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 · 영화 읽기 · 3 / 3
떠나는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 글의 목차
학교에 불이 난 뒤 라샹에게는 책임질 사람이 필요해진다. 마티유는 허락 없이 아이들을 숲으로 데려갔다. 그 소풍 덕분에 아이들은 불타는 기숙사를 피했지만, 교칙을 어긴 사실은 남는다. 그는 즉시 해고되고, 6시 버스를 타고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자신이 맡았던 학생들과는 어떤 접촉도 해서는 안 된다.
가방을 들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그의 눈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몇몇 아이는 규칙을 어기고 작별 인사를 하러 나올 줄 알았다. 텅 빈 마당은 무관심처럼 느껴진다. 그때 창살이 달린 창문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이 처음으로 날아온다.
I. 몸은 갇힌 채로 보내는 작별 인사
교실 문은 잠겨 있다. 아이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도, 그에게 손을 댈 수도, 눈을 마주칠 수도 없다. 벽 뒤에서 합창하며 저마다 말을 적은 종이를 접어 창밖으로 던진다. 라샹은 안에서 문을 열라고, 그만두라고 명령한다.
이 장면에서 감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창살 사이로 손이 뻗어 나오고, 몸이 건널 수 없는 거리를 종이가 건넌다. 이 기쁨 안에는 여전히 그들을 가두는 기관의 모양이 남아 있다.
마티유는 종이비행기를 펼친다. 보니파스의 반듯한 글씨, 페피노의 틀린 철자, 음표로 가득한 모항주의 종이를 알아본다. 이 종이들은 두루뭉술한 감사 한마디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종이에 남은 저마다의 표현 방식이 그곳에 없는 작성자를 눈앞에 데려온다.
II. 누구의 손인지 알아본다는 것
퐁 드 레탕은 오랫동안 잘못을 기준으로 아이들을 구별해왔다. 마티유의 합창단은 성부와 음높이, 능력, 공동의 작품과 맺는 관계로 아이들을 구별했다. 이제 이 작별에서 아이들을 알아보는 세 번째 방식이 완성된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는 흔적을 아이들이 저마다 남긴다.
이는 이름을 줄줄이 적는 것보다 더 섬세한 일이다. 보니파스와 페피노는 서로 바꿔놓을 수 없다. 글씨가 다르기 때문이다. 모항주는 종이를 악보로 바꾸어놓았다. 마티유는 사실상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건 그 아이가 보낸 것이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하나씩 들어준 일에,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답한다. 종이비행기가 돌려보내는 것은 생활지도원의 근무 성적표가 아니다. 이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다.
III. 토요일을 기다리는 아이
옆문 밖에서 페피노가 마티유를 따라잡는다. 부모는 독일 점령기에 세상을 떠났지만, 아이는 아버지가 토요일에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줄곧 믿는다. 어른들은 여러 번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믿으려 하지 않고 매주 문 앞에 서서 기다린다.
페피노는 함께 데려가달라고 청한다. 마티유는 처음에는 거절한다. 규칙에 어긋나니 돌아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 마음을 바꾸어 아이를 데리고 길을 떠난다. 마지막에 내레이션이 그 날짜의 무게를 드러낸다. 마티유가 해고된 날은 바로 토요일이었다.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책임을 마법으로 바꾸게 해서는 안 된다. 마티유는 죽은 아버지가 아니며, 페피노의 믿음을 말 그대로 실현해줄 수도 없다. 아이를 데려간다는 것은 구체적인 의무를 떠맡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 의무를 한 번의 출발로 압축한다. 이 선택이 중요한 까닭은 오랫동안 행정상의 골칫거리로만 취급되던 기다림에, 자기가 가려던 길을 바꿀 마음이 있는 사람이 마침내 응답했기 때문이다.
IV. 영화가 실제로 알려주는 그 이후
모항주의 어머니는 아들을 학교에서 데리고 나온다. 그 엔지니어가 다시 다른 기숙 시설에 보내려 하자 거부하고, 아들과 리옹으로 간다. 모항주는 장학금을 받아 음악원에 들어가고, 훗날 이름난 지휘자가 된다.
막상스와 샤베르, 랑글루아는 라샹의 학생 학대를 고발한다. 아이들이 조사를 받고 교장은 해임된다. 마티유는 남은 평생 음악을 가르치지만 명성을 좇지는 않는다. 영화는 그가 이후 퐁 드 레탕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거나, 어느 이름 없는 소도시에만 살았다거나, 죽을 때까지 아무도 자신의 일기를 읽지 않을 줄 알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페피노가 모항주에게 일기를 건넬 때는 분명히 말한다. 마티유는 이 일기가 모항주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고.
이 세부가 중요한 것은 겸손이 자신을 지워야 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티유는 기록을 남겼고, 그것이 훗날 다른 사람에게 닿는 것도 허락했다. 다만 그때의 일을 세상의 명성으로 바꾸어 받지 않았을 뿐이다.
V. 유명한 지휘자가 영수증이 될 수는 없다
모항주의 이후 삶은 누군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었기에 생겨난 실제 결과다. 마티유는 그 목소리를 발견하고, 리옹 음악원에 연락하고, 어머니와 이야기하면서 재능이 계속 자랄 길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이 인과관계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그 지휘자가 마티유의 일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영수증이 될 수는 없다. 코르뱅에게는 이름난 음악 경력이 생기지 않는다. 르케렉이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 대부분은 이야기에서 사라진다. 훗날 돌아오는 페피노도 일기장을 든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목소리를 들어본 일이 오직 한 아이가 훗날 유명해졌기 때문에 가치 있다면, 즉석에서 만들어낸 악보대와 보조 지휘자, 높고 낮은 모든 성부, 자신 없이 노래하던 아이들, 다른 아이들이 던진 종이비행기는 모두 실패한 투자가 된다. 그러나 마티유가 해온 일 전체가 바로 그 계산에 맞선다. 한 사람의 자리는 장래 수익에 따라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VI. 행동할 때는 결말을 알 수 없었다
르케렉의 벌을 바꿀 때 마티유는 막상스가 회복할지 알지 못했다. 합창단을 꾸릴 때는 라샹이 허락할지, 동료들이 도울지, 더구나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알지 못했다. 모항주에게 독창을 시작하라는 손짓을 보낼 때도, 그 아이가 나중에 음악원에 합격하고 실제로 장학금을 받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어떤 일은 실패로 끝났다. 몽당에게는 끝내 가닿지 못했고, 마티유가 해고되면서 합창단도 끝났으며, 모항주의 어머니를 향한 마음도 돌아오지 않았다. 반대로 어떤 결과는 기대를 넘어섰다. 라샹의 학대가 폭로되었고, 모항주는 지휘자가 되었으며, 페피노는 마티유의 이야기와 계속 이어져 있었다.
앞날이 불확실하다고 모든 개입이 저절로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행동할 이유는 성공에 앞서 이미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르케렉은 자신이 다치게 한 사람을 마주해야 한다. 그 상처는 한 관계 안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코르뱅은 합창단에 남아야 한다. 노래를 못한다고 아이를 버려도 되는 존재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이유들은 엔딩 크레디트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VII. 마당에는 이미 답이 도착해 있었다
마티유가 빈손으로 떠난 것은 아니다. 버스를 타기도 전에, 음악원 입학이나 라샹의 해임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더구나 수십 년 뒤 일기가 모항주에게 전해지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하나의 답이 이미 그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모든 아이가 잘 살게 되리라는 약속은 아니었다. 그보다 구체적인 것이었다. 반듯한 글씨, 틀린 글자, 악보의 음표, 잠긴 문 뒤에서 들려오는 합창이었다. 마티유가 시작한 실천은 이 흔적들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는 누가 말하고 있는지 안다.
훗날의 성공은 이야기를 더 이어주고 더 깊은 인과관계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뒤늦게 가치를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더는 처리해야 할 사건으로만 취급되지 않고, 자기만의 답을 돌려보낼 자리를 얻었을 때, 그 작은 행동은 이미 온전해진다. 종이비행기는 아직 미래를 알 수 없을 때 그 답부터 도착하게 한다.
이 글은 크리스토프 바라티에가 연출하고 필리프 로페스-퀴르발과 공동 각본을 쓴 2004년 영화 《코러스》(Les Choristes)를 다룬다. 이 작품은 1945년 영화 《La Cage aux rossignols》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