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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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 108 · 하나의 세계 만들기

뉴턴, 혼자서 하나의 우주를 세운 사람

역병 속 돌집에서 《프린키피아》까지, 사과에서 달까지. 커다란 구축은 답하지 못한 자리를 남기면서도 오늘의 무게를 떠받친다.

1. 역병

1665년. 뉴턴은 스물두 살이었다. 역병이 케임브리지의 일상을 끊어 놓았다.

런던 대역병의 그림자가 여러 지역으로 번졌다. 그는 링컨셔의 울즈소프로, 자신이 태어난 돌로 지은 농가로 돌아갔다. 중간에 잠시 케임브리지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1667년 봄까지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훗날 사람들은 1665~1666년을 그의 ‘기적의 해들’이라고 불렀다. 하룻밤에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뜻은 아니다. 유난히 많은 연구가 밀도 있게 진행된 시기였다. 그 이름은 아인슈타인의 1905년도 떠올리게 한다.

그 돌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뉴턴은 급수와 유율, 구적법 연구를 밀고 나갔다. 변화하는 비율과 쌓이는 양 사이의 관계를 새로운 방법으로 정리했다. 미적분은 빈자리에서 불쑥 생긴 것이 아니었다. 페르마, 데카르트, 월리스, 배로 등이 길을 닦았다. 뉴턴은 아주 멀리 갔지만, 먼저 난 발자국이 있는 길을 걸었다.

프리즘으로 빛도 연구했다. 흰빛이 색의 띠로 펼쳐지고, 색에 따라 굴절되는 정도가 달랐다. 널리 알려진 일곱 색의 구분은 자연에 서로 떨어진 일곱 덩어리의 색만 있다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유리가 순수하고 단일한 흰빛을 망가뜨린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흰빛 자체에 서로 다른 성분이 들어 있었다.

땅에서 떨어지는 물체와 하늘의 달도 하나의 질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과를 끌어당기는 중력이 달까지 뻗어 갈 수 있을까. 성숙한 만유인력 이론에 이르기까지는 약 이십 년의 추론과 논쟁, 검증이 더 필요했다.

스물두 살. 역병. 시골. 놀라운 장면이다. 그러나 선배 연구자나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과도 단절된 한 사람이 무에서 물리학 전체를 완성한 장면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1905년에는 중요한 논문 네 편이 남았다. 뉴턴의 이 시기에는 수학과 광학, 중력이라는 세 갈래 연구가 함께 자랐다. 한 사람은 특허청에서 일했고, 다른 사람은 대학의 일상을 떠나 있었다. 둘 다 우리가 상상하는 거대한 학문의 무대와는 거리가 있다.

고통이 저절로 발견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고립도 천재가 되는 처방이 아니다. 여기 보이는 것은 일상이 끊긴 뒤에도 일을 이어 가는 한 사람이다.

이 글의 비유로 말하면 뉴턴은 쌓는 쪽에, 아인슈타인은 정으로 파내는 쪽에 가깝다. 한 사람은 짓기만 하고 다른 사람은 부수기만 했다는 말은 아니다. 아인슈타인도 지었다. 뉴턴의 구축도 하늘과 땅 사이의 낡은 경계를 밀어냈다.

2. 쌓기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출간되었다. 《프린키피아》. 뒤에 오는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할 수 있는지까지 바꾼 책이었다.

운동의 세 법칙.

첫째. 관성계에서 외력의 합이 0이면 물체는 정지해 있거나 등속 직선 운동을 계속한다. 운동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밀어 주는 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둘째. 운동의 변화는 가해진 힘과 연결된다. 질량이 일정할 때 오늘날의 익숙한 표현으로 쓰면 알짜힘은 F = ma다.

셋째. 두 물체가 상호작용할 때 서로에게 가하는 힘은 크기가 같고 방향은 반대다. 두 힘은 서로 다른 물체에 작용한다. 한 물체 위에서 저절로 상쇄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만유인력이 더해진다. 두 질점 사이의 인력은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F = Gm₁m₂/r². 부피가 있는 천체를 계산에 넣으려면 기하학과 질량 분포, 증명이 더 필요하다.

몇 가지 원리가 놀라울 만큼 넓은 계산의 공간을 열었다.

사과가 떨어진다. 달이 지구를 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 밀물과 썰물, 케플러의 행성 궤도, 오가는 혜성, 땅 가까이에서 던진 돌의 곡선. 이들이 공통의 역학 언어로 들어온다. 물론 정밀한 조석 계산이나 달의 운동, 여러 천체의 상호작용을 네 문장으로 끝낼 수는 없다.

공기 저항을 무시하고 지표 부근의 중력 가속도를 일정하게 보면 돌은 포물선을 그린다. 이상화한 중력의 이체 문제에서는 케플러식 궤도를 유도할 수 있다. 가정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정을 밝혀야 계산도 자기 발판을 안다.

발밑에서 머리 위까지 같은 원리. 사과와 달을 서로 무관한 두 물리학에 나눠 맡기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 이 구축의 힘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은 하늘의 에테르 운동과 땅의 네 원소가 변하는 방식을 구별했다. 이후의 천문학과 갈릴레오 등의 연구가 이미 그 경계를 흔들고 있었다. 뉴턴은 그 변화를 체계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새로운 규모로 밀고 나갔다.

잠시 진시황을 곁에 놓아 보자. 한 사람은 여러 지역을 공통의 행정적 기준 아래 묶었고, 다른 사람은 하늘과 땅을 공통의 수학 언어로 묶었다. 명령은 권력으로 시행된다. 물리 이론은 측정 앞에 서야 한다. 비교하는 것은 통일의 포부이지, 사람과 사물을 같은 재료로 취급하는 태도가 아니다.

왕조의 수명으로 이론의 수명을 잴 수도 없다. 통일 이후 진 왕조는 약 십오 년을 갔다. 뉴턴 역학의 영향은 두 세기를 넘어 오늘도 이어진다.

3. 빈자리가 어디인지 알았다

그렇게 힘 있는 것을 세웠어도 뉴턴은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하지 않았다.

중력은 도대체 어떻게 작용하는가.

지구와 달 사이에는 수십만 킬로미터가 있다. 그 관계를 써 낼 수 있다는 것과 궁극적 원인을 안다는 것은 다르다.

1713년 《프린키피아》에 덧붙인 「일반 주석」에서 그는 썼다. Hypotheses non fingo. ‘나는 가설을 꾸며 내지 않는다.’ 중력의 이런 성질을 낳는 원인을 아직 현상에서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여기에는 잠시 머물 만한 구분이 있다. 나는 운동을 아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자연에 왜 이런 힘이 있는지까지 아는 것은 아니다.

과학에서 가설을 세우지 말라는 금지가 아니었다. 뉴턴 자신도 다른 곳에서는 에테르와 물질의 작용에 관해 추측하고 질문했다. 이 대목에서는 근거가 확보되지 않은 설명을 이미 얻은 지식처럼 내놓지 않았다.

이백여 년 뒤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공간의 기하학으로 중력을 다시 기술했다. 자유 낙하하는 물체는 휘어진 시공간의 측지선을 따라 움직인다. 중력장의 변화에는 전파 과정이 있고 중력파는 빛의 속도로 나아간다. 기하학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 변화가 먼 곳까지 즉시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의 말로 바꾸면, 뉴턴은 모르는 것을 위한 자리를 남겼다. 계산을 잘하는 이론을 곧바로 최종 설명이라고 선포하지 않았다.

그 태도를 진나라가 서적을 금지하며 이견을 억압한 모습과 나란히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물리적 질문과 한 사람이 말할 권리는 같은 종류의 잔여가 아니다. 두 시대의 길이가 다르다고 선을 보상하고 악을 벌하는 역사 공식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대한 뉴턴의 관심은 역학의 문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프린키피아》보다 훨씬 전부터 그는 연금술과 신학을 오래 연구했다. 필사본을 베끼고 실험하고 교회사를 대조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읽고 예언의 연대를 따졌다. 그 일들은 수학과 같은 책상 위에 있었다. 물리학을 ‘끝낸’ 다음 시작한 은퇴 생활이 아니었다.

그 종이들에서도 그는 숨은 질서를 찾았다. 그 바람에 질문을 던질 수는 있다. 그러나 연구 분야만 보고 병명을 붙이거나, 너무 성공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믿게 되었다며 속마음을 대신 결정할 수는 없다.

1720년에는 다른 종류의 질서가 큰 손실을 안겼다. 남해회사 거품이었다. 거래 기록 연구는 그가 일찍 팔아 이익을 본 뒤 높은 가격에 다시 사들였다는 흐름을 뒷받침한다. 손실은 컸다. 흔히 나오는 이만 파운드에는 추산과 전해진 이야기가 섞여 있다. 그것이 그가 무일푼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천체의 운동은 계산해도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는 말이 널리 그의 말로 전해진다. 그 전승은 《프린키피아》의 문장만큼 확실하지 않다. 장부 옆에서 녹음한 발언처럼 다루지 않고도 이 이야기의 메아리로 남겨 둘 수 있다.

달의 궤도와 시장에서의 판단에는 서로 다른 지식이 필요하다. 돈을 잃었다고 만유인력이 반박되지는 않는다. 다만 한 영역에서 얻은 정밀함이 삶 전체를 다스리는 힘으로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F = ma는 인간에 대한 학문 전부가 아니다.

4. 다른 얼굴

강력한 이론을 세울 능력이 있다고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한다는 보장은 없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각자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전시켰다. 초기 연구는 뉴턴이 앞섰고, 발표는 라이프니츠가 먼저 했다. 라이프니츠의 표기법과 방법도 큰 영향을 남겼다. 뒤이은 우선권 다툼은 수학을 넘어 명성과 표절 의혹, 학문 기관의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되었다.

1712년 왕립학회는 조사위원회를 꾸렸다. 회장 뉴턴은 자료 선정과 보고서 작성에 깊이 관여했다. 보고서는 그의 우선권을 옹호하면서 라이프니츠의 표절을 부당하게 암시했다. 뉴턴은 뒤에 그 보고서에 대한 익명의 논평도 썼다. 당사자가 기관의 목소리로 자기 사건을 판결하는 일이 그 사람의 위대함 때문에 사소해지지는 않는다.

광학과 중력을 둘러싼 훅과의 갈등도 상처를 남겼다. 후대의 이야기는 훅의 초상화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뉴턴이 그림을 파괴했다는 이야기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초상화가 왕립학회에 걸려 있었는지부터 확실하지 않다. 다툼이 있었다고 그림을 없앤 일까지 사실이 되지는 않는다.

또 다른 책상은 왕립 조폐국에 있었다. 그는 1696년 감독관이 되었고 1699년에는 국장이 되었다. 용의자와 정보 제공자를 직접 만나고 증언을 모으며 화폐 위조를 기소했다. 종이 위의 수학 놀이가 아니었다. 수사는 당시의 가혹한 형벌 체계로 이어졌고, 처형된 피고인도 있었다.

농가, 논문, 위원회, 동전, 심문. 하나의 재능이 모든 것을 비추지는 않는다. 하나의 잘못이 모든 성취를 태워 없애는 것도 아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특정한 형식 체계를 다룬다. 인격이 ‘일관되지만 불완전하다’고 증명해 주는 정리가 아니다. 뉴턴이 권력을 어떻게 썼는지 판단하려면 편지와 행동,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윤리적 판단에 수학의 도장을 찍을 필요는 없다.

워싱턴이 권력을 돌려준 일은 그가 사람들을 노예로 부린 사실을 지우지 않는다. 한편 양자 이론의 완전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이견을 노예제나 학술 권력의 불공정과 같은 도덕적 잘못으로 나란히 놓을 수는 없다. 각각의 문제를 따로 보아야 한다. 위대한 업적은 무죄 증명서가 아니다. 사람을 비판한다고 그가 인간으로서 갖는 자리까지 없애는 것도 아니다.

5. 거인의 어깨 위에서

1676년 뉴턴은 훅에게 썼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지는 데카르트와 훅의 성과도 인정했다. 이 말은 겸손으로 읽혔고, 조롱이 아니었느냐는 추측도 낳았다. 확인할 수 없는 내면의 드라마를 훅의 체격에 떠맡길 필요는 없다. 먼저 그 말이 인정하는 관계를 보자.

그의 구축은 영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케플러는 행성 운동의 규칙을 기술했다. 갈릴레오는 낙하와 운동 연구를 발전시켰다. 데카르트는 대수와 기하를 새롭게 연결했다. 배로와 월리스, 관측과 질문을 건넨 다른 이들도 길 위에 있었다. 핼리의 격려와 출판 지원 덕분에 《프린키피아》는 책상을 벗어날 수 있었다.

뉴턴은 그 일들을 물려받고 바꿨다. 조각들을 그대로 상자에 담은 것이 아니었다. 따로 있던 결과들이 서로에게서 도출되고 서로를 검증할 수 있게 했다.

공자와 호메로스를 곁에 놓으면 제한된 공통점이 보인다. 전하는 일은 창조하는 일과 모순되지 않는다. 공자가 말한 ‘전함’과 호메로스 전승이 구연에서 서사시의 형태로 나아간 과정은 한 사람이 책을 편집하는 일로 환원되지 않는다. 뉴턴 역학의 초기 형태도 아니다.

그럼에도 새것은 흔히 다른 이들이 먼저 살고 묻고 노래하던 자리에서 자란다. 앞선 사람의 이름을 말한다고 내 일이 작아지지는 않는다.

이어받는다는 것은 되풀이하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손으로 넘어간 것은 새로운 관계와 힘을 얻을 수 있다.

6. 이백 년

뉴턴의 구축은 얼마나 오래 버텼을까.

1687년의 《프린키피아》에서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까지 이백십팔 년.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까지는 다시 십 년이다. 두 날짜는 시간과 공간, 중력의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일어난 변화를 가리킨다.

긴 세월 동안 뉴턴 역학은 공학과 천문학을 깊이 바꿨다. 사람들은 그것과 후대의 발전을 이용해 다리와 배와 철도를 만들고 행성과 혜성의 궤도를 계산했다. 열과 전기, 자기와 빛에 관한 연구도 자랐다. 물리학에 《프린키피아》 한 권만 있었던 적은 없다.

어려움도 아인슈타인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십구 세기에는 수성의 근일점이 예상과 다르게 이동하는 현상이 이미 문제가 되었다. 큰 성공을 거둔 이론이라고 이백 년 동안 아무 어긋남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고 나서 아인슈타인이 질문의 규모를 바꿨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빠른 운동에서 시공간 관계를 새로 기술했고,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을 다시 기술했다. 속도가 빛보다 훨씬 느리고 중력장이 약한 경우 등 적절한 조건에서는 뉴턴식 기술이 훌륭한 근사로 다시 나온다.

근사는 아무렇게나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정확도가 있고 범위가 있다. 다리를 만드는 데 충분한 식도 정밀한 천체 관측에서는 부족할 수 있다. 달의 궤도라도 높은 정확도를 요구하면 상대론적 보정을 무조건 지울 수 없다.

그러므로 ‘포함되었다’는 말에는 조건이 붙는다. 새 이론은 옛 이론이 넓은 범위에서 왜 잘 들어맞는지, 어디서 모자라는지를 설명한다. 뉴턴의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 그대로 새 이론 안으로 이사한 것은 아니다.

양자 이론도 미시 세계를 기술하는 방식을 바꿨다. 그렇다고 고전역학이 교실과 공장과 발사장을 떠나지는 않았다. 계속 쓸모가 있다는 사실이 모든 규모에서 최종 답이라는 뜻도 아니다.

이 관계를 연작의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의 빈터는 다른 사상가의 저속 극한이 아니다. 공자의 인은 어떤 수식의 근사가 아니다. 칸트의 물자체는 측정 오차가 아니다. 사상이 다르면 비교하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뉴턴 이론에 적용 범위가 있다는 판단은 물리적 유도와 실험에서 나온다. 괴델의 정리가 역사에서 다시 실현된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잔여’란 아직 설명하지 못한 현상에서 눈을 돌리지 말자는 말일 뿐이다.

7. 이 연작의 다른 사람들과

이제 이 사람들을 한자리에 놓아 보자. 연작이 제안하는 읽기의 장면이지, 한 사람의 삶을 한 문장으로 판결하는 목록은 아니다.

진시황은 제도의 통일을 넓혔고 서적 금지와 살해로 이견의 자리를 좁혔다. 왕조는 짧았지만 제도의 유산은 변하며 이어졌다. 워싱턴은 두 번 권력을 돌려주었으나 농장의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의 통일 왕권은 흩어졌지만 문화적 연결까지 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칸트는 세 비판서를 쓰며 이성의 한계를 물었다. 붓다는 뗏목으로 건너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쳤지, 모든 가르침을 없애라고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아름다움과 질서를 길잡이로 삼으면서 이론과 세계의 거리를 마주했다. 호메로스 전승은 노랫소리를 세대 너머로, 마침내 문자로 옮겼다.

뉴턴은 하늘과 땅의 많은 운동을 공통의 수학적 관계 안에 넣었다. 이후의 이론은 지도 경계를 바꿨지만 그 안의 길을 모두 지워 버리지는 않았다.

오늘의 로켓과 다리도 고전역학과 그 후속 발전에 기대고 있다. 이 연작에서 물려받을 수 있는 작업이 그의 것뿐인 것은 아니다. 다만 바꾸면서 이어받는다는 말이 특히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옛 공식은 종이에 남아 여전히 계산이 사물에 닿게 한다.

빈틈없는 구축이 아니다. 거듭 사용해도 견디면서 다시 검증받아야 하는 구축이다. 믿을 만하다는 것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아주 단단한 벽돌 한 장으로 상상하고 싶다. 뉴턴을 모두의 승자로 선언하려는 것이 아니다. 뒤에 온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금도 거기에 무게를 맡길 수 있는지 생각해서다.

이 연작이 상상하는 다리 들머리에는 정을 든 사람, 쌓는 사람, 삶에 깎인 사람, 떠난 사람이 서 있다. 뉴턴은 다리 전체가 아니다. 그래도 그의 벽돌이 빠진다면 다리에는 상당히 큰 구간이 비게 된다.

8. 사과

끝에서는 사과로 돌아가자.

윌리엄 스튜클리는 1752년에 완성한 회고록에서 1726년 뉴턴과 나눈 대화를 기록했다. 두 사람은 정원에서 차를 마셨다. 뉴턴은 젊었을 때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생각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 회상에서 사과는 왜 옆이나 위가 아니라 지구 중심으로 떨어지는가. 물질이 서로 끌어당긴다면 사과도 지구를 당기고 있다. 질문은 나무 아래를 벗어나 차츰 달과 천체로 뻗는다.

사과가 머리를 때린 기록은 아니다. 발견 전 과정을 복원할 수 있도록 그 자리에서 쓴 연구 노트도 아니다. 그래도 한 사람이 늙어서 자기 일의 시작을 어떻게 말하는지에는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사과 하나가 떨어진다. 한 사람이 ‘원래 그런 것’으로 마지막 답을 삼지 않는다.

이 글은 그 물음을 정으로 파내는 일이라 부른다. 익숙한 것을 다시 낯설게 하는 일이다. 그 뒤에는 한 번의 영감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이십 년 안팎의 계산과 대화, 수정과 구축이 이어졌다.

질문.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 답. 만유인력으로 사과와 달을 연결해 보자. F = Gm₁m₂/r². 답은 질문을 더 멀리 보내고 새로운 질문도 남긴다.

마지막 장면은 울즈소프에 놓아 두자. 이십 대 초반의 청년, 돌집, 정원, 떨어지는 사과. 이것은 늦은 회상에서 펼쳐 낸 문학적 장면이지, 사라진 당대 일기 대신 현장을 써 넣은 것이 아니다.

훗날 그는 계산할 수 있는 하늘과 땅을 세웠다. 우주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무 아래 있는 사람이 하늘의 달을 새롭게 보기에는 충분했다.

읽기 안내와 출처

뉴턴은 당시 영국의 구력으로 1642년 12월 25일, 그레고리력으로 1643년 1월 4일에 태어났다. 1665년 여름에는 스물두 살이었다. 역병 때문에 떠나 있던 기간에도 잠시 케임브리지에 돌아왔다. ‘기적의 해들’은 초기 연구의 집중을 가리키며 시골에서 《프린키피아》가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미적분에는 긴 전사가 있고 빛의 스펙트럼은 연속적이며 일곱 성분으로 끊어져 있지 않다.

운동 법칙은 1687년 《프린키피아》의 ‘공리 또는 운동 법칙’을 따른다. F = ma는 관성계에서 질량이 일정할 때 쓰는 익숙한 현대식 표현이다. 본문의 인력식은 질점에 해당하며, 크기가 있는 물체는 질량 분포를 다뤄야 한다. 궤도, 조석, 투사체 계산에는 이상화와 후대의 발전이 포함된다.

Hypotheses non fingo는 1713년 추가된 「일반 주석」에 나온다. 연결한 자료는 1729년 영어 번역이다. 아직 현상에서 끌어내지 못한 중력의 원인에 관한 말이지, 평생 가설을 금지했다는 선언이 아니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도 중력 변화는 순간적이지 않으며 중력파는 광속으로 전파된다.

연금술, 성서 연구, 수학적 자연철학은 수십 년 동안 나란히 이어졌다. 뉴턴의 종교 해석에는 당시 지배적인 교리와 다른 점도 있다. 관심사나 신앙으로 소급해 의학적 진단을 하지 않는다. 남해회사 거래는 기록 연구를 참고했다. 이만 파운드라는 손실액과 인간의 광기에 관한 말은 원장부나 친필 문서와 사료적 지위가 같지 않다. 하나의 현대 화폐 가치로 환산하지도 않는다.

유율 연구는 뉴턴이 먼저 했고, 라이프니츠는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전시켜 먼저 발표했다. 1712년 조사와 이후 보고서 출간, 뉴턴의 익명 논평은 구분해야 한다. 회장이자 당사자로서 개입한 점은 실질적인 문제다. 훅 초상화의 존재와 소유, 행방에 관한 증거로 파괴를 단정할 수 없다. 조폐국 기록은 면담, 증거 수집, 기소를 뒷받침하지만 대중 전기에 나오는 변장 잠입 장면은 덧붙이지 않는다.

거인의 어깨라는 말은 1676년 훅에게 보낸 편지에 있으며, 데카르트와 훅의 기여도 인정한다. 훅의 체격을 조롱했다고 확정할 증거는 없다. 공자와 호메로스와의 비교는 계승과 창조에 관한 저자의 해석으로, 같은 역사적 과정을 주장하거나 선배를 수동적인 재료 공급자로 축소하는 것이 아니다.

수성의 비정상적인 근일점 이동은 십구 세기에 이미 알려졌다.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과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의 역할은 다르다. 고전적 근사는 저속, 약한 중력장, 필요한 정확도 등의 조건을 가지며 미시 현상에는 양자 이론도 관여한다. 괴델의 정리는 성격의 결함, 물리학의 경험적 한계, 문명의 수명을 증명하지 않는다. non dubito는 주체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점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며, 행동을 비판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사과 이야기는 스튜클리의 1752년 회고록에 나오는 1726년 4월 15일의 대화를 따른다. 사과가 머리를 때리는 장면은 없다. 우주, 벽돌과 다리, 인물들의 병치, 마지막 농가와 정원은 저자의 해석적 이미지다. 앞선 사람과 협력자를 배제하지 않으며 새 역사 자료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뉴턴 프로젝트: 생애와 연구 연표 · 뉴턴: 《프린키피아》의 운동 법칙(1687년) · 뉴턴: 「일반 주석」(1729년 영어 번역) · 뉴턴 프로젝트: 과학·연금술·종교 원고 안내 · 앤드루 오들리즈코: 뉴턴과 금융 거품에 관한 기록 연구 · 뉴턴: 미적분 우선권 보고서에 관한 논평 초고 · 왕립학회: 훅과 뉴턴, 사라진 초상화 · 왕립 조폐국 박물관: 뉴턴의 직무와 수사 · 뉴턴 원고 목록: 챌러너 사건 · 브루스터가 수록한 뉴턴의 1676년 훅에게 보낸 편지 · NASA: 뉴턴·아인슈타인·수성 문제 교육 자료 · LIGO: 중력파란 무엇인가 · 스튜클리: 《아이작 뉴턴의 생애에 관한 회고록》(1752년)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