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 108 · 세계가 사람을 되빚을 때
나폴레옹, 말 위의 세계정신
예나의 기수에서 세인트헬레나의 유배자까지. 법전은 남는다. 그것을 바꿀 권리도 후대의 사람들에게 남는다.
1. 말 위의 세계정신
1806년 10월 13일, 예나. 헤겔은 정찰을 나가는 나폴레옹의 기마 모습을 보았다. 『정신현상학』이 완성에 가까워지던 무렵, 철학자가 사는 도시까지 전쟁이 찾아왔다.
친구 니트하머에게 보낸 편지에서 헤겔은 황제를 ‘세계의 영혼’이라고 불렀다. 한 지점에 모인 한 사람이 온 세계로 손을 뻗는 듯했다. 말 위의 세계정신. 이 장면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
멀리서 보면 그런 마음이 이해된다. 나폴레옹은 혁명이 뒤흔든 군대와 행정, 법을 다시 조직하고 있었다. 사상은 더 이상 책 속에서만 논쟁하지 않았다. 명령이 되고, 사람들이 내일부터 따라야 할 규칙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 편지가 역사의 정지를 선언한 것은 아니다. 절대정신을 황제의 영토와 바로 동일시할 수도 없다. 오히려 저 장면이 우리를 유혹한다. 복잡하기만 하던 역사에 마침내 얼굴 하나, 고삐를 쥔 손 하나가 생긴 것 같다.
그 기수를 바라볼 때, 말발굽이 일으킨 먼지에 가려진 사람들도 여전히 보이는가.
2. 혁명의 아들
나폴레옹은 1769년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전해에 제노바가 섬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에 넘겼고, 프랑스는 무력으로 지배를 확립했다. 그가 태어난 땅은 막 새로운 통치자를 맞은 참이었다.
그의 집안은 코르시카의 소귀족이었다. 프랑스가 아버지의 귀족 신분을 인정한 일은 아들의 군사 교육에 도움이 되었다. 출생의 혜택이 전혀 없는 소년은 아니었다. 다만 코르시카의 소귀족과 파리의 권력 중심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프랑스어에는 억양이 남았고, 젊은 시절의 소속감도 코르시카와 프랑스 사이에서 흔들렸다.
레오나르도의 혼외 출생이나 한 칸에 넣기 어려운 이백의 출신을 떠올릴 수 있다. 닮은 것은 분류의 가장자리에서 생기는 긴장이지, 세 사람이 같은 운명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나폴레옹이 배운 것은 포병의 기술이었다. 수학, 거리, 지형. 포탄이 어디에 떨어질지는 여기에 달렸다. 나라를 조직하기 전에, 힘을 자신이 원하는 지점에 정확하게 도달시키는 법부터 익혔다.
그러다 혁명이 일어났다. 1789년 특권이 공격받고 인권선언이 나왔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1793년이었다. 몇 달 만에 옛 세계가 말끔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변화가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고, 피가 계속 흘렀다.
나폴레옹이 혁명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혁명과 전쟁이 연 길을 붙잡았다. 오래된 승진 질서가 느슨해졌고 군대는 유능한 지휘관을 필요로 했다. 혁명이 없었다면 어느 계급에서 멈췄을지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이 속도의 상승을 그 격변 없이 상상하기는 어렵다.
1793년 툴롱 탈환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1796년 이탈리아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명성을 키운다. 1798년 이집트 원정에는 군인만 아니라 여러 학자와 과학자도 함께 간다.
원정은 군사적으로 실패했지만 학문에는 복잡한 유산을 남겼다. 프랑스군이 로제타석을 발견한 것은 1799년이다. 돌은 프랑스군이 항복한 뒤 영국 측에 넘어갔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가져온 전리품이 아니다. 지식이 새로운 자료를 얻었다고 해서 정복과 반출까지 무고해지는 것은 아니다.
1799년 브뤼메르 쿠데타로 그는 제1통령이 된다. 서른 살. 포병 장교가 프랑스 권력의 중심에 섰다.
혁명은 벽에 구멍을 냈다. 그는 그 구멍을 통과해 자기 집을 짓기 시작했다.
3. 법전
1804년 프랑스 민법전이 공포된다. 훗날 세계 곳곳에서 나폴레옹 법전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질 책이다.
두 사람이 계약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누구의 조상에게 작위가 있었느냐가 아니다. 각자가 무엇을 약속하고 무엇을 책임지는지, 다투게 되면 어디서 해결할 수 있는지다. 공통의 법전은 이런 일상의 관계에 함께 디딜 바닥을 마련한다.
법전은 혁명이 일으킨 중요한 변화를 정리하고 굳혔다. 봉건적 신분 특권에서 벗어나 재산을 보호하고, 계약과 시민의 법적 지위에 통일된 틀을 세웠다. 서로 다른 관습법에 가로막혔던 지역들이 같은 규칙을 참조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실제 제도를 만드는 일이었다. 통치자의 선전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법전 안에 들어온 아내는 남편과 동등한 자리를 받지 못했다. 가족 내부의 복종이 규칙으로 남아 있었다. 식민지로 눈을 돌리면, 1802년 노예제를 유지하거나 되살린 정책이 보편적 평등의 약속을 더욱 직접적으로 찢었다.
민사상의 혼인도 현대적 정교분리와 같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교황과 맺은 협약으로 교회를 새로운 국가 질서 안에 편입했다. 그는 혁명의 상속자였지만, 물려받은 것을 선택하고 제한하며 어떤 것은 거꾸로 돌리는 상속자였다.
법전은 프랑스 세력과 함께 벨기에, 라인 지역, 이탈리아 등으로 퍼졌다. 도입 방식과 지속 기간은 달랐다. 제국이 물러난 뒤에도 남긴 곳이 있었고, 고치거나 폐지한 곳도 있었다. 군대가 들어간다고 그 사회 전체가 똑같이 복제되지는 않았다.
진시황의 행정, 도량형, 문자 통일을 생각하면 비슷한 야심이 보인다. 넓은 땅이 공통의 기준으로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제도를 혼자 발명하지 않았다. 법전에는 법학자들의 작업, 혁명기의 개혁, 오랜 법 전통도 흘러들어 있다.
제국은 무너져도 어떤 규칙은 남는다. 강력한 창설자에게서 떨어져 후대의 일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눈여겨볼 일이지만, 창설자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 주는 일은 아니다.
오늘날 프랑스 민법도 이 법전을 중요한 토대로 삼는다. 그렇다고 1804년의 모든 조항을 그대로 보존한 것은 아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삭제하고 수정하고 권리를 넓혔다. 법전이 살아 있는 까닭에는, 사람들이 고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도 있다.
4. 왕관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교황 비오 7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폴레옹이 자기 머리에 왕관을 올렸다.
놀란 교황에게서 갑자기 왕관을 낚아챈 장면은 아니었다. 의식은 미리 협의되어 있었다. 준비된 일이었기에 그 몸짓은 더 선명하다. 황제의 권력은 축성을 원하되, 교회가 베풀어 준 권력으로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혁명은 왕의 목을 베었다. 혁명으로 올라선 사람이 이제 자신과 가족을 위한 황위를 만든다. 이름은 달라졌지만,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모으는 움직임이 다시 나타났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소식에 분노했다는 이야기는 주로 페르디난트 리스의 훗날 회고를 통해 전해진다. 남아 있는 악보 표지에는 보나파르트의 이름을 세게 지운 흔적과 손상된 종이가 있다. 한 장 전체를 찢는 소리를 더할 필요는 없다. 상처는 이미 보인다.
워싱턴에게서는 다른 선택이 보인다. 승리한 뒤 군 지휘권을 돌려주고, 나중에는 대통령직에서도 물러났다. 노예제와 배제가 남아 있었으니 완벽한 자유의 그림은 아니다. 그래도 권력을 한 사람의 일생에 묶지 않고 넘길 수 있다는 차이는 구체적이다.
문제는 민법전에서 황제의 이름을 빠뜨렸다는 데 있지 않다. 민법전은 최고 정치권력을 제한하는 완전한 헌법이 아니다. 실제로 누가 그에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경찰과 검열부터 걱정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가. 그것이 질문이다.
법은 많은 관계를 예측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규칙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 이의 제기를 억누를 수 있다면, 종이 위의 평등만으로 종이 밖의 사람을 지킬 수 없다.
스스로 왕관을 쓰는 모습에는 능력과 위험이 함께 있다. 거대한 세계를 조직할 줄 아는 사람이, 그 세계가 자기 손을 벗어나는 것을 점점 견디지 못한다.
5. 모스크바
1812년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지역에서 모은 다국적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한다. 후속 부대까지 포함하면 전체 참가 병력을 약 60만 명으로 잡는 추산이 많다. 60만 명이 한꺼번에 모스크바까지 걸어갔다는 뜻은 아니다.
혹한보다 먼저 길이 군대를 소모시켰다. 질병, 굶주림, 낙오. 지도 위의 선은 땅 위에서 끝없이 걸어야 할 거리, 먹여야 할 말, 제때 도착하지 않는 빵이 되었다.
러시아군은 후퇴했지만 싸우기도 했다. 9월 7일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다. 나폴레옹은 전진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군을 없애지는 못했다. 그가 원한 정치적 결말도 얻지 못했다.
9월, 모스크바에 들어간다. 당시 정치적 수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으나 모스크바는 역사와 상징의 무게가 큰 도시였다. 주민 대부분이 떠난 뒤, 화재가 도시를 휩쓸었다. 불이 시작되고 번진 책임을 ‘러시아인들이 자기 수도를 태웠다’는 한 문장으로 끝낼 수는 없다.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은 지도가 약속하는 듯했던 것을 내주지 않았다.
차르는 강화를 요청하지 않았다.
10월,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떠난다. 퇴각에는 굶주림, 추위, 전투와 추격이 겹쳤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포로가 되었으며 누군가는 다시 부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 연표의 패배 한 줄은 길 위에서는 집에 돌아가지 못할 사람 하나하나였다.
카프카의 『성』이 멀리서 울린다. K는 마지막 승인을 쥔 것 같은 장소에 이르지 못한다. 나폴레옹은 목적지에 이르렀으나, 도시를 점령한다고 상대의 의지까지 넘겨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만났다. 독자의 비교이지 소설이 전쟁을 예언했다는 뜻은 아니다.
명령은 군대를 움직인다. 하지만 없는 식량을 생기게 하거나 거리를 줄이거나 적이 정해 놓은 각본대로 항복하도록 보장하지는 못한다. 고삐를 쥐었다고 세계가 그 손 하나만 남는 것은 아니었다.
6. 워털루
1814년 연합군이 파리에 들어온다. 나폴레옹은 퇴위하고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보내진다.
1815년 섬을 떠나 3월 프랑스로 돌아온다. 병사들이 다시 모이고 루이 18세가 달아난다. 끝난 것 같던 이야기에 갑자기 한 페이지가 더 열린다.
백일천하. 그 이름에는 후대가 세어 놓은 남은 시간이 이미 들어 있다.
6월 18일 워털루에서 웰링턴의 연합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그를 격파한다. 고독한 영웅 하나가 다른 영웅을 이긴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 부대, 여러 사람의 행동이 이번 복귀를 닫았다.
그다음은 남대서양의 화산섬 세인트헬레나였다. 엘바와는 달랐다. 이번에 유럽은 너무 멀었다.
1821년 5월 5일, 그는 그곳에서 쉰한 살로 죽었다. 당시 부검 기록은 진행된 위암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한다. 비소를 둘러싼 이야기를 이런 증거와 무게가 같은 가설처럼 나란히 놓아서는 안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서른두 살에 바빌론에서 죽었고, 후계자들은 제국을 다투었다. 나폴레옹은 마흔이 넘어서 제국을 잃고 뒤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시간표가 다르다. 고향에서 먼 죽음이라고 모두 같은 종류의 패배는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생애를 넘는 영향을 남겼다. 나폴레옹에게는 특히 후대가 사용하고 논쟁하고 고쳐 쓸 법전이 있었다. 하지만 법전 한 권으로 그의 생애를 논란 없는 순이익으로 결산할 수는 없다.
7.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진시황, 워싱턴, 알렉산드로스, 나폴레옹을 함께 놓으면 서로 다른 정치적 유산이 보인다. 행정과 기준, 헌정과 권력 이양, 정복 이후 뒤섞인 문화, 성문법과 국가 기구다.
네 위인이 설계도를 그리고 후대가 그대로 시공한 것은 아니다. 관료, 군인, 노동자, 법학자, 반대자들이 그 안에서 움직였다. 물려받는 사람, 저항하는 사람, 창설자가 인정하지 않았을 모습으로 바꾸는 사람이 있었다.
제도는 왜 오래가는가. 쓸모가 있어서일 수 있고, 대체하기 어려워서일 수도 있다. 강제력을 가진 사람들이 바꾸지 못하게 막는 경우도 있다. 오래 버텼다는 사실만으로 정당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개정된 민법전을 펼치면 이해하기 쉽다. 재산과 계약의 틀을 남기면서도 아내를 1804년의 자리에 묶어 두지 않을 수 있다. 제도가 살아남는 능력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제도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두보는 시를, 베토벤은 음악을, 사마천은 역사를 남겼다. 정치제도 역시 만든 사람의 생명을 넘어 남을 수 있다. 그렇다고 사람을 작품이나 법전이나 제국을 위한 일회용 그릇으로 불러도 되는 것은 아니다.
관계는 반대다. 제도는 그 안에서 사는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다. 사람을 해친다면, 그들의 반대를 없애야 할 고장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정복자는 죽는다. 남겨진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계속 판단한다.
8. 영웅과 폭군
다시 그 손상된 악보 표지를 보자. 베토벤은 보나파르트에게 희망을 걸었다. 황제 즉위는 그 형상을 갈라놓았다. 그렇다고 이후의 평가가 언제나 한 가지 색이었던 것은 아니다. 『영웅』의 ‘위대한 인물을 기리며’라는 말도 하나의 정치적 부고로 고정할 수 없다.
남겨 둘 만한 것은 같은 이름을 같은 방식으로 계속 부르지 않겠다는 동작이다. 한때 자유를 대표한다고 믿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이후 행동을 모두 변호할 의무는 없다. 작품은 희망을 맡겼던 사람을 떠날 수 있고, 듣는 사람도 오래된 영웅상을 거절할 수 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다시 헤겔 옆에 선다. 철학자가 역사의 완성을 증명했고 황제가 그 책대로 싸워서가 아니다. 둘은 독자인 우리 안에서 같은 유혹을 불러낸다. 내가 전체를 보았다고 믿으면, 남은 반대는 모두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비용이 되는가.
갈등을 이해하는 것은 희생자를 대신해 동의서에 서명하는 일이 아니다. 법을 조직한다고 무제한 정복의 허가가 생기지 않는다. 변증법적 사고도 군사적 능력도 자동으로 최종 판정권을 주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왕관을 쓰는 순간 모든 다른 선택지를 잃은 것이 아니다. 계속 정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 오히려 그의 선택을 면책한다. 승리를 거듭하면 물러서기가 더 어렵다. 어렵다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르다.
성공이 불안해지는 지점은 여기다. 여러 번 이기고 나면 다음 승리까지 세계가 자신에게 갚아야 할 몫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도구가 강하다고 상상한 종착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9. 화산암 위에서
이 연작이 상상하는 다리 어귀에 나폴레옹의 자리도 비워 두자. 다만 아직 그를 데려오지는 말자. 먼저 세인트헬레나에 장면을 멈춘다. 바위, 바닷바람, 보이지 않는 유럽. 세계의 영혼이라 불린 사람이 섬 하나에 갇혀 있다.
어느 날 실제로 그런 자세를 취했다고 확인된 장면은 아니다. 그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그려 보는 모습이다. 손에 고삐 없이, 명령을 받지 않는 바다 앞에 서 있다.
먼 대륙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결혼하고 상속받고 계약서에 서명하고 법정에 들어간다. 법전은 그들의 일상 안에 남아 있다. 누군가는 보호받고, 누군가는 불평등한 조항을 바꾸기 위해 싸운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원정길에, 전쟁이 지나간 마을에 남았다. 유명한 유배자의 외로움을 보게 되었다고 해서 기념비 하나 받지 못한 삶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국은 끝났지만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법전만도 왕관만도 아니다. 한 사람이 유익한 제도와 깊은 상처를 함께 남길 수 있다. 어느 한쪽으로 다른 쪽을 지울 수 없다.
다리 어귀에서 그는 헤겔, 베토벤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역사 그림에서 빠진 사람들에게도 말할 자리가 있어야 한다.
바람이 바위를 스친다. 한 사람의 손이 더는 온 세계를 붙잡지 못한다.
법전은 남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남아 있으며, 그것이 어떤 법전이 되어야 할지 여전히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읽기 안내와 출처
첫 장면은 헤겔이 1806년 10월 13일 니트하머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한다. ‘세계의 영혼’만 짧게 인용하고 나머지는 풀어 썼다. 헤겔, 진시황, 워싱턴, 알렉산드로스, 카프카를 함께 읽는 것은 필자의 비교이지 하나의 역사 법칙이 아니다. 다리 어귀의 만남과 바다 앞에 선 모습은 문학적 상상이다.
법전의 성과는 실제로 모두가 평등했다는 뜻이 아니며 여성의 종속, 식민지 노예제, 전쟁 피해를 상쇄하지 않는다. 민법전과 헌법, 민사혼과 정교분리를 구별했다. 러시아 원정의 병력 수는 집계 범위에 따라 달라지므로 전체 참가 병력을 모스크바 도착 인원과 같게 쓰지 않았다.
베토벤의 분노 일화는 주로 리스의 후대 회고에 의존한다. 남은 악보의 훼손된 표제, 헌정, 이후 평가를 한 가지 이야기로 고정할 수 없다. 사인은 Lugli 등이 1821년 부검 보고서를 다시 평가해 2021년에 발표한 의학 논문을 참고했다.
헤겔이 니트하머에게 보낸 편지, 1806년 10월 13일 · 나폴레옹 재단: 통령정부와 제1제국 연표 · 나폴레옹 재단: 민법전의 성립, 원칙과 후대 영향 · 1802년 5월 20일 법률과 노예제 · 대영박물관: 로제타석 · 나폴레옹 재단: 축성, 대관식과 종교협약 · 1804년 12월 2일 대관식 · 베토벤 하우스: 교향곡 3번 『영웅』 · 나폴레옹 재단: 네만강에서 모스크바까지 · Lugli 외(2021): 나폴레옹 부검 보고서 재평가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