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론 · 06
“아이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집에 세 번째 사람이 생기면 부부가 함께 해야 할 일도 많아진다. 하지만 아이 하나가 왔다고 원래 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누군가를 붙잡아 두는 자물쇠가 되어서도 안 된다.
휴가가 끝나 갈 무렵 뤄웨이는 서랍에서 예전 사원증을 꺼냈다. 그것을 본 탕푸가 말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당신이 먼저 한 이 년쯤 집에 있으면 어때. 그녀는 사원증 가장자리의 오래된 금을 손끝으로 만졌지만 그러겠다고 답하지 않았다.
둘 다 아이를 돌보고 있었고 둘 다 지쳐 있었다. 밤에는 누가 일어나고 아침에는 누가 데려다주며 퇴근 뒤에는 누가 데려올지. 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도 야근과 잠 부족, 갑작스러운 변화가 닥치면 다시 짜야 했다. 새로운 사람이 왔다는 것은 수저 한 벌이 늘었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던 두 사람이 어느새 서로 다른 하루 속에 서게 되었다.
이럴 때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은 쉽게 나온다. 진심 어린 걱정일 수도 있고 부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아무도 반대해서는 안 될 목소리가 하나 더 생긴 듯해지면, 정작 입을 연 사람은 뒤로 숨게 된다.
세 번째 사람이 왔다고 누구도 부속물이 되지는 않는다
아이는 세 번째 사람이지 두 사람이 합쳐 만들어 낸 성과물이 아니다. 온 가족을 대신해 결정하는 제3의 의지도 아니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아이 역시 둘 사이의 생활 방식을 실제로 바꾼다. 그렇다고 그 변화가 어느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의 삶에 편입시키지는 않는다.
이 결혼론이 여기서 살펴보는 것은 여전히 부부 사이의 일이다. 어떻게 함께 돌보고 의논하는지, 누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아이의 필요를 어떻게 서로에게 전하는지다. 부모와 아이 사이에는 별도로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이 글은 그것까지 한꺼번에 다 설명한다고 나서지 않는다. 한 부분을 똑바로 보는 일이 진지하려면 반드시 전체를 집어삼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있어도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방향이 있을 수 있다. 뤄웨이가 설계사무소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아이를 덜 아끼는 것은 아니다. 탕푸가 집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 하는 데에도 이유가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집에 더 오래 있는 사람에게 아이를 더 사랑한다는 상을 줄 수는 없다. 시간과 노동은 보아야 하지만 마음까지 같은 시계로 읽을 수는 없다.
둘 다 아이가 자라 자기 길을 가기를 바란다면 각자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가 더 이상 나를 중심으로 살지 않아도, 다른 한 어른을 중심으로 살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한 사람이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다른 사람의 몫까지 끝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함께 정했던 일도 “우리 집은 원래 그래”라는 말 뒤에 숨겨 누구도 답하지 않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아이가 실제로 집을 떠나야 한다거나 더 이상 돌봄이 필요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래도록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누군가에게 의존한다고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지위가 줄어들거나 삶이 돌보는 사람에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여기서 지키려는 것은 한 사람의 판단과 삶의 전개를 남이 대신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지, 누구나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선언이 아니다.
아이에게 조건을 마련해 주는 일과, 아이가 자라며 그 조건을 써서 부모가 생각지 못한 곳으로 가도록 허용하는 일은 이어져 있다. 그러나 하나로 다른 하나를 대신할 수는 없다. 아이가 자기 삶을 가지려면 먼저 부모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필요를 전할 수는 있어도 아이의 뜻인 양 내세워서는 안 된다
탕푸의 말로 돌아가 보자. 뤄웨이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한 것은 아이가 아니라 탕푸였다. 그는 돌봄을 어떻게 나눌지 진지하게 걱정했을 수도 있고, 그녀가 집에 있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고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우선 그의 판단이다. 판단으로서 내놓아야지 아이의 이름을 빌려 그녀의 대답이 필요 없는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는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야. 다시 계산해 볼 수 있을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 역시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먼저 일을 내려놓고 싶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아이를 아낀다고 같은 답을 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안에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이에게 아니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이미 일정 기간 누가 돌볼지 분명히 약속했다면 그 약속을 상기시키는 일과 아무 근거 없이 누군가에게 남으라고 요구하는 일은 다르다. 약속에는 무게가 있고 바뀌면 이미 생긴 영향도 마주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 약속이 다시는 의논할 수 없는 신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위해서”는 금지된 말이 아니다. 구체적인 문제를 꺼내는 데 쓰면 함께 겪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한다. 상대의 대답을 끝내는 데 쓰면 다른 일을 하는 것이다. 아이의 일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중요하다는 사실이 말하는 사람에게 최종 결정권을 저절로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자신들의 걱정을 가져온다. 뤄웨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냥 참고 살라고 한다. 걱정이 되어서일 수 있고 정말 돕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걱정은 어머니의 것이며, 그것으로 두 사람을 대신해 앞으로 어떻게 살지 정할 수는 없다. 제삼자를 거쳐 전해진 압박에도 처음 말한 사람의 몫과 이어 전한 사람의 몫이 각각 남는다.
한번은 다투던 중 뤄웨이가 말했다. 당신이 나가면 다시는 아이를 볼 생각하지 마. 이것은 두려움을 표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떠나는 데 따르는 대가를 높일 수 있는 결과를 예고한 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어떤 가로막음이 생기는지는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화가 나서 한 말이라고 하지 않은 말처럼 취급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한마디로 그녀의 평생이나 아이에게 품은 감정을 전부 판정해서도 안 된다. 아이가 실제 생활 속에서 배우자를 붙잡는 수단으로만 남았는지는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아야 한다. 어느 순간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는 것과 한 사람을 영원히 그런 사람으로 판정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이 구별이 그 순간 마주해야 할 일의 무게를 줄이지는 않는다.
데리러 가는 것을 잊은 사람은 누구인가
다른 날 오후 뤄웨이는 야근 때문에 탕푸에게 아이를 데려와 달라고 했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잊었다. 유치원 전화를 받고서야 서둘러 아이를 데려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말했다. 당신도 나한테 다시 알려 주지 않았잖아.
그녀가 다시 알려 주었는지는 따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날 오후 데리러 가겠다고 한 사람도, 잊은 사람도 그였다. 함께 산다고 각자가 한 일을 “우리 둘 다 문제가 있어”로 희석해 결국 아무도 자기 몫을 설명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갑작스러운 업무가 가로막았는지,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는지, 둘이 계획을 바꾼 적이 있었는지도 구체적으로 구별해야 한다. 한 번 지키지 못했다고 즉시 거짓이었다거나 일부러 그랬다거나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다고 판정할 수는 없다. 사실은 진지하게 살펴야 하고 마음은 멋대로 채워 넣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는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함께 양육하며 들인 노력도 같다. 밤에 몇 번을 깼는지, 근무를 몇 번이나 바꾸었는지가 “다 한 가족인데”라는 말 속에 사라져서는 안 된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아이를 두고 승패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지쳐서 더는 다정한 말 한마디 못 하게 되기 전에 두 사람이 다시 나눌 기회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노력으로 지배권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더 했으니 당신이 일하러 갈 수 있는지도 내가 정한다. 내가 줄곧 집을 돌봤으니 당신은 떠날 수 없다. 이런 말은 실제 노동을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소유권으로 바꾼다. 노동은 알아주어야 할 것이지만, 그런 환산을 거쳐야 가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두 사람은 헤어질 수도 있다. 결혼이 끝난다고 공동 양육까지 저절로 끝나지는 않는다. 앞서 맡겠다고 한 일과 실제로 해 온 일은 여전히 마주해야 한다. 그렇다고 끝나지 않은 일이 거꾸로 결혼을 회복하라는 명령이 될 수도 없다. 부모로서 어떻게 이어 갈지에 대한 답이 다시 함께 사는 것 하나뿐일 필요는 없다.
입양으로 맞이한 아이에게도 같은 문제가 따른다. 나중에 어려워졌다고 “그때 당신이 꼭 입양하자고 했잖아”라는 말로 두 사람이 함께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한 사람의 몫으로 돌릴 수는 없다. 당시 함께 받아들인 일이 아니었다면 그 차이도 사실대로 마주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 자신이 이미 해 온 일까지 바꾸어 버리는 수단은 아니다.
주말에 뤄웨이는 사원증을 가방에 넣었고 탕푸는 종이와 펜을 꺼내 다음 주에 정말 바쁜 저녁부터 적었다. 이것으로 앞으로의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상대의 이유에 전부 동의한 것도 아닐 수 있다. 다만 이번에는 둘 다 아이를 대신해 마지막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자신이 실제로 걱정하는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아이를 돌보는 데에는 끝없이 이야기해야 할 작은 일이 많다. 그 속에서 누구 하나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근사한 가족 구호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누가 늦는지, 누가 이미 많이 지쳤는지, 누가 약속하고도 지키지 못했는지. 그런 말을 마침내 들어 줄 사람이 아직 있다는 뜻일 것이다.
원 논문과 이 글의 범위
이 글은 결혼론 논문 여덟 편을 바탕으로 주요 구별과 일상의 예를 살려 썼다. 모든 기술적 명제와 철학적 비교 독해를 항목마다 재현하지는 않는다. 원문의 영어판은 독립적으로 다시 썼으며, 이 한국어판도 논지와 예시를 보존하면서 한국어에 맞게 옮겼다. 부부 등장인물과 확장한 생활의 세부 사항은 모두 허구의 예시다. 실제 사례가 아니며 특정한 결혼에 처방을 내리지도 않는다.
논문은 성인 두 사람 사이의 한 종류의 결혼으로 논의 범위를 한정한다. 다른 형태를 부정하거나 범위 밖의 사람들에게 우열을 매기지 않는다. 예시에는 남녀 부부가 자주 등장하지만 성별 조합은 논의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제도상 인정과 해소에는 구체적인 규칙이 적용된다. 이 글은 현행 법률 안내가 아니며, 마음속 사랑을 검사하거나 필요한 안전과 보호를 대신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