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 · 영화 읽기 · 2 / 3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칸 안만 들여다본다
이 글의 목차
박 사장이 긋는 선
박 사장의 말에는 되풀이해 나오는 단어가 있다. ‘선’이다. 영화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말하는 사람은 박 사장이다. 이 집의 다른 사람들은 그 단어를 쓰지 않는다. 그 선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본 사람도 없다.
그 말을 할 때 그의 어조는 무심하다. 누군가를 꾸짖는 말투가 아니며, 때로는 칭찬까지 담겨 있다. 운전기사 기택은 괜찮은 사람인데, 무엇보다 선을 넘지 않아 좋다고 한다. 그러다가 기택이 선을 넘을 뻔한 적도 몇 번 있다고 말한다. 가령 자신과 아내의 사이가 어떤지 물었을 때다.
이 선이 무엇을 기준으로 그어지는지 잘 보아야 한다. 회사 규정도, 고용계약의 조항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회규범도 아니다. 그것은 이 사람 개인의 안락함이 미치는 범위다. 그 안에서는 기분이 좋고, 누군가 경계를 넘어오면 기분이 나빠진다.
다시 말해 이 선의 좌표 원점은 자기 자신이다. 어디에 선을 그을지는 오로지 자신의 느낌에 달려 있다. 그 느낌을 누구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설명을 요구한 사람도 이제껏 없었다.
이 집의 모든 사람은 자기 칸 안만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칸 안에서는 저마다의 논리가 말끔히 들어맞는다. 그 칸들을 이어 붙인 것이 이 집이다. 박 사장의 선은 그중 가장 알아보기 쉬운 칸이다. 본인이 이름까지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같은 비
그날 밤 폭우가 내린다. 도시 전체에 내리는 비다. 같은 구름에서 같은 시간에 쏟아진 빗물이 두 집 위로 떨어진다. 그런데 두 집에서 그 비는 전혀 다른 일이 된다.
박 사장 집에서 비가 가져온 결과는 캠핑 취소다. 예정보다 일찍 도시로 돌아와 집에 들어오고, 길이 막혔다고 몇 마디 투덜거린다. 막내가 마당에 친 텐트가 젖는다. 다음 날에는 평소처럼 일어나 평소처럼 아침을 먹는다.
기택의 집에서는 반지하가 물로 가득 찬다. 변기에서 물이 솟구치고 살림살이가 떠오른다. 옷과 신발과 종이 상자들이 수면 위를 맴돈다.
그날 밤 거리 하나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체육관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잔다. 기정은 물을 뿜어내는 변기 뚜껑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집 안에서 수면 위에 남은 자리는 그곳뿐이다.
다음 날 아침 박 사모님이 기택에게 전화를 건다. 목소리는 들떠 있고 말도 빠르다. 어젯밤 비 덕분에 오늘 날씨가 이렇게 좋다고 한다. 오염 물질도 말끔히 날아갔으니 다송이 생일 파티를 열기에 딱 좋다는 것이다.
빈정대는 말이 아니다. 박 사모님의 칸 안에서 어젯밤 비가 한 일은 캠핑 하나를 취소시키고 좋은 날씨를 가져다준 것이 전부다. 기택은 전화 저편에서 대답만 한다. 한마디도 더 보태지 않는다. 방금 체육관에서 나온 참이며, 남들이 기부한 옷을 입고 있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이 작동 방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같은 일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저마다 자기 칸에 들어온 부분만 본다. 어느 쪽도 틀린 말을 하지 않고, 어느 쪽도 꾸며서 말하지 않는다.
체육관에서 보낸 밤
체육관 바닥에 수백 명이 함께 누워 있다. 기부받은 담요들이 사람들 사이를 가른다. 기택이 아들에게 말을 건넨다. 영화에서 그가 가장 길게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라고 한다. 계획이 있으면 일이 반드시 어긋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계획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긋난 셈이 아니니,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흔히 실패자의 자조로 읽힌다. 그러나 기택의 칸 안으로 돌아가 보면 정확한 결론이다. 그가 평생 세운 계획은 하나같이 무너졌다. 대만 카스텔라 가게를 열었지만 망했다. 대리운전도 실패로 끝났다. 지금의 계획 역시 무너지는 중이다.
자신의 삶에서 계획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 사람에게,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략이다. 게으른 것도 아니고 세속을 초월한 것도 아니다. 살아온 세월의 자료를 가지고 계산한 결과다.
이 말이 성립하는 경계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기택의 칸 안에서만 성립한다. 같은 밤 아들 기우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어떻게든 일을 수습할 궁리를 아직 놓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담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바닥에 누워 있다. 하지만 각자의 칸 안에서 돌아가는 셈법은 전혀 다르다. 누구도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다. 누구도 한마디를 더 잇지 않는다.
쫓겨난 두 사람
기택은 쫓겨난 운전기사가 다른 일자리를 구했을지 물은 적이 있다. 기우는 젊고 몸도 건강하니 분명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답한다. 하지만 기정은 말을 끊고 아버지에게 먼저 눈앞의 자기 가족부터 걱정하라고 한다. 그렇다고 쫓겨난 두 사람이 그 뒤 어떻게 사는지가 이 가족이 정말 알아내려는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단순히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걱정하는 말 한마디가 이들을 결백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생각은 잠시 경계를 넘었지만, 근거 없는 위안과 자기 가족의 절박함에 곧 다시 끌려온다.
네 사람이 모두 일자리를 얻은 것을 축하하며 작은 식당에 앉았을 때도, 식탁의 화제는 앞으로 어떻게 손발을 맞추고 들키지 않을 것인가다. 그 두 사람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없다.
그들의 칸 안에서 이 문제는 완결되어 있다. 자리는 네 개다. 먼저 있던 사람들을 치우고 자신들이 들어간다. 그러면 문제를 다 푼 셈이다. 밀려난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가끔 질문으로 떠올라도, 반드시 풀어야 할 부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비 오는 밤 문광이 돌아와 문을 두드린다. 자신의 칸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데리고 돌아온다. 지하실에 숨겨 둔 남편, 몇 년 동안 날라다 준 밥, 갑자기 끊긴 일자리, 그리고 더는 갈 곳 없는 처지가 함께 돌아온다.
그 순간 두 칸이 충돌한다. 그날 밤이 되기 전까지 기택 가족은 앞서 한 자기 행동의 다른 끝에 무엇이 연결되어 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행방을 잠깐 묻기는 했지만, 그 반대편을 온전히 자신들의 화면 안으로 들이지는 않았다.
문광의 칸
문광의 칸은 경계가 아주 뚜렷하다. 종이에 그려 낼 수 있을 만큼 뚜렷하다. 그 안에는 오직 한 사람, 지하실에 숨어 있는 남편만 있다.
문광은 몇 년 동안 이 집에서 고용주의 모든 살림을 돌보는 한편, 집 아래 남편을 숨겨 놓고 먹여 살렸다. 전 집주인의 눈도 피했고 박 사장 가족의 눈도 피했다. 매일 거짓말을 하고, 동선을 조정하고, 머릿속으로 계산해야 하는 일이다. 하루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용주를 잘 돌본다. 박 사장이 꼽는 단점도 딱 하나뿐이다. 남편도 잘 돌본다.
문광에게 두 일은 충돌하지 않는다. 자기 칸에는 ‘집주인은 자기 집에 누가 사는지 알 권리가 있다’는 항목이 없기 때문이다.
해고당한 뒤 돌아와 내세우는 부탁도 여전히 그 칸 안에 있다. 계속 밥을 가져다주게 해 달라는 것이다. 무릎을 꿇고 빈다. 이틀에 한 번만 내려오게 해 주면 된다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돈도, 복직도, 복수도 요구하지 않는다.
나중에 휴대전화를 꺼내 협박하기 시작하는 것 역시 같은 칸의 연장이다. 그 한 사람을 위해 다른 네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 실행에 옮길 때도 주저하지 않는다.
한 칸에 한 사람만 담아 두면 돌봄은 더없이 단단해진다. 동시에 그 밖의 것들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영화에서 가장 깊은 애정이 깃든 칸이면서, 가장 먼저 몸싸움에 나서는 칸이다.
근세의 칸
지하실의 남자는 이 작동 방식을 끝까지 밀고 간다. 그의 칸은 너무 작아서 아무것도 담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도 완결되어 있고, 그 안의 논리는 여전히 맞아떨어진다.
근세는 빚쟁이를 피해 몇 년째 이 집 아래 산다. 햇빛도 보지 못하고 밖에도 나가지 못한다. 아내가 날라다 주는 밥을 먹고, 낡은 라디오 한 대로 바깥 소식을 듣는다. 그런 생활을 오래 해 왔지만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그가 날마다 하는 일이 있다. 위층으로 통하는 쪽을 향해 절하며 박 사장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나중에 기택에게도 말한다. 사장님이 먹여 주고 살 곳을 주었다고.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절실함이 목소리에 묻어난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위층에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매일 밤 박 사장의 차가 마당으로 들어오면 머리로 지하실 스위치를 들이받아 계단의 센서등을 깜박이게 한다. 그에게 그것은 인사다. 아무도 답하지 않아도 빠뜨리지 않고 보내는 인사다.
감사는 한쪽으로만 흐른다. 그는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날마다 절한다. 박 사장은 집 아래 사람이 산다는 것도, 전등이 왜 자꾸 깜박이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칸은 이만큼까지 작아질 수 있다.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과, 스스로 은인으로 삼은 사람 하나만 남는다. 정작 그 은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칸에 단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다. 들려오는 것은 차가 들어오는 소리뿐이다.
다송
이 집에는 계속 자기 칸 바깥을 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두 번 보았고 두 번 다 제대로 보았다. 일곱 살짜리 막내아들이다.
다송은 냄새를 처음 알아챈 사람이다. 네 사람이 모두 이 집에서 일하게 된 뒤, 가까이 다가가 킁킁 냄새를 맡더니 말한다. 이 사람들은 냄새가 똑같다고. 그 한마디에 가족은 크게 놀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 비누와 세제를 바꾸어야 하는지 의논한다.
어른들의 반응은 덮어 두는 것이지 더 묻는 것이 아니다. 냄새가 같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묻는 사람이 없다. 왜 냄새를 맡아 보았는지, 하필 그 아이가 왜 그것을 알아챘는지 묻는 사람도 없다.
다송은 나중에 깜박이는 전등도 발견한다. 스카우트 활동에서 모스 부호를 배운 적이 있다. 마당에 서서 신호를 하나씩 적으며 해독하려 한다. 글자 하나를 잘못 읽고 끝까지 풀지도 못하지만, 분명히 신호를 보았다. 누군가 말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안다.
아무도 아이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장난쯤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도 더 묻지 않는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자기 칸 밖을 보는 사람은 일곱 살이다.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어른은 하나도 없다.
그 신호는 나중에 한 번 더 온다. 이번에는 인사가 아니라 구조 요청이다. 여전히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그때 마당에서는 파티가 한창이다.
거실 탁자 아래의 몇 분
다시 거실 탁자 아래의 장면으로 돌아가, 이 칸들을 한 화면 안에 놓아 보자. 네 사람이 탁자 밑에 엎드려 있고, 바로 위 소파에서는 두 사람이 대화한다. 집 안에는 전등 하나만 켜져 있다.
그 몇 분 동안 집 안에는 여섯 사람, 여섯 개의 칸이 있다. 소파의 둘은 자기 집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고용인 하나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관한 말이다. 바닥의 넷은 언제 기어 나갈 수 있을지 가늠한다. 지하실에는 또 두 사람이 있다. 어둠 속에서 위층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린다.
여섯 사람이 지금 하는 행동에는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성립하는 이유가 있다. 다른 네 사람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이해되는 행동이라고 해서 앞선 위조와 모함, 은폐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장면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줄 뿐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갈수록 거세진다. 소파의 두 사람이 잠든다. 바닥의 네 사람은 탁자 밑에서 한 명씩 기어 나온다. 바닥에 몸을 붙인 채 문까지 가서 문을 열고 빠져나온 뒤,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
길은 내내 아래를 향한다. 계단, 계단, 또 계단. 그다음에는 물이 고인 도로, 그다음에는 물이다. 끝까지 내려가자 물이 가슴 높이까지 찬 자기 집에 도착한다.
이 글은 2019년 극장 개봉 컬러판을 기준으로 한다. 상영 시간은 약 132분이며, 별도로 나온 흑백판은 다루지 않는다. 기정의 중국어 표기에는 ‘基婷’과 ‘基静’이 있는데, 중국어 원문은 ‘基婷’으로 통일했다. 한국어판에서는 본래 이름인 ‘기정’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