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 108 · 세계가 사람을 되빚을 때
미켈란젤로, 돌 속에 사람이 있다
《다비드》에서 《론다니니 피에타》까지. 깎고, 다시 시작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일. 그러나 사람은 누군가가 완성할 재료가 아니다.
1. 깎아낸다는 것
아직 손대지 않은 대리석을 보면 우리는 돌을 본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면 오히려 잊기 쉽다. 저 어깨도, 저 손도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든 돌 안에는 조각상이 들어 있고 조각가는 그것을 풀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그의 이름과 함께 널리 떠돈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명언을 실제 발언처럼 옮기기보다 그의 시를 펼쳐보자. 예술가의 구상은 불필요한 대리석 안에 있으며, 정신을 따르는 손이 그것을 꺼내 보인다는 생각은 거기에 실제로 있다.
창작을 바라보는 힘 있는 시선이다. 계속 보태는 대신 덜어낸다. 무엇을 버릴지 알게 될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돌이 저절로 《다비드》를 내주는 것은 아니다. 같은 돌에서도 서로 다른 형상을 생각할 수 있다. 어디에 정을 댈지 판단해야 하고, 판단은 틀릴 수도 있다. 해방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만드는 사람의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들린다. 상대가 안다고 믿는 것을 하나씩 두드리는 소리다. 하지만 틀린 답 아래에 언제나 완성된 진리가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대화 끝에 우선 드러나는 것이 전보다 정직한 질문일 때도 있다.
한 사람은 말로, 다른 사람은 망치와 정으로 일한다. 둘을 잇는 것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미리 선포하는 태도가 아니라, 가장 바깥층을 전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다.
2. 다비드
1501년, 스물여섯 살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대성당 공사를 맡은 이들의 의뢰를 받는다. 기다리는 것은 앞선 조각가들이 이미 손댔다가 오랫동안 내버려둔 대리석이다. 남이 남긴 자국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먼저 좁혀놓았다.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백지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결정이 남아 있는 돌 안에서 자기 길을 찾아야 한다.
1501년부터 1504년까지 작업한 끝에 《다비드》가 나온다. 함께 깎아낸 받침까지 포함하면 높이가 5미터를 넘는다.
돌은 아직 날아가지 않았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고 미간이 좁아진다. 왼손은 돌팔매 끈을 어깨로 가져가고 오른손은 몸 옆으로 내려온다. 몸은 단단히 서 있는데 시선은 이미 몸보다 앞서 있다. 골리앗은 조각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그 상대를 느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몸 안에는 결정이 모이고 있다.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첫머리에서도 비슷하게 다가오는 압력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보고 듣는 사람이 잇는 연결이지, 두 예술가가 같은 공식을 썼다는 뜻이 아니다.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는 일화만이 음악을 여는 유일한 열쇠일 필요도 없다.
대성당을 위해 주문한 조각은 나중에 시 정부가 있는 궁전 앞에 놓인다. 자리가 달라지자 사람들이 읽는 의미도 달라진다. 거인과 마주 선 젊은이는 피렌체 공화국의 힘과 독립을 상징하게 된다.
방치된 돌, 젊은 조각가, 하나의 도시. 이 셋이 만날 운명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품이 그들을 이어놓았다.
3. 시스티나의 천장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미켈란젤로에게 맡긴다. 자신을 무엇보다 조각가로 여긴 사람이 거대한 곡면 앞에 선다.
작업은 1512년까지 이어진다. 모든 일을 철저히 혼자 해냈다는 이야기는 조수와 장인들의 노동을 지운다. 등을 대고 누워 그렸다는 모습도 정확하지 않다. 그가 시 옆에 직접 그린 작은 그림에는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팔을 위로 뻗은 사람이 있다.
물감은 아래로 떨어지고 몸은 뒤로 휜다. 바닥에 서서 천장 속 인물들을 감탄하며 올려다볼 때 우리는 쉽게 잊는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려면 살아 있는 누군가의 몸이 아래에서 불편한 자세를 버텨야 했다는 것을.
가운데 놓인 아홉 개의 창세기 장면 중 《아담의 창조》는 유난히 눈을 붙잡는다. 신이 손을 내민다. 아담도 손을 내민다. 두 손가락 사이에 조금의 빈틈이 남는다.
시선이 멈추는 곳은 더 많이 그려 넣은 곳이 아니라 비워둔 곳이다. 팔의 방향과 몸의 자세, 둘 사이의 거리가 모두 우리를 그 작은 틈 앞으로 데려간다.
생명이 주어지기 직전의 순간으로 볼 수 있다. 아직 닿지 않은 관계를 느낄 수도 있다. 그림은 완성되었지만 보는 일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남은 거리를 건너고, 다시 두 손가락이 여전히 닿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그 빈곳은 그림의 결함이 아니다. 우리의 시선이 계속 걸어갈 자리를 남겨둔다.
레오나르도는 아직 달라질 것 같은 얼굴 앞에 우리를 붙잡아둔다. 미켈란젤로는 두 손가락 사이에 붙잡아둔다. 화가는 붓을 놓았는데 보는 사람은 쉽게 떠나지 못한다.
4. 최후의 심판
1536년부터 1541년까지, 예순을 넘긴 미켈란젤로는 다시 시스티나에서 일한다. 이번에는 제단 벽이다. 《최후의 심판》이다.
머리 위에는 창조가 있고 정면에는 심판이 있다. 사람은 어디서 왔고 무엇을 마주할 것인가. 같은 방의 서로 다른 방향에 두 질문이 놓인다. 관람객은 그 사이에 서서 한 번의 시선으로 둘 다 볼 수 없다.
그리스도를 둘러싼 성인들 가운데 성 바르톨로메오는 벗겨진 살가죽을 들고 있다. 그 가죽에 그려진 얼굴은 일반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 가까이, 화면 중심부에 있다.
천장에서 보았던 몸들은 그렇게 힘찼다. 그런데 여기서는 텅 빈 가죽에 얼굴 하나가 축 늘어져 있다. 이토록 강한 육체를 그릴 수 있던 화가가 자기 얼굴에는 이런 불안한 형태를 골랐을지도 모른다.
피로와 자기 의심을 읽을 수 있다. 심판을 앞둔 그리스도인의 두려움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림을 진단서로 바꿀 수는 없다. 일이 그를 다 소진시켜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대신 선언할 수도 없다.
그 얼굴은 스스로를 해설하지 않기에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림을 만든 사람도 자신이 그린 심판 바깥에 서 있지 않다. 그 역시 그림 안에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장엄함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마지막 답을 얻지는 못한다.
5. 여든여덟 살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태어나 1564년에 죽었다. 여든여덟 해. 한 사람이 이전에 확신했던 것들을 여러 번 다시 마주할 만큼 긴 생애다.
20대에 《다비드》를, 30대에 천장화를, 60대에 《최후의 심판》을 만들었다. 1547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맡는다. 그의 돔 구상은 로마의 하늘선을 깊이 바꾸었지만 실제 돔은 사후에 후계자들이 설계를 조정하며 지었다.
생의 마지막 시기에도 그는 대리석 앞에 있었다. 《론다니니 피에타》는 미완성으로 작업실에 남는다. 죽기 며칠 전까지도 거기에 손을 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받치고 있다. 길게 늘어난 두 몸이 가까워져 거의 하나처럼 보인다. 공간을 단단히 차지하는 《다비드》와는 전혀 다른 힘이다. 여기서는 둘 다 지탱할 힘을 잃을 듯한데도 서로를 놓지 않는다.
돌에는 고쳐 만든 흔적이 남아 있다. 앞선 형상의 일부가 남은 채 그 안에서 새 형상이 깎여 나온다. 유럽 전역의 찬사를 받은 노인은 자신이 가장 능숙하게 해내는 답만 반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는 완성하고 싶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죽음은 실제로 작업을 중단시켰다. 마지막에 인간의 몸이 환상임을 깨달았다고 대신 말할 수도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가 계속 고쳤고, 젊은 날과 다른 종류의 힘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흐의 미완성 푸가나 레오나르도가 남겨둔 계획을 떠올리면 비슷한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각 작품이 완성되지 못한 사정은 다르다. 시간이 모자란 사람, 한눈판 사람, 끝내기를 거부한 사람이라는 편리한 칸에 세 생애를 나눠 넣을 수는 없다.
《다비드》에서 힘이란 혼자 두 발로 굳게 서는 것일 수 있다. 이 늦은 피에타에서는 둘 다 연약해 보이면서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치는 것이 힘일 수 있다.
사람을 깎아 없앤 뒤 드러난 허무가 아니다. 우리 눈앞에는 여전히 두 사람이 있고, 놓지 않으려는 동작이 있다.
6. 고통
편지와 시를 읽으면 불평이 많이 나온다. 몸과 돈, 가족과 후원자의 요구, 아무리 해도 마음에 차지 않는 작품. 그러나 불평이 많이 남았다는 이유로 한평생 기쁨이 없었다고 판정할 수는 없다.
천장을 그리던 때 그는 지친 심정과 자조를 담아 자신의 모습을 시로 썼다. 배는 앞으로, 머리는 뒤로, 얼굴은 떨어지는 물감을 받아낸다. 몸이 거의 팽팽하게 휜 활 같다. 그것은 진료 기록이 아니라 스스로를 놀리는 시인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우리 목까지 뻐근해진다.
가족에 대한 책임도 있었다. 친척들을 경제적으로 돕고,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화를 낸다. 정 하나만 가진 고독한 신화가 아니다. 평범한 의무와 서운함도 그를 따라 작업실에 들어온다.
1532년에는 젊은 로마 귀족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를 만났다. 시와 선물한 소묘에는 깊은 사랑과 그리움이 남아 있다. 오늘의 말로 관계에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고 해서 단순한 예의로 축소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근거 없는 사생활까지 보태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고통뿐 아니라 사랑과 우정, 신앙 속의 불안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통이 천재를 움직였다는 한마디로 눌러 담으면 살아 있는 사람이 작품 생산의 연료가 된다.
베토벤도 사마천도 미켈란젤로도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고 해서 자신이 겪은 상처가 꼭 필요했던 것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고통은 창작의 입장권이 아니며, 더구나 우리가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대가가 아니다.
살펴볼 것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것들을 그가 어떻게 다루었느냐는 점이다. 어떤 때는 팽팽한 근육으로 들어가고, 어떤 때는 늘어진 얼굴로 들어간다. 서로 기대는 두 몸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고통이 말끔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대리석이 진통제도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이 홀로 견디던 무엇이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이게 된다.
7. 레오나르도와 그
레오나르도가 약 스물세 살 위였다. 둘 사이에 경쟁이 있었고 적대감을 전하는 이야기들도 남았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내렸을 판결까지 우리가 지어낼 필요는 없다. 하나는 돌밖에 못 깎는 사람,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피렌체는 두 사람을 하나의 거대한 도시 사업 안에 불러들였다.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 전투》를,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를 의뢰받았다. 도시는 두 사람의 재능을 정부 청사의 벽에 나란히 담고 싶었다.
레오나르도의 벽화 사업은 완성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실물 크기 밑그림도 완성된 벽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로마로 불려가고 새로운 의뢰들이 삶을 다른 곳으로 끌어갔다. 도시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구상과 습작들은 나중에 그것을 배우는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성과 없는 넓이와 늘 끝을 보는 깊이의 대결이 아니다. 레오나르도에게도 완성한 걸작이 있다. 미켈란젤로에게도 미완성 조각, 크게 줄어든 무덤 계획, 지어지지 않은 건축안이 있다. 실제 일은 우리가 좋아하는 대구보다 복잡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레오나르도는 호기심을 따라 이 질문에서 다음 질문으로 함께 가보고 싶게 한다. 미켈란젤로는 눈앞의 형상에 온몸을 걸고 다가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에게 접근하는 길이지, 두 사람을 가둘 정의가 아니다.
모나리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그 얼굴을 다 본 것은 아니다. 《아담의 창조》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손가락 사이의 거리를 다 본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작품을 완성했지만, 뒤에 오는 사람들이 보는 일까지 끝내놓지는 않았다.
8. 돌 속에 사람이 있다
이제 이 연작이 상상하는 다리 어귀로 그를 초대해보자.
손에는 대리석 가루가 묻어 있다. 여든여덟 살, 수많은 의뢰와 뒤집힌 계획과 새 출발을 거친 노인이다. 가루가 손가락 사이에 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쉰다.
다른 사람들은 다리 너머 풍경을 본다. 그는 시선을 내려 다리의 돌을 본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형상이 안에 있으면 어떨까. 그는 표면을 손으로 쓸어볼 것이다. 돌이 미리 답을 불러주어서가 아니다. 여전히 표면을 전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다.
소크라테스가 다가와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노인은 아직 제대로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정을 한번 대봐야 방금 생각이 버티는지 알 수 있다. 손으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고, 재료도 답을 돌려준다.
그러나 여기서 돌과 사람은 갈라진다. 조각가는 대리석의 형태를 정할 수 있다. 살아 있는 타인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모습으로 깎아낼 권리는 없다. 사람은 천재가 완성해주기를 기다리는 재료가 아니다.
그러면 돌 속에 사람이 있다는 말은 다른 사실을 일깨운다. 오래된 자국에 제약받거나 남들에게 밀려난 삶도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다 설명되지는 않을 수 있다. 그 사람에게는 아직 자기 길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대신 걸을 길은 아니다.
그는 다시 정을 든다. 여든여덟에도 존재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한 번을 치지 않더라도 버려도 되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이 일은 아직 계속하고 싶은 것이다.
돌은 많다. 한평생으로는 모자란다. 그가 남기는 것은 드러난 형상들만이 아니다. 다음 사람이 돌을 다시 한번 보게 하는 이유도 남긴다.
읽기 안내와 출처
개정한 중국어·영어 본문을 바탕으로 쓴 완전판이다. 작품의 연대와 역사적 사실은 에세이의 해석과 구분했다. 서두의 시는 뜻을 풀어 옮겼으며, 다리 장면은 문학적 상상이다.
아카데미아 미술관: 《다비드》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켈란젤로 전시 자료 ·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의 역사 · 바티칸 박물관: 《최후의 심판》 · 스포르체스코성 박물관: 《론다니니 피에타》 안내 ·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1504년 무렵의 피렌체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