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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판단력 연습과 놀이 · 협력하기

이 춤은 나 혼자 끝낼 수 없다

상대가 오른쪽으로 반걸음 더 나갔을 때 나는 원래 자리로 끌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움직임을 잘 이어 갔다 해도 질문은 남습니다. 그의 한 걸음을 받아들인 것일까요, 내가 원한 모양을 만드는 데 빌려 쓴 것일까요.

Han Qin ·

철학 산문이지 인지능력 검사나 향상을 보장하는 훈련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끝에 붙인 작은 관찰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점수를 매기거나 모범 답안을 정하지 않으며, 그 답으로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음악이 몸을 돌리는 박자에 닿습니다. 그가 오른쪽으로 반걸음 더 나갑니다. 그녀는 짜 둔 자리로 끌어오지 않고 그 반걸음을 따라 예정에 없던 회전을 이어 냅니다. 춤이 끝나자 두 사람 모두 웃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협력 같습니다. 둘이 제 동작을 각각 마치고 성적을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다음 걸음이 당신의 다음 걸음을 받아 잇고, 그렇게 나온 것은 어느 한쪽도 혼자 미리 써 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잘 받아 이었다고 서로를 정말 존중한다는 뜻일까요. 아직 서두르지 맙시다. 춤은 멋지지만 지금 가진 자료가 거기까지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상대를 도구로 여기는 사람도 상대의 움직임에 능숙하게 맞출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살펴봅니다. 춤의 동작과 음악, 둘의 약속은 많은 것을 정했지만 더 나간 반걸음까지 정해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이 박자를 이렇게 받을 수도 있다고 알아본 것은 그녀의 판단입니다. 그가 오른쪽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은 그 판단에 쓴 재료입니다. 실제로 돌아서는 것은 뒤따른 행동입니다. 가까이 있는 셋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의 한 걸음은 여전히 그의 것이어야 한다

경쟁할 때 상대의 다음 수는 내가 넘어서려는 것입니다. 협력할 때에는 함께 원하는 것의 일부가 됩니다. 차이는 협력하는 사람이 더 착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둘이 추는 춤은 나 혼자 아름답게 춘다고 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합주에서 다른 악기는 변하지 않는 배경이 아닙니다. 함께 맞추는 퍼즐도 내가 모든 조각의 자리를 가리키고 상대는 눌러 끼우기만 하는 방식에 그칠 필요는 없습니다. 협력이 열어 주는 가능성은 당신이 스스로 알아보고 응답하면서도 당신 몫이 내 몫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역할을 나눈다고 한 사람이 자기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익숙한 안무라면 매 박자 처음부터 상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실제 당신이 내가 예상한 당신과 다를 때입니다. 나는 방법만 조정해서 당신이 계속 내가 바라는 결과에 도움이 되게 할까요. 아니면 당신 덕분에 당신에 대한 내 이해를 고칠 수도 있도록 마음을 열어 둘까요.

두 조정은 겉으로 비슷할 수 있습니다. 동작이 맞는지, 서로 보며 웃었는지만으로 나눌 수는 없습니다. 호흡이 잘 맞는 장면 하나를 보고 두 사람에게 인격 증서를 발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맞춰 하는 일은 만날 조건을 주지만 만남 자체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내 목표가 있다고 물러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춤을 잘 추고 공연을 성공시키고 싶으면서 당신의 판단은 당신의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갖는 것과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양자택일로 놓아서는 안 됩니다. 눈앞 사람이 내 목표 안에 전부 삼켜지지 않았는지가 중요합니다.

거꾸로 바꾸어 말해서도 안 됩니다. 누군가 동료를 이용하고 싶어 할 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더는 협력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판단과 실제 응답을 필요로 할 수 있습니다. 협력하는 방식이 그의 태도만으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 판이 어떻게 성립하는지와 그가 다른 참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나누어 물어야 합니다. 이름을 바꾼다고 뒤의 질문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운동팀은 이런 관계를 같은 경기장에 놓습니다. 팀 안에서는 협력하고 팀끼리는 경쟁합니다. 이것은 활동이 짜인 방식에 관한 말입니다. 한편 경쟁하면서 상대를 높이 평가하고 생각을 진지하게 듣는 것은 그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뒤의 태도가 나타났다고 경쟁의 이름이 협력으로 바뀌지 않으며, 팀이라고 불렀다고 모두가 동료로 대우받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내가 존중을 연습할 재료가 아니다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일은 물론 연습할 만합니다. 다만 오늘 반드시 끝내야 할 과제로 바꾸는 순간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첫째 어려움은 당신 쪽에 있습니다. 존중을 연습하는 일을 끝내려고 당신을 불렀다면, 나는 여전히 당신에게 내 성장을 위해 쓰이라고 요구합니다. 말로는 당신이 당신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실제로 급히 확인하려는 것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입니다.

둘째 어려움은 내 쪽에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지금부터 진심으로 당신을 인정하라고 자신에게 명령한다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진지한 결심일 수는 있지만 결심의 강도로 이 순간의 인정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연습을 생각하자마자 놀이가 불순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호흡 맞추기를 연습하고 싶어서 사람을 불러도 시작한 뒤에는 그 판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왜 놀고 싶었는지와 지금 동료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다른 질문입니다. 앞의 바람이 놀이를 취소하지도 않고 뒤의 관계를 증명하지도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적지 않습니다. 시간을 내고 둘 다 원하는 놀이를 고르며 거절하고 바꾸고 멈출 수 있게 합니다. 잘 이어지지 않아도 바로 상대를 단정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지 시간 맞춰 일어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무엇이 남을지는 노는 사람들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이에게 협동 놀이를 마련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어른에게 교육할 생각이 있다면 밝혀도 좋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오고 싶은지, 지금 적합한지, 나갈 수 있는지의 답을 어른이 한꺼번에 채워서는 안 됩니다. 아이가 정말 무엇을 알아보았다면 그 발견은 아이의 것입니다. 마련한 사람의 기여를 지우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기여를 대가로 아이가 무엇을 자기 판단으로 받아들였는지까지 대신 정할 권한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 말을 일부러 덜 하고 아이가 어른이 원한 답을 정확히 채우기를 기다리는 일도 아닙니다. 정말 남겨 두려면 잇지 않거나 다르게 잇거나 오늘은 놀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련한 사람은 실제 아이에 맞춰 조건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을 아이가 또 과제를 끝내지 못한 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회사에서 지시한 팀 활동도 있습니다. 참여자는 업무 요구를 수행합니다. 놀이의 면이 있을 수는 있어도 다들 자발적으로 즐긴다는 말 안에 업무 요구를 감추어서는 안 됩니다.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가 마주한 제약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활동의 이름으로 그를 대신해 답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와 두면서 일부러 이기게 해 준다면 어떨까요. 말을 빼거나 먼저 두게 하는 방식을 공개적으로 정하고 아이도 알고 받아들인다면 함께 새 규칙을 정한 것입니다. 몰래 이기게 했다면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내가 꾸민 결과를 아이가 자기 힘으로 이긴 것이라고 대신 말한 것은 아닐까요. 몰래 봐주는 일을 모두 같은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안의 놀이 경계에는 원논문도 질문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대신 정해 버렸는지라는 질문은 이미 눈앞에 놓을 만합니다.

가치가 있다고 숙제는 아닙니다. 협동 놀이를 싫어한다고 존중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잘 맞춰 한다고 존중을 이미 배웠다는 뜻도 아닙니다. 더 높은 인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며, 올라가려고 다른 사람을 불러와도 되는 이유도 아닙니다.

글을 쓰는 동안 저편에는 이미 누군가 있을까

종이를 사이에 두고 이어 가는 일도 있습니다. 소설가는 혼자 앉아 있어도 두 의자를 오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는 쓰는 사람의 자리이고 다른 하나에는 잠시 그가 상상한 독자가 앉습니다.

앞 장면에서 조카가 서재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해 봅시다. 유언장을 찾는 대목에서 작가는 조카가 먼저 책상 오른쪽 두 번째 칸으로 손을 뻗고 나서 유언장이 어디 있는지 묻게 합니다. 그저 돕는 행동을 썼는데 독자 쪽에서 보니 다른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여기 사정을 원래 잘 알았던 것 아닐까.

같은 글에 이런 읽기도 가능하다고 알아보는 것은 작가가 이번에 내린 판단입니다. 독자가 이 때문에 범인을 맞힐지는 예상이고, 돌아가 문장을 덜 두드러지게 바꾸는 것은 뒤의 행동입니다. 이 예는 조카가 반드시 거짓말했거나 범인이라고 판정하지 않습니다. 원래 주려던 뜻보다 글이 길을 하나 더 열었다는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독자를 상상한다고 책상 옆에 실제로 사람이 하나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자리를 바꾸는 것은 여전히 작가 자신입니다. 다만 글이 이미 다른 읽기를 향해 조직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실제로 책을 펼쳐야만 그 방향이 처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단순히 혼자 놀기로 넣기보다 말하기와 듣기 쪽에서 이야기합니다. 글쓰기가 언제 완전한 협력 놀이가 되는지는 원논문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자신에게만 쓰는 일기도 여전히 남은 문제입니다.

실제 독자가 오면 또 달라집니다. 이곳에서 멈추는지, 어떤 가능성을 보는지는 그의 판단입니다. 작가의 예상과 다르다고 그 판단이 그의 것이 아니게 되지는 않습니다. 작가는 단서와 공간을 남길 수 있지만 상상한 독자로 실제 독자의 읽기를 대신 끝내지는 못합니다.

추리소설은 숨기기와 맞히기를 겨루게 하곤 합니다. 함께 이야기로 들어가는 동시에 작가는 숨기고 독자는 찾으려 합니다. 협력 안에 경쟁이 들어 있습니다. 연극과 영화, 소설을 읽고 보는 것도 작가가 이미 완성한 감정을 받기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현장 공연에서는 관객의 반응을 받아 잇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기 경기를 보는 관객은 여전히 그 경기의 판 안에 있습니다. 모든 감상을 같은 관계로 밀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심어 둔 것을 당신이 보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내 길로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읽기 때문에 내가 내 문장을 새로 볼 수도 있습니다. 처음 재료를 마련한 사람이 영원히 주는 쪽에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물 때문에 슬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가 쓰면서 그 사람을 위해 울었다고 독자 자신의 감정까지 완성해 줄 수는 없습니다. 독자는 다른 데서 감동할 수도, 울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반응만으로 인격의 높낮이를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작품 안에 들어갔다고 작품이 각자가 어떻게 느낄지까지 답으로 정해 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의 한 걸음을 더 잘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고, 안정적인 변화가 남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연습의 효과가 남는지, 생활로 가져갈 수 있는지는 따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이번에 내가 실제로 무엇을 알아보았는지, 지난번에 당신이 실제로 무엇을 이어 냈는지는 ‘과제를 끝냈다’는 말 하나로 모두 정리해 버릴 수 없습니다.

음악은 또 다음 박자로 갑니다. 당신을 대신해 이 춤을 끝낼 수 없고, 내가 당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는 증거로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우선 당신의 반걸음을 당신에게 남겨 둔 뒤 내 한 걸음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보아도 좋겠습니다.

출처와 읽기 안내

해당 SAE 논문을 바탕으로 쓴 독자용 산문이며, 기술적인 논증 전체를 문단별로 옮긴 글은 아닙니다. 영어판도 영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한국어판은 공개된 중국어 산문에서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놀이가 열어 주는 가능성을 실력 향상의 보장이나 인격 검사, 반드시 참여해야 할 과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해당 원논문으로 가는 링크도 따로 제공합니다.

해당 원논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