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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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 / 108 ·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유카와 히데키, 보이지 않는 입자

옛 책은 과학자가 미지로 가는 길에 어떻게 함께할까. 중간자 예측에서 다리 아래 물고기까지. 상상은 질문을 열고, 세계의 대답을 기다린다.

1. 보이지 않는 입자

1934년, 오사카 제국대학. 스물일곱 살 강사가 한 가지 문제를 붙들고 있다.

원자핵 안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다. 양성자는 양전하를 띠고, 같은 전하끼리는 서로 밀어낸다. 그렇다면 그 작은 곳에서 여러 양성자가 어떻게 함께 묶여 있을까?

다른 작용이 있어야 한다. 원자핵 정도의 거리에서는 전기적 반발을 이겨 내지만, 조금만 멀어지면 빠르게 약해지는 작용. 강하면서도 짧게 미치는 힘에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유카와 히데키는 생각한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입자를 핵자들이 주고받는 것으로 이 작용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이 이야기를 할 때는 두 사람이 공을 던지고 받는 그림을 자주 쓴다. 교환은 그려 볼 수 있지만, 인력까지 설명되지는 않는다. 보통 공을 던진다고 두 사람이 끌려오지는 않는다. 진짜 설명은 양자론 안에서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공’은 무엇일까?

유카와는 힘이 미치는 거리와 입자의 질량을 연결해 전자보다는 무겁고 양성자보다는 가벼운 입자를 추정했다. 빈칸에 아무 이름이나 넣은 것이 아니다. 새로 제안한 존재는 이미 알려진 핵력의 규모에 맞아야 했다.

그 입자를 본 실험은 아직 없었다. 그렇다고 당시 알려진 입자가 양성자, 중성자, 전자 셋뿐이었던 것도 아니다. 광자와 양전자도 이미 물리학에 들어와 있었다. 유카와가 더한 것은 신비한 ‘네 번째’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을 맡을 새 구성원이었다.

1935년, 그는 「소립자의 상호작용에 관하여」를 발표한다. 나중에 자리 잡은 중간자라는 이름에는 중간에 있다는 뜻이 남았다. 오늘날 핵력을 설명하는 이론은 훨씬 복잡하지만, 그가 연 길은 실제로 성과를 낳았다.

논문이 곧바로 널리 주목받은 것은 아니다. 제안과 인정 사이에는 토론과 실험, 기다림이 있었다. 서구 전체가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는 장면을 만들어야만 젊은 연구자의 외로움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30년대 후반, 우주선에서 찾은 입자가 희망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예상한 강한 상호작용의 역할을 하지 않는 뮤온이었다. 1947년 라테스, 오키알리니, 파월 등의 연구로 파이온이 확인된다. 질량이 비슷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떻게 행동하는 입자인지도 물어야 했다.

1949년 유카와는 일본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는다. 전후 재건 중인 사회는 이 물리학상에서 전문적인 영예만 보지 않았다.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았다.

하지만 이 글이 궁금한 것은 상만이 아니다. 발견하기 전에,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어떻게 자리를 마련할까?

2. 장자

어린 유카와는 할아버지와 사서를 읽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먼저 따라 읽었다. 뜻부터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오래된 문장은 소리로 생활에 들어왔고, 이해는 나중에 와도 되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노장에 가까워졌다. 『장자』는 오래 두고 읽는 책이 되었다.

훗날 그의 수필들은 영어 선집 Creativity and Intuition: A Physicist Looks at East and West에도 실렸다. 방정식을 쓰는 사람이 방정식으로 옮기기 어려운 일을 묻고 있었다. 상상력은 어떻게 자라는가?

장자는 무엇을 주었을까?

나비의 꿈은 깨어 있는 나를 조금 흔든다. 물고기의 즐거움은 ‘어떻게 아는가’를 흥미로운 물음으로 바꾼다. 쓸모없는 나무는 익숙한 쓸모의 잣대를 멈춰 세운다. 모든 구별을 지우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줄곧 어떤 관점 안에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유카와는 물고기의 즐거움에 관해 글을 썼고 ‘지어락’이라는 글씨도 남겼다. 자연을 가까이 느끼고 공감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물고기의 즐거움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즐겁다고 입증한 것은 다르다. 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이미 답을 아는 것도 다르다.

새 입자를 제안할 사람에게 이런 독서는 토양이 될 수 있다. 토양은 열매의 설명서가 아니다. 입자의 질량을 유도해 주지도 않는다. 다만 답이 아직 없을 때, 질문을 서둘러 닫지 않도록 도울 수는 있다.

3. 열 수 있는 틈

콩트에서 시작한 이 묶음의 글들은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는지 되물어 왔다. 지식에 검증을 요구하는 데는 힘이 있다. 아직 기존의 잣대에 들어오지 않는 질문을 모두 밖으로 밀어내는 데는 다른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데카르트, 칸트, 콩트, 빈 학단을 한 줄로 세워 모두 같은 말을 하게 할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동양은 한 번도 경계를 긋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어느 전통에나 논쟁이 있고 대담한 상상도, 굳은 선 긋기도 있다. 한 사람을 키운 독서의 내력은 지도를 동서로 반 나눈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중용』의 성, 불교의 공, 장자의 변화 역시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색즉시공’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차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입자가 반드시 있다는 보증서도 아니다.

오래된 책을 읽는 다른 길은 남는다. 생각의 습관을 풀어 주고, 달리 물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책이 주는 것이 꼭 답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도 된다는 허락이다.

유카와의 물리학도 앞선 연구를 건너뛰지 않았다. 핵력과 양자장, 하이젠베르크와 페르미의 작업이 그의 문제 속에 있었다. 유럽 물리학자들도 관측되지 않은 대상을 제안했다. 이 시리즈에서 앞서 읽은 디랙이 뚜렷한 예다.

유카와의 용기는 증거가 필요 없다는 데 있지 않았다. 증거가 충분하지 않을 때, 나중의 증거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내놓았다는 데 있었다. 뮤온과 파이온의 차이는 알려 준다. 현실은 아름다운 추측에 맞춰 줄 의무가 없다.

그 틈은 특정 문명만의 소유가 아니다. 누군가는 틈을 열고, 세계가 자신을 고치도록 허용한다. 여기서 상상과 검증은 적일 필요가 없다.

4. 유카와와 디랙

디랙은 반물질을, 유카와는 중간자를 예측했다. 두 사람 모두 실험으로 확인되기 전에 이론이 새로운 입자를 가리키게 했다. 이 닮은 점은 남겨 둘 만하다.

다만 힘을 준 곳이 같지는 않았다.

디랙을 읽으면 방정식 내부의 어려움이 눈에 들어온다. 음의 에너지 해가 자동으로 양전자를 선언한 것은 아니다. 수학적 결과가 물리적 해석에 이르기까지 망설임과 수정과 상상이 필요했다.

유카와에게는 강한데도 멀리 가지 못하는 힘이라는 문제가 앞에 있었다. 어떤 장, 어떤 질량이 그 거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이미지와 계산이 서로를 밀었다. 공을 주고받는 그림 한 장이 혼자 이론을 낳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디에 있는가?

더 앞선, 추적하기 어려운 곳일지도 모른다. 변화와 관점의 엇갈림을 오래 읽은 사람은 새 문제를 만나도 낡은 서랍만 뒤지지는 않을 수 있다. 독서의 작용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과 발견 순간의 생각을 낱낱이 복원하는 것은 다르다.

『장자』에는 중간자의 공식이 없다. 그 책이 유카와를 길렀다는 말과 나비의 꿈에서 중간자 이론을 도출했다는 말은 멀리 떨어져 있다. 문학적 영감은 과학적 증명으로 분장하지 않아도 존중받을 수 있다.

디랙에게도 상상력이 필요했고, 유카와도 방정식의 제약을 받았다. 한쪽에는 수학만, 다른 쪽에는 동양적 직관만 주면 둘 다 작아진다.

차라리 이웃한 책상 두 개를 떠올려 보자. 한쪽에서는 수학적 형식이 물리학에 묻고, 다른 쪽에서는 물리적 난제가 형식을 찾는다. 둘 다 고개를 들어 세계가 동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5. 니시다 기타로

교토에 오면 이 시리즈에서 읽었던 니시다 기타로도 만난다.

유카와가 공부할 무렵 니시다 철학은 교토의 중요한 사상적 자원이었다. 교토대학의 소개에도 그가 니시다의 강의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만남은 중요하다. 하지만 강의를 들었다고 훗날의 물리학적 발견마다 철학적 출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니시다의 ‘절대무’는 다리로 놓고 싶어진다. 보이지 않던 입자가 발견되니 무에서 유로 가는 일처럼 들린다. 그러나 미관측은 지식의 상태이고 절대무는 철학의 문제다. 입자가 출고를 기다리는 창고가 아니다.

용수의 공도 그 창고는 아니다. 생각으로 가득 찬 채 물질이 되기를 기다리는 원료가 아니다. 여러 ‘무’를 함께 놓고 질문할 수는 있다. 같은 것이라고 해 버리면 차이가 사라진다.

더 흥미로운 것은 한 청년이 자기 절반을 내주지 않고도 철학을 듣고 물리학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질문이 학과별로 나뉘어 배달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도 한 가지 언어 안에서만 자라지는 않는다.

한 강의실에서 들고 나온 질문이 다른 강의실까지 따라온다. 그곳의 일을 대신 풀어 주려는 것이 아니라, 계속 묻게 하려고.

6. 여행자

유카와의 자서전 제목은 『다비비토』다. 여행자라는 뜻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교토와 오사카에서 일하고, 훗날 프린스턴과 컬럼비아대학으로 갔다가 교토로 돌아왔다. 그런 이동 옆에는 책과 책, 학문과 학문 사이의 여행도 있었다.

건널 때마다 동양과 서양이 하나가 되었다고 끝맺을 필요는 없다. 한 사람 안에 옛 문장의 소리, 현대 수학의 훈련, 혼자 품은 의문, 동료의 반박이 함께 있다. 언제나 조화롭지는 않다. 그래도 같은 창조에 참여할 수는 있다.

이 묶음에서 던진 앎의 질문도 조금 넓어진다. 굴원은 이미 다른 목소리를 가져왔고, 용수도 극단적인 부정만은 아니었다. 이제 유카와는 구체적인 작업으로 우리를 데려온다. 서로 다른 내력의 독서가 계산과 실험을 만나는 곳이다.

여행자는 다리를 건넜다고 양쪽 기슭이 같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다만 읽었던 책을 모두 출발점에 영원히 남겨 놓지 않아도 된다.

7. 전후

1945년 8월.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 지명들 앞에서 원자핵을 이해한다는 말은 책상 위의 문장으로만 남을 수 없다. 지식은 어떤 제도에 들어가 누구의 힘이 되고 누구의 삶에 닿을까. 옳은 방정식이 대신 대답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중간자 논문에서 원자폭탄까지 곧은 선을 그을 수도 없다. 핵분열은 강한 힘을 찢는 일이 아니다. 무거운 핵이 전체적으로 더 단단히 결합한 생성물로 갈라지며 에너지를 내놓는다. 중간자 이론이 원자폭탄 제작의 직접적인 기술 원리였던 것은 아니다.

1949년의 수상은 전후 일본에 큰 격려였다. 한 나라의 고통이나 책임이 그 때문에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파괴 뒤에 창조하는 일이 남아 있음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1955년 유카와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서명하고, 이후 퍼그워시의 평화 활동에도 참여했다. 원자핵을 이해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핵무기가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는지 똑바로 보자고 요구했다.

노벨이라는 이름에서도 지식과 기술과 평화 사이의 긴장이 떠오른다. 하지만 두 사람을 똑같은 속죄의 이야기로 만들 필요는 없다. 발견할 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뒤 어떻게 선택하고 누가 결과를 감당할지는 과학자와 시민, 제도가 함께 답해야 한다.

8. 다리 어귀

상상 속 이 다리로 유카와가 조용히 걸어온다.

책을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의 창조에서 동료와 토론과 협력을 지울 필요는 없다. 조용한 사람도 다른 사람의 질문과 답 사이에서 살아간다.

다리 위에 올라 사방을 본다.

콩트, 포퍼, 피히테, 대처, 울프. 굴원과 용수도 있다. 이들을 유럽 편과 아시아 편으로 나누면 충분할 리 없다. 저마다 자기 길을 가지고 왔다.

유카와는 가운데서 멈춘다. 두 문명의 심판이 아니다. 서로 다른 책장 사이를 오가는 데 익숙한 한 사람이다.

디랙이 보인다. 누가 이미지를 먼저 얻었고 누가 방정식을 먼저 얻었는지, 둘은 서둘러 겨루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호로 가득한 종이와 세계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음을 안다. 세계의 대답이 있어야 어디로 길을 잘 찾았는지 알 수 있다.

용수가 보인다. 여기에는 물리학자가 입자를 꺼내 가도록 기다리는, 의식으로 가득 찬 공이 없다. 있다면 한 가지 당부일 것이다. 자기 설명을 더는 조건이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주머니에서 낡은 책을 꺼낸다. 『장자』. 이 닳은 책은 우리가 장면 안에 넣었다. 그가 바로 이 책을 평생 몸에 지녔다고 전기가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나비의 꿈을 펼쳤다가 덮는다. 다리 아래로 물이 흐른다. 물고기도 있을지 모른다.

나비는 중간자가 아니고 꿈은 실험이 아니다. 이야기가 핵물리학의 답을 미리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해, 익숙한 세계에도 다른 질문이 들어갈 자리가 있음을 알게 할 수는 있다.

유카와는 책을 넣는다. 다리는 아직 앞에 이어진다. 옛 책은 여기까지 그와 함께 왔다. 남은 길에서는 그가 계속 묻고, 세계가 대답해야 한다.

읽기 안내와 출처

물리학사는 유카와의 1949년 노벨 강연과 1947년 파이온 보고를 참고한다. 공은 교환의 비유일 뿐 고전역학적 인력 설명이 아니다. 뮤온은 파이온이 아니며 오늘날 중간자로 분류하지 않는다. 파이온은 핵자 사이 잔류 강한 상호작용의 기술에 관여하지만 모든 강한 상호작용의 유일한 매개는 아니다.

어린 시절 낭독은 물고기의 즐거움에 관한 유카와 글의 공개 발췌를, 서예와 니시다 강의는 교토대 자료를 참고한다. 독서는 상상력의 토양일 수 있으나 발견 순간의 심리적 순서를 입증하지 않는다. 기존 케머 인용은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지 못해 삭제했다. 『다비비토』와 Creativity and Intuition은 추가 독서 안내이며 이번에 전권을 읽었다는 뜻이 아니다.

1955년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유카와가 서명했다. 핵력 이론, 핵분열, 무기 제작은 같지 않다. 사상 비교는 이 글의 해석이며 니시다의 무, 용수의 공, 미관측은 구별한다. 다리와 만남, 낡은 책은 문학적 상상이다. 나비의 꿈이 중간자 이론을 미리 발견한 것은 아니다.

Hideki Yukawa — Meson theory in its developments (Nobel lecture, 1949) · Lattes, Occhialini and Powell — Observations on the Tracks of Slow Mesons in Photographic Emulsions (1947) · Hideki Yukawa — The Happy Fish (public opening excerpt, pp. 23–29) · 京都大学 — 湯川秀樹博士の扁額について · Kyoto University — Japan’s philosophy research · Pugwash — The Russell–Einstein Manifesto (1955) · US Department of Energy — Nuclear Physics, DOE-HDBK-1122-99, Module 1.04 · Tabibito — 1982 English edition (bibliographic record)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