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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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 108 · 세계가 사람을 되빚을 때

칭기즈 칸, 말발굽이 지나간 뒤

정복을 조직할 수는 있었다. 그 뒤에 생겨날 모든 결과까지 명령에 복종시킬 수는 없었다.

1. 그 이름을 얻기 전에

처음부터 칭기즈 칸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테무진이었다.

태어난 해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보통 1162년 무렵, 오논강 유역으로 본다. 『몽골비사』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에는 훗날 지도에 넓게 칠해질 제국의 빛깔이 없다. 아버지 예수게이가 독살되고, 따르던 사람들이 가족을 떠난다. 어머니 호엘룬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고 애쓴다.

우리가 읽는 것은 뒤에 기록된 이야기다. 직접 천막 앞에서 본 풍경은 아니다. 그래도 편안하게 넘길 수 없는 장면이 있다. 테무진은 동생 카사르와 함께 이복형 벡테르를 죽인다. 물고기와 사냥감을 둘러싼 다툼도 있었고, 집안의 힘겨루기도 얽혀 있었다. 굶주린 아이가 물고기 한 마리를 지키려 어쩔 수 없이 죽였다는 설명은 이미 변명에 가깝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꾸짖는다. 그 분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미래의 지배자를 다루는 이야기조차 어린 시절의 폭력을 모두 천재성의 징조로 바꾸지는 않는다.

두보를 떠올리면 젊은 시인의 포부가, 이백을 떠올리면 쉽게 분류되지 않는 출신이 먼저 온다. 테무진 앞에서는 보호를 잃은 가족을 만난다. 그 가족 안에서 다시 목숨 하나가 사라진다. 상처받은 경험은 한 사람을 이해하는 단서다. 그가 앞으로 줄 상처를 미리 용서하는 증서는 아니다.

2. 충성을 조직한다는 것

그의 성장은 말 그대로 무에서 시작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지위와 옛 인연, 혼인과 동맹, 그를 따르기로 한 사람들의 결정이 모두 작용했다. 보르테, 토그릴, 자무카는 고독한 천재 옆에 붙여 놓는 조연 이름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1206년의 집회도 없었을 것이다.

테무진은 물려받은 관계를 조금씩 재편했다. 혈연과 부족만이 출세의 길은 아니게 되었다. 능력과 충성으로 중요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 정복된 집단은 나뉘어 새로운 군사 단위에 편입되었다. 옛 지도자에게서 떼어 낸 사람들은 새 지도자에게 더 단단히 묶였다.

용맹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누가 누구의 명령을 따를지, 전리품은 어떻게 나눌지, 위급할 때 누가 돌아와 도울지. 순간의 열기보다 오래가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혈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권력의 중심에는 여전히 지배자 자신의 가문이 있었다.

1206년, 초원의 유력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정확한 어원은 논쟁 중이다. 우리가 ‘우주의 지배자’라는 단정적인 번역으로 그에게 다시 왕관을 씌울 필요는 없다.

버려진 아이에서 수많은 사람을 지키는 자가 되기까지, 엄청난 거리를 왔다. 하지만 보호의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새 질서는 올라갈 기회를 주는 동시에 복종을 요구했다. 천막과 말이 늘어난다고 해서 명령을 거절할 자리까지 함께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3. 성문 앞에서

1209년 서하가 복속했고, 1211년 금나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다. 1219년에는 호라즘 제국을 침공했다. 칭기즈 칸 자신이 유라시아 전체를 정복한 것은 아니다. 동유럽으로의 대확장과 중국 남부의 최종 정복은 후대의 일이다.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이미 재앙을 겪고 있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트가 함락되고 메르브와 니샤푸르에서는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아들들과 장수들이 각각 작전을 수행했다. 도시마다 겪은 일은 같지 않았지만 공포는 도시들을 잇는 길로 퍼져 갔다.

중세 연대기에 실린 엄청난 사망자 수를 정확한 통계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숫자의 불확실성이 파괴까지 허구로 만들지는 않는다. 장인은 골라서 이주시킬 수 있었고, 다른 주민은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거나 흩어졌다. 한 사람 앞에서 먼저 묻는 것은 종종 정복자에게 쓸모가 남아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학살은 다음 도시로 보내는 소식이기도 했다. 성을 지키는 사람은 눈앞의 기병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들려온 이야기와도 맞서야 했다. 공포가 효과를 내는 과정을 설명하는 일은 공포를 사용할 권리를 인정하는 일이 아니다.

성문이 열리고 지도의 색이 바뀐다. 성 안의 사람에게 급한 문제는 누가 또 위업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다. 오늘 밤 집에 몇 명이나 남아 있을 것인가. 정복의 거대함 옆에서 이 작은 척도를 치워서는 안 된다.

4. 부수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나폴레옹에게서는 민법전을, 진시황에게서는 행정과 공통 규격을 떠올린다. 그러면 칭기즈 칸에게 반대 역할을 주고 싶어진다. 그는 부순 뒤 떠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틀에 넣으면 역사적 사실이 너무 많이 빠져나간다.

위구르 문자를 받아들여 몽골어로 명령을 기록할 수 있게 했다. 군대의 편제, 전리품의 배분, 세금과 징발에는 조직이 필요하다. 현지 관리를 쓰는 것은 통치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통치 방식이다. 감독자를 남겨 두었다는 사실도 주민이 마음대로 살게 했다는 뜻은 아니다.

야사라는 이름이 완전한 모습으로 전해지는 몽골 법전 한 권을 우리 손에 쥐여 주지는 않는다. 사료에는 명령과 규칙, 관습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통일된 성문 법전이 있었는지는 논쟁 중이다. 그렇다고 1804년 프랑스 민법전과 다르다는 이유로 제도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는 보통 모든 피정복민에게 같은 신앙을 요구하지 않았다. 종교인은 특혜를 받을 수 있었고 기도, 지식, 위신을 통치에 제공하기도 했다. 1222년 도사 구처기가 먼 길을 와 그를 만났다. 제자가 남긴 기록에서 도사는 불사약 대신 삶을 보전하는 방법을 말한다. 권력은 노인을 불러올 수 있다. 불멸까지 불러오지는 못한다.

개종을 강제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차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종교의 자유나 제국의 지배를 거부할 권리와 같지는 않다. 칭기즈 칸은 실제로 무언가를 세웠다. 그 안에서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가 문제다.

5. 상속은 미래의 원격 조종이 아니다

칭기즈 칸은 생전에 아들들에게 사람과 군대와 목초지를 나누어 주고, 오고타이를 대칸의 후계자로 정했다. 가문의 통치를 준비한 것이다. 제국이 쪼개지는 편이 좋다고 선언하거나 최고 권위를 포기한 일이 아니다.

주치의 계통은 서쪽으로, 차가타이의 계통은 중앙아시아로 뻗었다. 오고타이는 최고 지위를 계승했고 툴루이의 계통은 본거지의 중요한 자원을 보유했다. 주치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으며, 서방의 확장에는 바투를 비롯한 후손들의 이야기도 들어간다. 집안의 몫이 곧 움직이지 않는 네 개의 국경선은 아니었다.

나중의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 원나라를 네 아들에게 건넨 완제품으로 볼 수는 없다. 일 칸국의 기반을 세운 것은 손자 훌라구였고 원나라를 세운 것도 손자 쿠빌라이였다. 13세기 중반 이후 계승 다툼과 전쟁이 제국을 분열로 이끌었다.

자기 해체를 예상한 천재적인 설계가 실현된 것이 아니다. 설계가 닿지 못하는 곳이 드러난 것이다. 후계자에게는 자기 동맹, 이해관계, 야심이 있다. 사람을 어느 자리에 배치한다고 해서 앞으로 내릴 모든 선택까지 배치할 수는 없다.

진나라, 알렉산드로스, 나폴레옹의 결말도 서로 달라 정연한 붕괴 목록으로 묶기 어렵다. 공통된 어려움은 더 소박하다. 지금의 권력을 나눌 수는 있어도, 앞으로 살아갈 모든 사람 대신 결정을 끝낼 수는 없다.

6. 길은 무엇을 나르는가

그가 죽은 뒤에도 정복은 이어졌다. 1258년 훌라구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그곳의 아바스 칼리프 통치를 끝냈다. 1227년 이전에 끝난 일이 아니며, 바그다드가 영원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파괴된 도시에도 이후의 삶이 있다. 재건되었다는 사실이 파괴의 무게를 줄이지는 않는다.

몽골의 지배는 유라시아의 왕래를 활발하게 만들기도 했다. 후계자들은 역참 체계를 더 정비했고 관리와 사절은 말을 갈아타며 소식을 전했다. 상인과 장인과 여행자가 오갔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은 유럽 독자에게 쿠빌라이의 궁정을 전했다.

그전에는 길이 없었던 것도, 이후에는 길이 완전히 안전해진 것도 아니다. 역참은 우선 통치를 위한 시설이었다. 주민은 말과 식량과 노동을 공급해야 했다. 지도 위의 편리한 한 줄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회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부담이었다.

14세기의 흑사병은 연결이 원하지 않는 것까지 운반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교역과 사람의 이동은 감염 확산에 관여했다. 그러나 경로와 기제를 ‘몽골이 비단길을 열어서 유럽에 페스트가 왔다’는 한 문장으로 끝낼 수는 없다. 한 세기 뒤의 재앙을 한 사람의 오래된 명령이 실행된 결과로만 적을 수도 없다.

거래와 지식, 질병과 징발이 겹치는 길을 지난다. 감염의 확산과 사람이 저지르는 학살에는 같은 종류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파괴 뒤에 저절로 좋은 것이 자란다는 뜻도 아니다. 삶을 다시 꾸린 것은 뒤에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 노동으로 앞선 살육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7. 남았다고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진시황, 알렉산드로스, 나폴레옹, 칭기즈 칸은 서로 다른 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제도를 많이 세울수록 후세를 더 잘 통제한다는 척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네 사람 모두 권력을 조직했다. 누구도 이후의 세계를 혼자 만들지는 않았다.

진의 제도는 후대에 수정되었고, 여러 민족이 헬레니즘 세계를 만들었으며, 프랑스 민법도 계속 바뀌었다. 몽골의 후계 국가들은 정치와 언어와 신앙에서 다른 길로 갔다. 계승은 창시자를 유리 진열장에 보관하는 일이 아니다.

유용한 제도와 잔혹한 통치는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저항하기 어려워 오래 남는 제도도 있다. 오래감, 넓음, 효율성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칭기즈 칸의 조직 능력이 피해자를 지우지는 못한다. 피해자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 능력까지 없었던 척할 필요도 없다. 둘을 함께 바라보는 편이 ‘영웅’ 또는 ‘순수한 파괴자’라는 이름 하나를 택하는 것보다 어렵다.

많은 지역을 복종시킬 수 있었다고 해서 그곳의 모든 삶을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정복의 공적은 남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 대신 판정할 자격이 아니다.

8. 찾지 못한 무덤

1227년, 서하를 공격하던 중 그가 죽었다. 흔히 쓰는 출생 연도를 따르면 예순다섯 살쯤이다. 사망 원인은 기록마다 다르고, 무덤의 위치도 널리 인정받는 확인에 이르지 못했다.

비밀 장례와 이동 중 만난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한다. 반복된다고 해서 세부가 검증된 목격담이 되지는 않는다. 모르는 곳을 가장 끔찍한 전설로 채울 필요는 없다.

진시황의 능역은 알려져 있고 나폴레옹의 관은 파리에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정확한 묘소도 잃어버렸다. 확인할 무덤이 없는 일은 칭기즈 칸만의 것이 아니다. 묘소의 실종은 삶의 흔적이 영으로 돌아간다는 뜻도 아니다.

전설 속에서 떠나는 노자나 집착을 묻는 혜능을 떠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불교의 공은 사람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무덤을 못 찾는다고 그 삶의 결과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말 한 마리는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다. 밟고 간 땅을 원래대로 돌릴 수는 없다. 시신이 어디에 있는가와 책임이 어디에 남는가는 다른 질문이다.

9. 말발굽이 지나간 뒤

이 연작의 상상 속 다리로 칭기즈 칸이 말을 타고 지나가게 해 보자. 진시황과 워싱턴이 가까이 서 있고, 나폴레옹은 여전히 세인트헬레나의 바람을 마주한다. 말발굽 소리가 울린다. 먼지가 몇몇 얼굴을 가린다.

말 탄 사람 앞에는 또 하나의 길이 있다. 그에게는 목적과 명령이 있고, 명령을 중심으로 세운 질서도 있다. 그 질서는 뒤로도 뻗어 간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다 덮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말을 끝까지 따라가지 말자.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보자. 곁에는 이주당한 장인, 역참에 물자를 대는 목축민, 가족이 돌아오지 않은 아이가 있다. 여기서는 상상한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나타내는 삶은 유명한 인생의 배경에 불과하지 않다.

소크라테스의 질문, 공자의 인, 뉴턴의 이론, 바흐의 음악, 두보의 시를 성을 함락하는 기병과 하나의 추상적 몸짓으로 합칠 수 없다. 굳어진 답을 열어 보는 일과 남의 집을 파괴하는 일은 같은 이름을 붙여도 다른 행위다.

칭기즈 칸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너무 많이 남겨서 자기 설계로 모든 결과를 다시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죽은 뒤에도 다른 사람들이 감당하고 바꾸고 저항했다.

말 탄 사람은 멀어졌다. 우리는 아직 다리 위에 있다. 이제 먼지에 가려졌던 사람들을 볼 차례다.

읽기 안내와 출처

수정한 중국어 원문 아홉 절의 이야기와 논지를 모두 담아 한국어로 다시 썼다. 학살 인원, 야사의 성문 형태, 장례 전설은 확정된 세부로 제시하지 않았다. 마지막 다리 장면은 문학적 상상이다.

『몽골비사』, 클리브스 영어 번역 · 이란 백과사전: 몽골인 · 컬럼비아 대학교: 칭기즈 칸의 네 가지 유산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칭기즈 칸의 유산 · 워싱턴 대학교: 『장춘진인서유기』 영어 발췌 번역 · OpenStax: 동쪽에서 서쪽으로 퍼진 흑사병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