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 108 ·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디랙, 방정식이 관찰보다 먼저 오다
방정식은 먼저 왔지만 해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쓴 마이너스 부호를 마주하고, 수학의 아름다움을 세계와 타인의 응답 앞에 놓는 디랙.
1. 한 시간에 한 단어
물리학자들의 일화에는 공식 단위표에 없는 단위가 하나 있다. 1디랙. 한 시간에 한 단어다.
동료들 사이에 전해진 농담이지, 한 사람의 평생을 시간마다 녹음해서 얻은 통계가 아니다. 말수가 적었던 사람의 모습을 기억하게 한다. 동시에 숫자 하나로 그 사람을 전부 설명했다는 착각을 부르기도 한다.
그 농담을 입구로 삼을 수는 있다. 다만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지는 말자.
그는 브리스틀에서 자랐다.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아버지는 자기와 프랑스어로 말하라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지 못하면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고 디랙은 나중에 회상했다. 그 기억은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침묵 전부를, 더구나 사랑할 능력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물리학에서 그는 다른 강력한 표현을 찾는다. 영어도 프랑스어도 아닌 방정식이다.
말로 하는 대답은 미룰 수 있다. 그렇다고 논증에 필요한 조건을 빼놓을 수는 없다. 무엇을 사용했는지, 어떻게 다음 단계로 나아갔는지, 어디가 아직 막혀 있는지 다른 사람도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디랙이 남긴 것은 침묵만이 아니다. 한 줄씩 되물을 수 있는 논문도 남겼다.
「전자의 양자이론」은 1928년 1월 2일 학술지에 접수되어 2월 1일에 실렸다. 방정식이 독자에게 도착했을 때, 그것이 가져온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자는 이미 오랫동안 연구되고 있었다. 분광학, 스핀 연구, 양자론, 특수상대성이론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자연이 아무것도 주지 않아서 빈 종이에서 세계를 꺼낸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것들을 아직 만족스럽게 함께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방정식이 나왔다. 해석이 완성된 채 따라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음의 에너지를 갖는 해는 문제로 남았다. 이후에는 구멍 이론이 있었고, 그 구멍을 양성자와 동일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931년에 디랙은 전자와 질량은 같고 전하는 반대인 새로운 입자를 명시적으로 제안했다. 반전자, 곧 양전자다.
1932년 칼 앤더슨은 안개상자 실험에서 양전자의 증거를 얻었다. 1933년 논문은 사진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장치와 식별의 근거를 함께 제시했다. 다른 설명을 검토하고 배제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방정식이 먼저 도착한 것은 맞다.
모든 경험보다 먼저가 아니다. 이 새로운 발견보다 먼저다. 그 사이에는 해석의 수정, 다른 사람의 반론, 다른 실험실의 노동이 있었다.
4년은 완성된 답안에 세계가 천천히 도장을 찍으러 올 때까지의 빈 시간이 아니었다.
콩트는 지식의 믿을 만한 바닥을 묻고, 포퍼는 세계가 아니라고 할 길을 묻는다. 여기서는 질문을 세계에 내놓을 준비가 되기 전에 멈추고 싶다. 사람은 어떻게 그 질문 앞까지 왔을까.
무엇이 먼저 왔을까. 이 이야기에서는 방정식이다.
2. 아름다움이 정확함보다 중요한가
1963년 디랙은 실험에 즉시 들어맞는 것보다 방정식의 수학적 아름다움을 우선하는 강한 주장을 썼다. 그가 든 예는 슈뢰딩거의 초기 시도가 겪은 어려움과 이후의 스핀 이해에 관한 것이었다. 연구를 어떻게 이어 갈 것인가에 대한 주장이었지, 아름다운 생각은 언제나 옳다는 증명서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 말의 무게는 보장이 없는 곳에 있다.
옳다는 것을 알고 나서 좋아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선택은 그전에 온다. 이 길을 더 따라갈 가치가 있는가. 아직 난점을 품고 있는 구조가, 모든 것에 잘 맞지만 더는 질문을 열지 못하는 설명보다 멀리 갈 수 있지 않을까.
디랙이 원한 것은 기존 식을 보기 좋게 다시 배치하는 일이 아니었다. 양자론의 시간 변화 형식과 상대론의 요구를 한 구조 안에 담으려 했다. 오늘날 흔히 쓰는 표기로 자유 전자의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iℏ ∂ψ/∂t = (c α·p + βmc²)ψ
여기서 운동량은 연산자이며, ψ는 성분 하나짜리 보통의 수가 아니다. 시간에 대해 일차라는 조건, 상대론의 요구, 계수들이 만족해야 하는 대수 관계가 함께 구성을 제한한다. 디랙의 구성에서는 이 조건들이 4행 4열 행렬과 네 성분의 파동함수로 이어진다. 시간에 대해 선형이기를 원한다는 말 하나만으로 자연이 네 칸을 내어 주는 것은 아니다.
아름답다는 것이 늘 적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는 남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함부로 잘라 낼 수 없다는 뜻이다. 구조의 절반은 마음에 든다. 그러나 다른 절반도 설명을 요구한다. 매력은 책임으로 바뀐다. 내가 원하니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조건들을 받아들였다면, 마음에 드는 결과만 골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가 헬게 크라그에 따르면 디랙은 1956년 모스크바의 칠판에 물리 법칙과 수학적 아름다움에 관한 말을 남겼다. 분필로 적힌 것은 한 연구자가 자기 시간을 걸 만하다고 여긴 믿음이었다.
분필 글씨가 지워졌더라도 선택은 남는다. 유망한 구조를 기존 해석이 담지 못할 때 해석을 바꿀 수 있는가. 믿을 만한 증거가 그 구조에 반할 때는 구조 자체도 바꿀 수 있는가.
아름다움은 나침반이 될 수 있다.
나침반이 대신 도착해 주지는 않는다.
3. 첫 번째 균열
여기서 디랙 방정식이 첫 균열을 연다.
과학 밖에 시험받지 않는 진리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관찰하고 일반화한다, 추측하고 시험한다. 너무 매끈한 이야기가 갈라진다. 동사들 사이에서 가장 힘든 일이 빠져 있다.
콩트는 관찰에 이론이 필요함을 알았다. 포퍼도 디랙을 대담하고 시험 가능한 이론의 저자로 맞을 수 있다. 결과를 담을 단어가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결과 이전에 있다.
디랙이 먼저 양전자를 원하고 거기에 방정식을 입힌 것은 아니다. 전자를 기술했더니 기술 안에 편하게 놓을 수 없는 것이 왔다. 처음 의도가 조금 물러나야 한다.
나는 이 자세를 방정식의 말을 듣는다고 부른다.
식에 의지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쓴 사람도 결과를 마음대로 고르지는 못한다. 함께 둔 조건들은 서로를 제약한다. 조건을 바꿀 수는 있지만, 그대로 둔 채 싫은 결과만 못 본 척할 수는 없다.
두 가지 ‘반드시’는 다르다. 전제를 받으면 수학적 귀결도 받아야 한다. 자연이 그 전제를 받는지는 아직 자연에 물어야 한다. 종이의 필연은 세계의 약속이 아니다.
그래서 듣는 일은 신탁을 믿는 일이 아니다. 식이 예상 밖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고, 실험이 되돌려 놓는 것도 허락한다.
아름다움은 탐색을 이끈다. 조금 더 가게 하고, 남들이 지친 곳에서도 보게 한다. 아직 결론은 아니다.
나침반은 목적지가 아니다. 하지만 나침반이 없다면 아무도 걷지 않을 길도 있다.
균열에서 들리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발견의 소리다.
4. 그와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피할 수 없는 요구를 남겼다.
전자의 양자 이론은 상대성 이론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빨리 움직인다고 전자가 다른 세계로 이사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일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질문을, 그가 대신 걸어 주지 않은 곳까지 가져가는 일일 수 있다.
위인 명부에서 이름 둘을 나란히 두는 것보다 가깝고 불편하다. 상대성 이론은 완제품인 양자 방정식을 주지 않는다. 어느 요구도 버릴 수 없으니 둘 사이에서 일해야 한다.
1933년 노벨 강연에서 디랙은 양자역학에 상대론적 요구를 더하면 입자의 가능한 성질이 제약됨을 설명한다. 제약은 길을 막을 뿐 아니라 미지의 윤곽을 그린다.
아인슈타인 주머니에 디랙의 답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질문을 깊게 했고, 다른 사람이 받아 더 갔다.
나는 전해진 눈물의 횟수로 이 관계를 달고 싶지 않다. 눈물을 못 봤다고 슬픔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회상 몇 개에 평생의 감정은 다 들어가지 않는다. 말없는 사람에게 방정식만 주고 일상의 애정을 빼앗는 것도 대신 너무 많이 말하는 일이다.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일에 남긴 응답이다.
아인슈타인이 그의 진로를 정하지 않았다. 존중한다고 디랙이 반복만 해야 했던 것도 아니다.
열린 문을 더 여는 계승이 있다. 그 너머에는 처음 연 사람도 예상 못 한 것이 나타난다.
5. 침묵 속에서 아는 일
콩트가 바닥을 깐다. 포퍼가 선을 긋는다. 디랙은 앉아서 방정식으로 돌아간다.
침묵은 물리학의 결론을 증명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고 저절로 진리에 가까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할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있다.
모르는 것을 당장 매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청중을 만족시키려 추측을 발표하지 않는다. 기호가 걸리고 유도가 안 풀린다. 좋은 이야기가 되기 전의 그곳에 좀 있어도 된다.
방정식도 언어다. 다른 이가 확인하고 오류를 찾을 만큼 정밀한 언어다. 표현을 뛰어넘어 자연 자체를 붙잡는 신비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에는 속도 차이가 있다. 판단의 근거를 설명하기 전에 식을 고치고, 길을 버리고, 다시 계산한다. 일은 이미 예전대로 계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남에게 설명할 이유는 뒤에 온다.
우리는 보통 완성품을 지식이라 부른다. 논문이 나오고, 유도가 정리되고, 결론을 인용할 수 있다. 아직 문장이 못 된 멈춤은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그것 없이 완성품은 어디서 왔을까.
콩트와 포퍼 다음에 디랙을 읽는 까닭은 여기로 눈을 돌리기 위해서다. 둘의 패배를 선언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식의 입장 심사가 지식이 생겨나는 일을 가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불필요한 말로 침묵을 채우지 않는다. 우리도 대신 채우지 말자.
6. 앞으로 올 사람들
이후 굴원, 바버라 매클린톡, 마이클 폴라니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이 시리즈에 들어올 것이다.
이 길들이 하나로 합쳐질 필요는 없다. 각각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보일 만큼 따라가 보자.
굴원의 시는 실험 성공과 교환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나게 한다. 『이소』는 아직 적당한 검출기가 없는 입자 예측이 아니다. 독자는 시가 어떻게 말하는지, 경험을 어떻게 조직하는지, 자신이 어디에서 움직이는지 마주해야 한다. 시에 관한 사실과 해석은 물론 질문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시로서 존재할 자격을 얻기 위해 먼저 물리학 시험에 합격할 필요는 없다.
시와 방정식이 모두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이 같은 증명 책임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디랙은 전자에 관한 물리적 주장을 했다. 미적 판단이 있다는 이유로 그 책임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매클린톡의 1950년 논문은 옥수수 9번 염색체의 짧은 팔을 다룬 실험에서 시작한다. 이전에는 드물던 현상이 재배한 재료에서 거듭 나타났다. 그가 실험 앞에 가져온 것은 질문만이 아니라 그 재료와 오래 함께한 경험이었다.
어떤 느낌은 오랜 관찰 안에서 자란다. 배경으로 넘기던 변화에 주목하게 하고, 다음 재배나 비교나 질문을 바꿀 수 있다. 그렇다고 알아차림이 곧 원인에 대한 지식은 아니다. 현미경 속에서 ‘전이인자’라는 이름표가 달린 물건을 본 것과도 다르다.
폴라니는 다른 입구를 연다. 명시할 수 있는 규칙만으로는 지금 작동하는 앎을 모두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균형을 조절할 때마다 먼저 완전한 문장으로 명령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탈 줄 안다고 해서 관련된 역학을 모두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방정식을 더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 역시 그 물리적 해석이 이미 증명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구별은 암묵적인 부분을 내쫓지 않는다. 다른 무엇을 가장하지 않고 그대로 남을 수 있게 한다.
세 길은 여기서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시의 목소리, 실험 속의 분별, 아직 온전히 말이 되지 않은 능숙함은 각각 묻는다. 우리가 인정하는 앎이 이미 손쉽게 표로 만들 수 있는 부분만으로 줄어들지 않았는가.
말할 수 없다고 저절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디랙에서 폴라니까지 실마리가 드러난다. 아직 말하지 못하는 것이 모두 지식의 찌꺼기는 아니다. 지식이 도착하는 것을 이미 받치고 있는 것도 있다.
7. 그 마이너스 부호
종이로 돌아가자.
자유 입자의 에너지는 익숙한 관계로 쓸 수 있다.
E = ±√(|p|²c² + m²c⁴)
어려움은 물리학에서 음수를 일률적으로 금지한다는 데 있지 않다. 선택한 영점에 대해 에너지가 음수일 수 있다. 여기서 더 구체적인 문제는 양의 가지와 함께 아래로 한없이 뻗는 가지가 있으며, 왜 전자가 더 낮은 상태로 계속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1928년 논문에서 모든 해가 차분히 제자리를 찾은 것은 아니다. 일부 해는 처음에 배제되었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명시적으로 남았다. 나중에 그 문제로 돌아갔다고 쓰기 위해, 처음부터 한 번도 망설이지 않은 사람으로 바꿔 놓을 필요는 없다.
구멍 이론은 한 가지 시도였다. 음의 에너지 전자 상태가 모두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면, 전자 하나가 빠진 구멍은 양의 에너지와 양의 전하를 띠는 것처럼 행동한다. 디랙은 처음에 이 구멍을 이미 알려진 양성자로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동일한 질량이라는 요구는 전자와 양성자의 큰 질량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소멸에 관한 비판도 물질의 안정성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더했다. 바일의 질량 논증과 탐, 오펜하이머 등의 관련 작업은 하나의 증명에 붙인 교환 가능한 이름들이 아니다. 디랙 자신도 1931년에 그 문제들을 구별했다.
반전자를 제안하는 데에는 지키고 싶었던 해석 하나를 포기하는 일이 들어 있었다.
수학적 제약이 그를 여기로 데려왔다. 다른 사람들의 이의도 함께 작용했다. 종이 위에서는 혼자 내디딘 듯한 한 걸음에 공동 작업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32년 8월 2일 앤더슨이 얻은 사진을 보자. 입자 궤적은 두께 6밀리미터의 납판을 가로지른다. 판을 통과하며 에너지를 잃으면 휘어지는 정도가 달라져 운동 방향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방향과 자기장을 함께 알아야 전하의 부호를 식별할 수 있다. 궤적 길이 등의 정보는 보통의 양성자라는 설명을 제외하는 데에도 쓰였다. 처음 제시한 질량 상한은 오늘날의 정밀 측정과 같지 않지만, 사진에서 양의 부호를 찍어 맞힌 것과는 이미 달랐다.
카메라는 흔적을 남겼다. 실험자는 흔적을 논의 가능한 증거로 만들었다.
여기서 이론과 실험은 만난다. 한쪽이 명령하고 다른 쪽이 마침내 복종한 것이 아니다.
네 성분에도 조건이 필요하다. 운동량이 정해진 자유 입자의 해는 에너지의 가지와 스핀에 따라 해당 모드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표현에서 앞의 두 성분은 영원히 전자, 뒤의 두 성분은 영원히 양전자가 되지 않는다. 성분과 해, 입자로서의 해석은 같은 분류표가 아니다.
현대 양자장론에서 양전자는 진공에 대해 양의 에너지를 갖는 들뜸이지, 실험실을 떠도는 음의 에너지 전자가 아니다. 같은 전자 방정식을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입자에 적용할 수도 없다. 중성 파이온처럼 자기 자신이 반입자인 경우도 있다. 거울 저편에는 반드시 서로 다른 또 하나의 자신이 있다는 그림은 너무 말끔하다.
1955년의 반양성자 발견과 1956년의 반중성자 실험은 이 역사를 넓혔다. 그렇다고 1928년의 방정식이 이미 모든 것을 끝냈다고 거꾸로 적을 수는 없다. 디랙은 1931년과 1933년에도 반양성자를 논했고, 전자 이론을 양성자에 곧바로 적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후의 실험은 각각 자신의 장치와 판별 기준과 추론을 필요로 했다.
방정식에는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결과가 있었다. 그 기호들은 자신이 쓴 것이었다. 그래도 돌아와 다시 읽어야 했다.
배제법도 여기서 더 엄격한 자리를 얻는다. 후보가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고, 전제가 적용되며, 배제가 타당할 때 남은 답을 확정할 수 있다. 후보 목록이 불완전하거나 공통 가정이 잘못되었다면, 오래된 해석 몇 가지를 제외했다고 해서 새 해석이 자연의 진실이라고 보장되지는 않는다.
수학적 구조는 추론을 건너뛰지 않는다. 사람은 추론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없는 부분을 조금씩 알아본다.
마이너스 부호가 그의 판단을 맡아 준 것은 아니다.
이미 맡은 판단을 쉽게 끝낼 수 없게 한 것이다.
8. 다리 어귀
이 연작의 상상 속 다리로 그를 맞아들이자.
거의 소리 없이 와서 디랙은 멀리를 본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다.
포퍼가 말을 건다. ‘먼저 반전자를 생각하고 나서 방정식을 찾았나?’
디랙이 본다. 긴 침묵 뒤에 말한다. ‘아니.’
그리고 다시 침묵한다.
포퍼는 기다린다. 시험할 방법도 묻고 싶다. 디랙이 질문을 막는 것은 아니다. 다만 펜이 아직 멈추지 않았다.
콩트는 뉴턴의 달 근처에서 칸을 찾는다. 물리학자니까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음수 부호가 데려온 낯섦은 조금 밖에 남는다.
결과에는 자리가 생겼다. 결과가 쓴 사람을 원래 배치 밖으로 데려간 과정까지 함께 들어가지는 못했다.
먼 칸트는 서둘러 이름 붙이지 않고 펜을 본다. 종이에서는 반드시 그렇다. 세계에서도 그런가. 두 말 사이에는 아직 걸을 길이 있다.
디랙은 조용한 곳을 골라 펜을 꺼내고 공중에 방정식을 쓴다. 음수 부호가 하나 있다.
누구도 뚜렷이 보지 못한다. 하지만 멀리 앤더슨이 남긴 궤적이 잠깐 빛나는 듯하다.
그는 서 있다. 조용히. 완전히 조용히.
그 발밑 다리에 귀를 대면 아주 작은 웅웅거림이 들린다. 방정식의 소리다. 콩트의 시멘트 아래, 포퍼의 선 너머에서.
틈에는 무언가 있다. 방정식은 안다.
읽기 안내와 출처
1928년 1월 2일은 접수일, 2월 1일은 발행일이다. 반전자 제안은 1931년, 앤더슨의 증거는 1932년, 관련 논문은 1933년이다. 두 식은 자유입자의 현대적 표기이며 α와 β는 행렬, p는 운동량 연산자다. 네 성분을 모든 표현에서 전자·양전자에 고정된 칸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적 구멍 이론과 현대 양자장론은 구별한다. 현대 이론의 양전자는 진공에 대해 양의 에너지를 갖는다. 1931년 논문은 질량과 소멸 문제를 구별하고, 1933년 노벨 강연은 발전 과정을 돌아본다. 수학적 제약과 자연에 대한 적용은 다른 물음이다. 아름다움은 시험을 면제하지 않는다.
과묵함의 단위는 동료들의 일화다. 모스크바 칠판은 크라그의 기록에 따르며 현재 보존 상태는 주장하지 않는다. 눈물이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애정, 성격, 천재성을 진단하지 않는다. 8절의 만남과 대화, 울림은 문학적 상상이다.
Helge Kragh: Simply Dirac — Dirac’s Legacy · Dirac: The Quantum Theory of the Electron (1928) · Dirac: Quantised Singularities in the Electromagnetic Field (1931) · Anderson: The Positive Electron (1933) · Dirac: The Evolution of the Physicist’s Picture of Nature (1963) · Helge Kragh: Simply Dirac — Mathematical Beauty · Comte: Course of Positive Philosophy — Lecture I · Popper: Science — Conjectures and Refutations · McClintock (1950): Cold Spring Harbor archive · McClintock: The Origin and Behavior of Mutable Loci in Maize (1950) · Polanyi: The Tacit Dimension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Klauber: Student Friendly Quantum Field Theory — Chapter 1 · 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 I.2 · Dirac: Theory of Electrons and Positrons — Nobel Lecture (1933) · Observation of Antiprotons (1955) · Antineutrons Produced from Antiprotons in Charge-Exchange Collisions (1956) · Berkeley Lab: The 1950s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