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 · 영화 읽기 · 1 / 3
이 학교의 운영 원칙은 단 두 단어다
이 글의 목차
1949년, 클레망 마티유가 프랑스 시골의 회색 석조 건물에 도착한다. 문 앞에는 ‘퐁 드 레탕’, 곧 ‘연못의 바닥’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교장 라샹은 이곳의 운영 원칙을 단 두 단어로 설명한다.
행동과 반응.
누군가 행동하면 학교가 곧바로 반응한다. 범인을 찾지 못하면 아무 아이나 하나 골라 독방에 가두고, 누군가 밀고할 때까지 모두의 놀이와 면회를 금지한다. 이 원칙은 벌주는 방법만 정하지 않는다.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도 어른들에게 가르친다. 아이는 행정적 처분을 기다리는 잠재적 사건이다.
I. 당장 다음 1분을 다스리는 데는 효과가 있다
퐁 드 레탕의 아이들은 그저 해롭지 않은 상징이 아니다. 유리창을 깨고, 훔치고, 담배를 피우고, 어린 학생에게 돈을 뜯고, 함정을 설치하고, 싸운다. 수위와 의무 담당 일을 함께 맡는 막상스는 눈을 크게 다친다. 앞서 받은 벌에 앙심을 품은 르케렉이 문에 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예순 명쯤 되는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기관이 이런 위험을 없는 셈 칠 수는 없다.
‘행동과 반응’은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 효과가 있다. 제재는 빠르고 누구나 그 뜻을 안다. 연대 처벌은 동료 아이들마저 감시자로 만든다. 침묵에는 대가가 붙고, 밀고는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누구 하나 깊이 알아가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질서를 되찾을 수 있다.
하지만 즉각적인 복종이 곧 교육은 아니다. 혼란을 잠깐 눌러놓았다고 피해까지 줄어든 것도 아니다. 어떤 규칙은 다음 달의 적대감을 키우는 방식으로 다음 1분을 통제한다.
II. 아이 대신 잘못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 방식에서는 규칙을 어긴 순간에야 아이에게 관심이 쏠린다. 유리창을 깨거나, 어른에게 욕하거나, 시계를 훔치거나, 다시 독방에 들어가야 행정의 눈에 그 아이가 선명해진다. 기관은 조치가 필요한 행동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두고 한 사람을 안다고 말한다.
연대 처벌은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누구의 잘못인지 밝혀지기도 전에 처벌은 행동과 분리되어 여러 몸에 나뉘어 가해진다. 정보가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이 절차는 진실을 먼저 알아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이름을 대도록 고통으로 조건을 만들어낸다.
아이들도 그에 맞는 교훈을 배운다. 권위자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도 전에 고통을 줄 수 있다면, 영리한 대응은 정직함이 아니다. 더 잘 숨기고, 힘에는 힘으로 맞서고, 다음번 잘못은 더 들키지 않게 저지르는 것이다.
III. 라샹도 그 공식 안에서 산다
라샹은 잔인하다. 그렇다고 영화가 그를 악역의 틀 하나로만 빚지는 않는다. 규율이 잡히면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혼자 교장실에서 종이비행기를 접기도 한다. 그는 이 외딴 학교를 벗어나 승진하고 훈장을 받고 싶어 한다. 마지막에 마티유와 다툴 때는 교육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고 인정한다. 누군가는 간수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그가 맡고 있는 자리를 정확히 드러낸다. 그에게 아이들은 상부에 흠 없는 실적을 보여주기 위해 억눌러야 할 잠재적 사고다. 백작 부인이 노래를 듣고 싶어 하면 합창단은 쓸모가 생기고, 창단의 공도 자기 몫으로 돌린다. 그러다가 합창단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면 곧바로 금지해버릴 수 있다.
간혹 드러나는 동심이 폭력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한 평범한 사람을 제도가 어떻게 점점 좁은 틀 안에 가두는지 보여준다. 그의 교장실에서 먼저 나오는 물음은 ‘이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고 있는가’가 아니다. ‘무슨 처분을 내려야 이곳을 계속 통제하고 내 이력도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가’다.
IV. 다친 어른과 죽은 아이
막상스는 눈의 상처가 감염되어 죽은 것이 아니다. 마티유는 그가 회복할 때까지 르케렉에게 돌보게 한다. 막상스는 나중에 학교로 돌아와 아이들과 소풍을 가고, 끝내 동료들과 함께 라샹을 고발한다.
그러나 이 학교의 역사에는 이미 죽은 아이가 있다. 막상스는 요양 중 무통의 이야기를 꺼낸다. 모두가 가망 없다고 여겼고, 끝내 지붕에서 뛰어내린 소년이다. 영화는 그 아이에게 구원의 이야기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마티유의 합창단이 생기기도 전에 이 처벌 기관은 이미 한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만 남긴다.
두 사람의 삶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막상스의 죽음을 지어내면 마티유가 시도한 다른 방식까지 실패로 써버리게 된다. 실제의 대비는 더 날카롭다. 르케렉은 자신이 다치게 한 바로 그 사람 앞에 서고, 그곳에서는 여전히 관계가 생겨날 수 있다. 반면 제도의 기억에 남은 무통은 대체로 ‘통제할 수 없었던 그 아이’일 뿐이다.
V. 몽당은 잘못도 저질렀고 누명도 썼다
몽당은 소년 감화원에서 실험 대상으로 보내져 온다. 더 너그럽다고 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나이가 더 많고 폭력적이며 위협적인 아이다. 교직원의 시계를 훔치고, 페피노에게 돈을 뜯고, 더 어린 아이들을 위협하며, 자신을 함께하게 하려는 시도도 망쳐놓는다. 영화는 그가 가져오는 위험을 감추지 않는다.
학교에서 20만 프랑이 넘는 돈이 사라진 때에 몽당도 도망쳤으니, 의심에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심은 증거가 아니다. 경찰이 몽당을 데려오자 라샹은 30분 동안 계속 때린다. 몽당은 마침내 달려들어 교장의 목을 조른다. 라샹은 그 반격을 자백으로 간주하고 경찰에게 데려가라고 한다.
돈은 나중에 코르뱅의 하모니카 옆에서 발견된다. 코르뱅은 열기구를 사고 싶어 돈을 가져갔다고 인정한다. 그래도 라샹은 몽당에 대한 판단을 돌이키지 않는다. 이번 일에서 결백했더라도 그런 부류는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분류가 사건보다 강해졌다. 한 사람이 ‘교화 불가능’이라는 칸에 들어가고 나면, 잘못된 판단은 더 이상 바로잡아야 할 오류가 아니다. 제도가 그 사람이 언젠가 저지를 것이라고 여기는 일에 조금 일찍 판결을 내렸을 뿐인 셈이 된다.
VI. 그래도 불을 지른 사람은 몽당이다
몽당은 나중에 학교로 돌아온다. 그날 마티유와 막상스가 아이들을 데리고 숲으로 간 사이, 그는 빈 학교 건물에 불을 지른다. 마침 기숙사에 아무도 없었기에 죽은 아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몽당이 처음부터 아무도 해치지 않는 항의만 하려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이 방화의 행위자를 라샹으로 바꿔놓지는 않는다. 행동한 사람은 몽당이며, 그 행동은 여전히 그의 것이다. ‘행동과 반응’을 더 정확하게 비판하려면, 제도가 이후의 모든 범죄를 기계적으로 만들어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다루기 어려운 한 청소년에게 모욕과 구타와 추방으로 대응한 뒤, 자신도 빚어내는 데 한몫한 보복을 들어 처음의 분류가 줄곧 옳았다고 입증하려 한다는 데 있다.
VII. 모두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달라진 것은 있다
영화는 노래가 모두를 구한다는 위로의 이야기도, 마티유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비관의 이야기도 아니다. 몽당은 끝내 회복의 관계 밖에 남고, 마티유가 해고되면서 합창단도 해체된다. 그러나 막상스와 샤베르, 랑글루아는 나중에 함께 라샹의 학대를 고발한다. 아이들은 조사를 받고, 라샹은 결국 해임된다.
교장 한 명을 해임했다고 해서 퐁 드 레탕의 구조가 바뀌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영화는 그 이후를 충분히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다른 방식의 실천이 남기는 결과가 듣기 좋은 노래 몇 곡에 그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때 복종하던 어른들이 질서 유지와 아이 돌보기를 구별하게 되고, 끝내 입을 연다.
‘행동과 반응’은 조치해야 할 행동 하나만 알아본다. 교육은 다른 곳에서 시작된다. 누가 그 일을 했는가. 그 행동은 누구에게 가닿았는가. 아직 어떤 회복이 가능한가. 그리고 이미 알려진 최악의 행동만으로 한 사람의 미래를 미리 다 써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은 크리스토프 바라티에가 연출하고 필리프 로페스-퀴르발과 공동 각본을 쓴 2004년 영화 《코러스》(Les Choristes)를 다룬다. 이 작품은 1945년 영화 《La Cage aux rossignols》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