 밀어 넣지 않는다. 용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상이 같은 공이 되어서도, 역사에서 실제로 아는 사이여서도 아니다. 이 다리에서는 자신을 세계의 한가운데 놓으려 하지 않는 두 사람이 서로의 몸짓 하나를 알아보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저 멀리 있다. 008편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여러 세대의 간격 너머로 용수는 연기를 보도록 가르친 사람 쪽에 예를 표한다. 확인된 세 대의 사제 관계가 아니다. 하나의 인사다. 당신이 열어 둔 질문을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널빤지. 틈. 바닥. 모두 공하다. 그래도 다리는 있고 사람은 있다. 바람도 여전히 분다.
용수는 앉아 있다.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다리 아래에는 홀로 버티는 최후의 토대가 없다. 다리 위에도 모든 것에 도장을 찍어 줄 마지막 답은 없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걷는다.
사람들이 걷는다. 그걸로 충분하다.
읽기 안내와 출처
바닥과 틈, 다리 위 만남은 해석의 이미지이자 문학적 상상이다. 역사적 대화나 서로 다른 사상의 동일성을 뜻하지 않는다. 공은 여기서 무자성을 가리키며 일상의 인과, 지식, 행동을 없애지 않는다. SAE나 베유의 신과도 동일시하지 않는다.
원전은 CBETA T1564이다. 귀경게는 T30, p.1b14–17, 13.8은 p.18c16–17, 24.10은 p.33a2–3, 24.18과 주석은 p.33b11–16에 있다. 게송의 무와 주석의 공을 허무주의로 읽지 않는다. 사구는 구체적인 논증에 쓰이며 아무 문장이나 일괄 부정하지 않는다. 『맛지마 니까야』72에는 네 답의 선례가, 26에는 선정과 해탈의 구분이 나온다. 사무색처가 사구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생애와 용궁은 구마라집이 번역했다고 전하는 T2047a의 전설로 읽는다. 정확한 연대와 세부를 확정하지 않는다. 중국어 성어의 배경은 대만 교육부 성어사전을 참고하되 상세한 전파 역사를 주장하지 않는다. 더 읽을 책: Siderits와 Katsura, Nāgārjuna’s Middle Way (2013); Westerhoff, Nāgārjuna’s Madhyamaka (2009).
CBETA — 中論 T1564 (primary Chinese text) · CBETA — 龍樹菩薩傳 T2047a (traditional biography) · Majjhima Nikāya 26 — The Noble Search (Thanissaro translation) · Majjhima Nikāya 72 — To Vacchagotta on Fire (Thanissaro translation) · 教育部成語典 — 想入非非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Nāgārjuna (further reading)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