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N / 中文|繁體|日本語|Français|Deutsch|Español|한국어
← 위대한 삶들

108 / 108 · 타자와 빈자리

스티븐 킹: 108번째 자리

쓰레기통에서 건진 원고부터 다리 끝의 빈자리까지. 아직 끝나지 않은 한 삶이 108편을 오늘로 데려온다.

1. 메인주, 일이 끝난 뒤

시간을 1970년대 초로 돌려보자. 메인주. 젊은 스티븐 킹은 아직 소설만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

그는 산업용 세탁소에서 일했다. 병원 침대 시트와 식당의 식탁보가 밀려왔다. 한 무더기를 끝내면 다음 무더기가 기다렸다. 몸은 일을 해야 했고, 이야기는 남는 시간에 써야 했다.

아내 태비사, 어린 두 아이와 트레일러 주택에서 살기도 했다. 여기서 트레일러는 여행의 낭만이 아니다. 젊은 가족이 감당할 수 있는 집이었다. 좁은 공간 안에 생활의 소리가 겹쳤다.

태비사도 도넛 가게 등에서 일했다. 수입과 청구서, 아이 돌보는 시간을 두 사람이 계속 맞춰야 했다. 훗날 소설가가 되는 태비사는 그때도 자기 독서와 판단을 가진 사람이었다. 미래의 대작가를 응원하는 아내만은 아니었다.

돈이 빠듯하면 아이가 아픈 것만으로도 한 달 살림이 흔들린다. 원고지를 내밀어 약값을 치를 수는 없다.

1971년 가을, 킹은 햄프든의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저녁과 주말에는 글을 썼다. 세탁소와 교실, 집안일이 날마다 똑같은 순서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 일들이 함께 젊은 작가의 시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 좁은 집에서 그가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아이도, 청구서도, 내일 할 일도 그대로 있다. 그 앞에 이야기 하나가 더 놓인다.

고등학생 여자아이에 관한 소설이다. 엄마에게 학대받고 친구들에게 모욕당하는 아이. 생각만으로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아이.

몇 쪽을 쓰다가 그만둔다. 주인공에게 다가가기 어렵다. 여자아이의 생활을 잘 알지도 못한다.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갈 수 있을지 보이지 않는다. 쓴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는다.

여기서 끝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야기가 영영 사라질 수도 있었다.

킹의 회고에 따르면, 태비사가 그 종이를 건져 읽었다.

작가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던 가능성을 다른 독자가 알아본 것이다. 낯선 생활의 세부라면 자신이 도울 수 있다고 했다.

계속 써봐.

그때까지 킹은 단편을 팔기도 했고, 출판되지 못한 장편도 써두었다. 거절은 낯설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그가 막 닫아버린 문을 조금 다시 열었다.

그래서 다시 썼다.

버린 몇 쪽이 다시 첫머리가 되었다. 수업과 일, 육아 사이에서 이야기가 자랐다. 태비사의 도움은 쓰레기통 옆의 한순간에만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일상 노동이 계속 쓸 수 있는 시간을 함께 받쳤다.

몇 달 뒤 소설을 끝냈다. 제목은 《캐리》였다.

1973년 봄, 더블데이 출판사가 원고를 받아들였다. 선인세는 2,500달러. 빠듯하게 살림을 꾸리는 가족에게 이미 큰일이었다.

같은 해 페이퍼백 판권이 40만 달러에 팔렸다. 계약에 따라 절반이 킹에게 돌아왔다.

20만 달러. 단순히 숫자가 커진 것이 아니었다. 하루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가 바뀌었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일이 더는 아득한 소망이 아니었다.

킹은 교직을 떠났다. 1973년 늦여름에는 가족이 이사했다. 책이 서점에 나온 것은 1974년 봄이었다. 독자를 만나기도 전에 책은 그것을 쓴 사람과 가족의 일과를 바꾸었다.

출간 당시 킹은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 뒤로 수십 년 동안 그는 쓰는 자리로 돌아갔다. 장편은 수십 권이 되었고 단편도 많이 썼다. 세계 곳곳에 독자가 생겼다. 명성과 수입은 옛날과 달라졌다.

그러나 이 글에 남기려는 것은 성공의 장부가 아니다. 자리에 앉아, 아직 제대로 보아주지 않은 한 사람을 이야기 안으로 들이는 동작이다.

그는 살아 있다. 일은 계속되고 있다. 선택도 계속된다.

2. 캐리

《캐리》는 무엇이 다른가.

겉으로 보면 초자연적 공포소설이다. 위험한 힘을 가진 여학생이 자신을 모욕해온 세상에 그 힘을 돌린다.

하지만 힘보다 먼저 그 아이를 보자.

캐리 화이트의 엄마에게 종교는 딸을 가두고 때리며 몸을 죄악으로 두려워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다. 생리가 무엇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체육 수업 뒤 샤워실에서 초경을 맞은 캐리는 자신이 죽어가는 줄 안다.

다른 아이들은 웃고 탐폰과 생리대를 던진다. 설명과 도움이 가장 필요한 순간, 돌아온 것은 집단적인 공격이다. 한 아이의 공포가 다른 아이들의 놀이가 된다.

캐리에게는 친구가 없다.

한편 캐리는 염력을 알아간다. 희미하고 간헐적으로 나타나던 힘을 연습하고 쓸 수 있게 된다. 비현실적인 능력은 자리를 허락받지 못한, 너무나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커진다.

수 스넬도 샤워실에서 캐리를 괴롭힌 아이였다. 나중에 후회하고, 남자친구 토미 로스에게 캐리를 무도회에 데려가달라고 부탁한다. 후회가 잘못을 없애지는 않는다. 그래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과는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캐리는 드레스를 입고 토미와 춤춘다. 몇 시간 동안은 놀림받는 아이만이 아니다. 누군가 다정하게 대한다. 자신에게도 이런 미래가 있을지 모른다.

크리스 하겐슨과 빌리 놀런이 준비한 함정이 작동한다. 돼지 피가 캐리에게 쏟아진다. 떨어지는 양동이는 토미도 때린다. 기대했던 밤이 누군가 의도해서 만든 구경거리가 된다.

피를 뒤집어쓴 캐리에게는 방 안의 모두가 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겨우 얻은 자리가 다시 조롱의 한가운데로 바뀐다. 소설은 다른 시선도 보여준다. 캐리가 느끼는 것과 그곳의 모든 사람이 실제로 하는 일은 완전히 같지 않다.

수치심과 공포, 분노가 몰려온다. 힘이 파괴로 향한다. 재난은 무도회장을 넘어 마을로 번진다. 많은 사람이 죽는다. 모녀의 마지막 충돌도 죽음으로 끝난다.

수 스넬만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다만 수는 남은 이들의 중요한 목소리가 된다. 자신이 가담한 괴롭힘과, 후회했어도 막지 못한 결과를 돌아봐야 한다.

불이 꺼졌다고 이야기가 닫히지 않는다. 남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계속 설명한다.

괴롭힘당하던 소녀가 초능력으로 복수한다. 그렇게 요약하면 간단한 공포 이야기다. 킹이 하는 일은 그보다 복잡하다.

캐리는 구체적인 내면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난다. 처음부터 괴물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누군가에게 쓰러질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학대받은 생활이 있고, 초대를 믿어도 되는지 망설인 시간이 있고, 자신도 미래를 가질 수 있다고 잠깐 믿은 순간이 있다.

그것을 읽은 뒤에는 하나의 이름표로 캐리를 멀리 밀어내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죽은 사람들을 잊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캐리의 고통도 진짜이고, 캐리가 남긴 고통도 진짜다. 둘 다 남아 있기 때문에 참사가 통쾌한 복수로 끝날 수 없다.

사회가 보지 않은 사람이 이야기 한가운데 있다. 돈이 많거나 예쁘거나 인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웃음거리로 취급된 사람에게도 그 웃음으로 대신할 수 없는 안쪽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 전체가 캐리의 독백인 것도 아니다. 인물들 사이로 시점이 움직이고 보도, 회고, 조사 자료 같은 형식이 끼어든다. 독자는 사건을 둘러싼 말들 사이에서 한 사람에게 다가간다. 다른 이들이 본 것, 오해한 것, 놓친 것을 함께 읽는다.

문학은 킹 이전에도 배제된 사람과 괴물의 내면을 썼다. 그가 처음 만든 시선은 아니다. 여기서는 그 시선이 유난히 날카롭게 작동한다. 두려우면서도, 두려운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밀려왔는지 잊기 어렵다.

이후 많은 작품으로 이어질 방향이 이미 보인다. 농담이나 골칫거리, 처리할 사건으로 줄어든 사람에게, 그런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삶을 돌려주는 것.

공포는 그 인식을 지우지 않는다. 때로는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인식으로 만든다.

3. 글쓰기라는 일

2000년,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한국어 제목으로도 알려진 On Writing이 나온다. 회고록이면서 글쓰기의 실제를 다루는 책이다. 출간 당시 킹은 쉰세 살이었다.

공포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도 글쓰기 조언을 얻으러 이 책을 연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중요한 태도는, 우선 글쓰기를 연습이 필요한 기술이자 일로 대하자는 것이다.

예술을 쫓아내자는 말이 아니다. “나는 예술가다”라는 선언이 좋은 문장을 대신 써주지는 않는다. 도구와 경험, 고치는 능력은 조금씩 익혀야 한다.

배관공은 영감이 올 때까지 새는 수도관을 내버려둘 수 없다. 훈련과 도구를 써서 손을 움직인다. 자신을 신비화하지 않아도 일에는 숙련의 차이가 있다.

그 비유를 글쓰기로 가져오면 킹이 되풀이해 말하는 습관이 보인다. 그는 책을 쓰던 시기의 일과를 설명하면서 하루 2,000단어를 목표로 했다고 적었다. 먼저 앉아서 일한다. 오늘은 글 쓸 기분이 드는지 따지는 데 하루 전체를 맡기지 않는다.

초고가 처음부터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써야 다시 읽고 자르고 고칠 대상이 생긴다. 나쁜 문장이 반가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종이에 한 번도 내려오지 않은 완벽한 문장보다는 다음 작업을 가능하게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쓴다.

읽을 때는 다른 사람의 문장을 만나고, 쓸 때는 자기 문장을 책임진다. 작가라는 이름이 어느 쪽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동사와 부사, 수동태와 대화, 리듬. 조언은 구체적이다. 문장이 서거나 무너지는 데 관여하는 작은 도구들을 살핀다. 부사를 한 번 쓰면 탈락이라는 법규가 아니다. 내가 놓은 말이 무슨 일을 하는지 보라는 것이다.

기술 밑에는 더 단순한 태도가 있다. 하는 일을 너무 신성하게 만들어서 정작 못 하게 되지는 말자. 해보고, 부족한 곳으로 돌아가자.

이 태도는 앞서 만난 인물들을 조금 다른 빛에서 보게 한다. 가르치는 히파티아, 《신학대전》을 쓰는 토마스, 체계와 씨름하는 셸링, 목소리를 듣는 릴케. 역사는 그들의 작업을 위대한 것으로 놓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자기 일을 같은 방식으로 대했던 것은 아니다. 토마스는 지푸라기라고 했고, 릴케는 시가 자신을 통해 오는 것처럼 느꼈다.

킹은 대중소설이라는 서가에서 온다. 공포물, 베스트셀러. 어떤 이들에게는 그 말만으로 문학적 논의를 끝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판매액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잘 팔리는 것에 대한 경멸도 결정하지 않는다.

2003년, 전미도서재단은 미국 문학에 대한 공헌을 기리는 메달을 그에게 수여했다. 찬성도 강한 반대도 있었다. 해럴드 블룸의 비판은 그 논쟁에서 크게 울린 목소리 가운데 하나였다.

수상식에서 킹은 아무 말도 듣지 않은 척하지 않았다. 태비사에게 감사를 전했고, 대중작가와 독자들을 위해 말했으며, 문단의 편견에도 도전했다. 서로의 서가에 이름표를 붙여 경멸하는 데서 끝나지 말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자고 했다.

논쟁은 계속되었다. 글쓰기도 계속되었다.

그의 소설을 평가하고 비판해도 된다. 성취도 있고 불균형과 장황함도 있다. 다만 분류표가 우리 대신 책을 읽어주지는 않는다. 연설 뒤에도 다음 문장은 써야 한다.

나이와 체력, 일정은 바뀐다. 예전에 적은 2,000단어가 평생 지켜야 할 계약서는 아니다. 남는 것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일이다. 읽고, 쓰고, 고친다.

위대하다는 칭호를 먼저 얻지 않아도 시작할 수 있다.

4. 메인주의 시골길

1999년 6월 19일, 메인주 서부의 도로. 쉰한 살의 킹이 자갈 깔린 길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브라이언 스미스가 운전하는 밴이 다가왔다. 운전자는 차 안의 개에게 정신이 팔렸고, 차는 진행 방향을 벗어났다.

충돌. 킹은 길 밖으로 튕겨 나가 크게 다쳤다.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 뒤의 삶을 구사일생이라는 한마디로 건너뛸 수는 없다.

다리와 골반, 가슴의 부상. 구조와 이송, 여러 차례 수술. 평범한 오후가 다른 사람의 치료와 돌봄에 기대어 버티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소명에 관한 멋진 대사를 하도록 준비된 장면이 아니다. 고통이 있고, 끊긴 기억이 있고, 몸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공포가 있다.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구급대원과 의료진이 맡는다.

몇 주간 입원한 뒤에도 회복은 오래 이어졌다. 이동하고 앉는 일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 늘 쓰던 책상과 의자가 있다고 곧바로 전처럼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7월, 사고 전부터 쓰던 On Writing으로 돌아가려 했다. 태비사가 글을 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도왔다. 통증과 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 번의 작업 시간이 건강하던 때의 하루와 같을 수 없었다.

어렵게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해 11월 독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재개가 힘들었다는 것, 체력도 쓰는 양도 전과 달라졌다는 것이 적혀 있다. 그러면서도 글쓰기에 관한 책을 마쳤고 새로운 이야기도 썼다고 알렸다.

삶이 끊긴 뒤, 당사자와 그를 돕는 사람들이 다시 시작할 자리를 함께 찾고 있다. 여기서 눈길이 멈추는 것은 그 모습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는 생산의 신화가 아니다.

책은 2000년에 출간되었다. 글쓰기라는 일을 말하는 책 안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몸의 조건이 들어왔다.

의지가 몸을 이긴 승리라고 말하면 쉽다. 하지만 몸은 물리쳐야 할 적이 아니다. 치료받고 쉬고 도움을 받으며, 그 몸으로 천천히 책상에 돌아간다.

돌아가지 못한 사람의 가치가 그래서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휴식과 도움 요청,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는 인간으로서의 실격이 아니다.

2026년이면 사고로부터 27년이다. 이후 쓴 책이 많다. 그 책들을 거꾸로 내밀며 사고가 필요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운전자에게는 사고의 책임이 있다. 그렇다고 그도 이야기의 부품으로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킹의 고통을 지우지 않고도 두 가지를 함께 말할 수 있다.

완벽한 용서 장면을 대신 꾸며줄 필요는 없다. 책상에 돌아온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실제 도움과 제한된 체력 안에서 원하던 일로 가는 길을 찾았다는 점이다. 모든 분노가 사라졌거나 모든 상처가 아물었다는 뜻은 아니다.

계속한다.

달라진 삶 안에서, 다음에 할 수 있는 하나를 찾는다.

5. 보통 사람들

킹의 일을 이해하려면 누가 소설 안으로 들어오는지 보면 된다.

자동차 정비공. 슈퍼마켓 계산원. 작은 마을의 의사. 술에 의존하는 아버지.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 전업주부. 은퇴한 경찰. 학교 청소원. 아이 돌보는 사람. 트럭 운전사. 호텔 직원. 우편배달부. 난방 장치를 수리하는 사람.

영웅과 작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등장한다. 하지만 믿기 어려운 사건 주위에도 알아볼 수 있는 하루가 있다. 임금과 피로, 농담과 수치심.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겠는 관계.

가난과 평범한 삶은 킹 이전에도 문학에 있었다. 그가 특히 잘 아는 것은 그 안쪽의 목소리다. 세탁소와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 가게에서 오가는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순간. 경험이 소설의 인물이 되면 계층을 증명하는 표본으로 남지 않는다.

세 작품을 보자.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은 1982년 Different Seasons에 실린 중편이다. 억울하게 갇힌 앤디 듀프레인은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다. 작은 지질학용 망치와 벽,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긴 인내. 거대한 제도 앞에서 보잘것없어 보이는 도구가 탈출의 가능성을 연다.

독자가 보는 것은 영리한 계획만이 아니다. 감방을 자기 세계의 전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시간이다.

이야기는 다른 수감자 레드가 들려준다. 그는 감옥을 너무 잘 알아서 희망을 쉽게 믿지 않는다. 앤디를 이야기하면서 자기 미래도 바뀐다. 여기서 죽는 것 말고 다른 가능성이 생긴다.

우정이 쇠창살을 환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쇠창살이 그 두 사람에 관해 마지막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뿐이다. 초자연적 요소가 없는 이야기다. 사회가 벽 너머로 밀어놓은 두 사람이 서로를 통해 다른 미래를 본다.

《그린 마일》은 1996년 여섯 권으로 나누어 출간되었다. 늙은 폴 에지컴이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사형수 구역에서 일하던 시절을 회고한다.

존 코피가 들어온다. 덩치가 크고 어둠을 무서워하는 흑인 남자. 두 여자아이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는다. 폴은 그가 무죄라는 사실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떠안고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알아간다.

그래도 사형은 집행된다.

폴은 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그 절차에 참여한다. 이후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날을 놓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폴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과 명령을 따른 것이 옳았다고 말하는 일은 다르다. 무고한 사람이 죽었다. 후회가 그를 돌려주지 않는다. 집행하는 사람에게 내면이 있다는 사실은 면죄부가 아니다.

1986년의 《그것》에는 일곱 아이가 있다. 말더듬, 체형, 피부색, 가정폭력,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 어른들이 심어놓은 공포. 괴물을 만나기 전부터 저마다 상처받기 쉬운 자리를 가지고 있다. 마을은 충분히 지켜주지 않는다.

서로 만나 데리를 위협하는 것에 맞서고, 자라서 떠나고, 달라진다. 약 27년 뒤 어린 시절의 약속이 다시 불러들인다. 돌아오는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어른이 되었다고 어린 시절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겉에 있는 것은 공포다. 그 아래에는 우정의 무게가 있다. 골칫거리로 취급받던 아이들이 서로를 사람으로 발견한다.

많은 작품에서 이 방향이 되풀이된다.

술에 의존하는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라는 단어만이 아니다. 과거와 아픔, 애착이 있다. 동시에 누군가를 해치면 책임을 진다. 계산원은 시급의 숫자가 아니다. 구체적인 피로와 계획, 우리가 아직 모르는 바람이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배경일 필요가 없다. 독자는 그 사람에게 조금 더 머무를 수 있다.

테네시주의 트럭 운전사가 책을 열어 주변에서 본 듯한 사람을 만난다고 상상해보자. 오하이오주의 계산원이 자신도 아는 상황을 여주인공에게서 발견한다.

읽기 쉽다는 것이 모든 독자가 모든 인물을 이해한다는 보장은 아니다. 다만 만남의 문을 넓힌다. 무서운 이야기를 보려고 책장을 넘기던 사람이, 평소라면 지나쳤을 누군가를 오래 기억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철학책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금세 읽히고도 쉽게 잊히지 않는 소설 안에서도 일어난다.

6. 살아서 쓰고 있다

2026년 9월. 킹은 일흔아홉 살이 되었다.

태비사와 결혼한 것은 1971년이다. 세 아이는 오래전에 자랐다. 두 아들 조 힐과 오언 킹도 각자의 책을 쓴다.

그 자신도 계속 쓴다. 2023년에는 Holly, 2024년에는 단편집 You Like It Darker가 나왔다. 노년은 이미 다 써놓은 후일담이 아니다. 새 책은 독자가 그를 보는 방식을 다시 바꾼다.

작품 밖에서는 정치적 견해도 공개적으로 말한다. 동의해도 되고, 반대해도 되고, 구체적인 발언을 비판해도 된다. 소설을 좋아한다고 그의 모든 말을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은 계속된다. 책에서 위안을 얻은 사람이 있다. 곁의 누군가를 다시 본 사람도 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살아 있다.

이 연작에서 말해온, 한 삶이 다른 삶에 남기는 작용도 닫히지 않았다. 유명해서가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앞선 글들은 주로 끝난 생애를 돌아봤다. 자료를 다시 확인하고 해석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당사자가 직접 다음 행동을 할 수는 없다.

킹에게는 그다음이 있다.

그러므로 완성된 삶처럼 쓸 수 없다. 다음 소설은 어떨까. 다음 발언은 어떤 논쟁을 만들까. 눈앞의 사람에게 어떻게 응답할까.

우리는 모른다. 그 자신도 앞으로의 선택을 전부 알지 못한다.

쓰고 말하고 답할 때마다 새로운 선택이 생긴다. 정리해놓은 이력과 지금 사는 사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선택은 영향을 바꾼다. 어느 하나도 그 사람의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

영향이 죽은 뒤에야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미 그는 쓰고 독자는 응답한다. 언젠가 본인이 직접 행동하지 못하게 된 뒤에도 누군가 책을 이어받을 수 있다. 두 시간은 벌써 겹쳐 있다.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잊히는 책도 있고, 오랜 뒤에 다시 열리는 책도 있다.

만들어진 틀로 사람과 세계를 끝까지 닫아버릴 수는 없다. 이 연작이 줄곧 생각해온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가 미래 독자들의 투표를 기다려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다 볼 수 없기에 판매량이나 평판, 요약표로 줄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7. 다리에 오르지 않는다

스티븐 킹은 다리에 오르지 않는다.

아직 충분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인격 자격시험이 아니다. 작품의 중요성을 통행증으로 바꾸는 곳도 아니다.

이 연작의 질문 밖에 있다는 뜻도 아니다. 그는 계속 그 안에 있다.

다만 아직 살아 있다.

이 다리는 연작의 문학적 장치다. 끝난 삶들을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하고, 아직 써내려가는 삶은 잠시 다리 밖에 남겨둔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 관한 철학적 정리는 아니다.

히파티아의 천문 관측기, 토마스의 빈손, 베르그송의 늙은 몸. 하나의 질문을 기억하게 하는 장면이지, 그 사람을 빠짐없이 그려낸 초상화는 아니다.

죽은 사람은 자기 손으로 새 행동을 더하지 못한다. 그래도 새 자료가 나오고, 기존 설명이 의심받고, 듣지 않았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면 판단은 달라진다. 죽었다고 우리가 다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킹 앞에는 새 책과 인터뷰, 아직 모르는 행동이 있다. 산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있고, 끝난 생애에도 우리가 보지 못한 부분이 있다. 둘 다 독자에게 조금의 빈칸을 요구한다.

다리는 사후의 상벌 명단이 아니다. 기억과 상상의 장소다. 서로 다른 삶의 어떤 행동들이 비추어주며 판단도 계속된다.

킹에게는 마지막 자세를 지금 정해주지 않는다. 아직 쓰고 있으니 결말을 비워둔다. 작품 평가와는 다른 일이다.

지라르 편에서 만난 피터 틸에게도 같은 구분이 필요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구체적인 선택과 권력 사용은 지금 판단해도 된다. 그것을 그의 미래까지 대신 살아버린 총체적 판결로 넓힐 필요는 없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면책이 아니다.

유명한 사람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아무것도 출판하지 않고 이름을 아는 이가 없는 사람에게도,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아직 쓰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

누구에게 자리를 내어줄까. 어떻게 답하고 무엇을 거절할까. 독자도 계속 선택한다. 다른 삶에 남기는 작용에 다음 한 획이 더해진다.

물론 선택할 여지는 같지 않다. 질병과 가난, 의존과 권력에 의해 몹시 좁은 곳으로 몰린 사람도 있다. 좁을수록 다른 사람이 함께 열어줄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 해낼 수 없다고 사람의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독자는 방금 한 선택만이 아니다. 이 글이 내어준 역할만도 아니다. 초대를 받아들여도, 따져보아도, 거절해도 된다. 그것은 작가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킹과 독자는 그 점에서 같다. 둘 다 사람이다. 작품과 수입, 명성과 사회적 쓸모에 따라 그 자격에 등급이 붙지 않는다.

그를 마지막 인물로 삼은 것은 가장 위대해서가 아니다. 아직 쓰는 한 사람을 통해, 완성된 전기의 과거에서 오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펜을 놓는다. 하지만 원을 닫지는 않는다.

킹도, 미래의 독자도, 이 글을 한 번도 읽지 않을 수십억 명도 우리 책에 등장할 때를 기다리지 않고 살아간다.

자신과 타인을 다르게 대하려고 사후의 자리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다리 이쪽의 실제 만남에서 시작할 수 있다.

8. 다리 끝의 108번째 자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다리로 가자.

다리 가운데에는 이전 어느 밤보다 많은 사람이 있다.

히파티아가 있다. 손에 든 천문 관측기가 달빛을 반사한다. 반대편의 토마스는 빈손이다. 베르그송은 지팡이에 기대어 새로 오는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레비나스는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얼굴을 든다. 조금 멀리 선 부버의 옷이 바람에 움직인다. 조식은 두루마리를 든다. 거기에 쓴 글은 1,800년이 지나도 읽힌다.

지라르는 희생양에 관해 쓴 책을, 셸링은 인간의 자유에 관한 논고를 들고 있다. 에크하르트의 두 손은 비었다. 목소리는 이미 다른 이들에게 건네졌다. 릴케는 조금 고개를 기울여 듣는다. 노벨의 주머니에는 접힌 유언장 사본이 있다.

이름을 부른 열한 사람.

그러나 다리가 그 열한 사람의 것은 아니다. 여러 세대가 모여 있다. 방정식을 쓰고, 옥수수를 보고, 시를 짓고, 별자리를 읽고, 소설을 쓰고, 도면을 그린다.

쪼그려 앉아 메모하는 사람. 가만히 앉아 멍하니 있는 사람. 옆 사람과 작게 이야기하는 사람. 하늘을 보다가 다시 일로 돌아가는 사람.

달빛 아래 작은 도구가 작은 물건을 고친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차 한 잔을 건넨다. 고양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자기 옷의 주름을 편다. 수백 년 떨어진 사람들이 누구도 번역한 적 없는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사람들. 다 셀 수 없는 삶의 넓이.

서로 다른 생애를 나란히 놓으며 알아보려던 동작이 있다. 자신을 목적으로 대한다. 타인도 목적으로 대한다. 평생 무과실 증명서를 발급하는 장면은 아니다. 여전히 판단해야 할 잘못을 지우지 않고 어떤 방향을 보는 것이다.

다리 밖의 길에는 어두운 하늘과 번개가 있다. 걸어가는 그림자들이 보인다. 가장 멀리 간 사람들은 사라졌다. 교수 가운을 입은 하이데거도 거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갔다.

시선이 다리의 먼 끝으로 향한다.

그동안 거기에 칸트가 있다고 했다. 먼 곳을 보고 있다고 했다. 지난번보다 조금 더 선명해졌다고 했다.

이제 하나가 더 보인다.

칸트는 혼자가 아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 아는 이름도 모르는 이름도 있다. 이 연작에 나온 사람도, 나오지 않은 사람도 있다.

잘못 없는 집단이 아니다. 같은 학설의 대표단도 아니다. 어떤 실천을 골라 이곳에서 만나게 하는 것이다. 화면에 넣지 않은 나머지가 그래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코가 납작하고 머리가 벗어진 노인이 가까이 있다. 거친 그리스 옷에 맨발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친구는 탈출을 권하지만, 그는 그저 살아남으면 되는지를 묻는다. 자신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일로 부당함에 응답해도 되는가. 독배가 그 질문을 지우지는 못했다.

공자가 앉아 있다. 소매 넓은 어두운 옷에 오랜 여행과 좌절된 정치적 기대의 피로를 겹쳐본다. 그래도 제자와 이야기한다. 노나라로 돌아와 가르친다. 말들은 기록되고 편집되고 전해져, 그를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도착한다.

땅에 다리를 포개고 앉은, 황토빛 옷의 사람. 부처다. 불교 전승은 왕자의 생활을 떠나 여러 해 길을 찾고 고행한 끝에 보리수 아래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깨달음을 혼자만의 비밀로 두지 않고, 남은 생애에 걸쳐 괴로움을 마주하는 길을 가르쳤다.

조금 떨어져 염색하지 않은 옷을 입은 서른 남짓한 남자가 서 있다. 맨발이다. 손에는 기독교 도상에 남은 못 자국이 있다. 예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배제된 사람에게 다가간다. 빌라도 통치 아래 로마 권력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했다. 처형을 하나의 가르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말도 침묵당하지 않았다.

거칠고 기운 옷을 입고 허리에 줄을 두른 수도자가 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상인의 아들은 부를 떠났고 태양을 형제, 달을 자매라 불렀다. 새들에게 설교하고 늑대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전해졌다. 세상을 나에게 쓸모 있는 순서로만 놓지 않는 자세가 거기에 남는다.

칸트의 다른 쪽에는 간디가 있다. 마른 몸, 흰 천, 지팡이. 비폭력으로 식민 지배에 저항하고 종파 간 폭력에 위협받는 사람들을 위해 움직였다. 1948년 힌두 민족주의자 고드세에게 암살되었다. 그 결말이 그의 생애를 둘러싼 논쟁을 끝내지는 않는다. 타인을 지킨 행동을 지우지도 않는다.

곁에는 검은 양복에 넥타이를 맨 흑인 남자가 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 작가가 아니라 목사 킹이다. 미국 민권운동에서 상대를 비인간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지 않고 비폭력 투쟁을 이끌었다. 그는 암살되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이름 하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함께한 운동의 무게가 남는다.

작고 나이 든 여성이 파란 테두리의 흰 사리를 입고 있다. 테레사 수녀. 가난하고 쇠약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도 되는 물건으로 여기지 않고 몸을 숙인다. 본인과 기관을 둘러싼 논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그 동작 앞에 잠시 멈춘다.

그 밖에도 아주 많은 사람이 있다.

대부분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아이를 한 사람으로 돌본 어머니들. 학생을 빚어낼 재료로 여기지 않은 교사들. 구체적인 상황에서 누군가를 도구로만 대하지 않은 농민, 장인, 상인, 하인, 군인, 노동자, 간호사, 수녀, 승려, 어부들.

칸트 주위에 서 있다.

각자 자기 시대의 옷을 입고 도구를 쓰고 언어를 말한다. 같은 용어를 강요하지 않아도 서로 가까워지는 동작이 있다.

사람들이 칸트의 이름을 알고서야 처음 타인을 존중한 것은 아니다. 그 용어가 나오기 전에도 그런 시도는 있었다. 앞으로도 그를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 계속될 것이다.

1804년에 죽은 철학자의 정식은, 오늘 그 정식을 비추는 삶들의 소유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곁에 있다. 목적의 왕국에서도 그는 혼자가 아니다.

명성으로 자리 순서를 매기지 않는다. 유명인이 앞이고 이름 없는 사람이 뒤인 것도 아니다. 인간의 자격을 훈장처럼 나눠주는 곳이 아니다.

앞선 107편에 남은 일과 선택도 서로 비추고 있다. 가까이 가게 하는 것도 있고 경계하게 하는 것도 있다. 좋은 말 한마디로 전부 평평해지지 않는다.

다리 가운데와 먼 끝에 같은 달빛이 내린다. 밝음과 그림자는 사람의 등급이 아니라, 이 장면만으로 없애지 못하는 질문이다.

그 원 안에 빈자리가 하나 있다.

스티븐 킹에게 예약된 자리가 아니다. 108번째 전기에 주는 상도 아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며, 어느 시대에서 와서, 어떤 말을 할지 미리 정하지 않은 자리다.

그 동작을 위해 비워둔 곳이다.

초대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자신을 도구로만 대하지 않는다. 타인도 도구로만 대하지 않는다. 두 장의 자격증을 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두 일을 해보는 것이다.

거대한 업적이나 역사에 남을 이름, 출간한 책이 없어도 된다. 선포나 대관식, 누군가의 허락도 필요 없다.

자신을 포기하라는 요구 앞에서 가능한 만큼 알아차리고, 거절하고, 도움을 구한다. 당장 벗어나지 못해도 가치를 잃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 도우러 와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아플 때 먼저 듣고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다. 내 옳은 말로 그의 경험을 덮지 않는다. 존중한다는 말을 핑계로 줄 수 있는 도움마저 거두지 않는다.

한순간일 때도 있다. 말을 자르지 않는 것. 아픔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오래 가는 지원이나 더 공정한 제도가 필요할 때도 있다. 듣는 일과 움직이는 일은 적이 아니다.

그때마다 빈자리가 조금 구체적이 된다. 위인을 하나 더 뽑는 것이 아니다. 눈앞의 사람에게 비로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킹은 쓰고 있다. 오늘 몇 단어 썼는지 몰라도 그 말은 이해할 수 있다. 책은 독자에게 건너가고 저자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의 가치는 미래 판매량이나 독자 수가 결정하지 않는다.

이미 이룬 일도 다음 선택을 보증하지 않는다. 부당하게 말하거나 누군가를 놓치거나 지위를 잘못 쓸 수 있다. 잘못하면 책임져야 한다.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여전히 사람이다.

우리도 같다.

여기까지 쓰고 읽었다. 다음 대화를 이 글이 대신 해주지는 않는다. 오늘은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내일은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그 뒤에도 다시 응답해야 한다.

한 번의 좋은 만남으로 양쪽의 남은 평생을 보증할 수 없다. 그래서 내일도 다시 듣고 보고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

108번째 자리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한순간에 누군가 구체적으로 만들 수 있지만, 영구 면죄부를 얻은 듯 눌러앉을 수는 없다.

자리는 옮겨간다. 가능성은 남는다.

다리는 여기서 두 뜻을 가진다. 죽은 이들은 이야기 안에서 모습을 얻는다. 살아 있는 사람은 그 모습이 가리키는 일을 지금 해볼 수 있다. 죽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칸트를 둘러싼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예수, 프란치스코, 간디, 마틴 루서 킹, 테레사 수녀와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다. 입장을 심사하는 법정을 만들지 않는다.

그저 거기 있다. 기억하고 다시 묻게 되는 행동들이 빈자리를, 정의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사람을 도구로 줄이는 길의 폭풍은 아직 그치지 않았다.

다리 가운데에는 많은 사람이 있고 달빛은 온화하다. 칸트가 있는 끝에도 많은 사람이 있고 바람은 온화하다.

이번에 칸트는 우리가 이름 부른 누군가를 보는 것이 아니다.

먼 곳을 본다. 기다린다.

다음에 걸어오기로 결정할 사람을. 킹일 수도, 독자일 수도, 내일 태어날 누군가일 수도 있다. 작은 만남의 한순간에 자신과 상대를 소품으로 대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그다음 순간에는 떠날 수도 있다. 남을 수도 있다.

칸트는 재촉하지 않는다. 눈길은 온화하다. 바람도 온화하다.

108번째 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다.

—인류가 함께 만드는 세계, 108편의 맺음—

읽기 안내와 출처

생애와 날짜는 작가 공식 사이트를 따른다. 《캐리》는 1973년 출판이 결정되어 1974년 나왔고, 《그린 마일》은 1996년 여섯 권으로 출간되었다. 작품 설명은 소설에 관한 것으로 영상화의 세부와 구별한다. 나이는 2026년 9월 21일 이후 기준이다.

2,000단어는 On Writing에서 설명한 집필 목표이지 현재 매일 쓰는 양의 증거가 아니다. 사고와 회복은 본인의 회고 및 1999년 11월 2일 메시지를 참고했다. 일을 재개할 수 있는지가 다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도입부의 생활 장면과 다리 위 군상에는 문학적 상상이 포함된다. 옷차림과 동작은 실제 만남의 기록이 아니다. 서로 다른 전통과 삶에서 고른 실천을 비추는 장면이며, 학설을 같게 만들거나 생애 전체를 면책하거나 인간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Stephen King: official biography · Carrie: official work page · The Green Mile: original serial and collected editions · Stephen King: message of November 2, 1999 · Stephen King: On Impact, first-person account · Stephen King accepts the 2003 medal: National Book Foundation transcript · Never Flinch: official work page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