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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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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DUBITO · 영화 읽기 · 1 / 3

그는 처음부터 다른 이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Han Qin (秦汉) · 한국어판 공개: 2026년 10월 7일

이 글의 목차

중국어 원작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다시 쓴 한국어판

1939년, 토스카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 한 대가 비탈길을 내달린다. 차에 탄 사람들은 길가의 사람들에게 비키라고 필사적으로 손을 흔든다.

왕의 행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 몸짓을 파시스트식 경례로 오해한다. 저마다 팔을 들어 답례하며 환호한다.

차는 마을로 돌진해 환영 대열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깡마른 남자 하나가 차에서 뛰어내린다.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귀도는 이렇게 등장한다.

몇 분 뒤, 시골 헛간 옆에 서 있는 그에게 하늘에서 여자가 떨어진다. 건초 다락에서 추락한 여자가 마침 그의 품에 안긴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여자를 보며 인사한다. “좋은 아침이에요, 공주님.”

이 한마디는 이후 이 영화의 전부가 된다.

I. 전반부는 떼어 내도 되는 준비 장면이 아니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전반부는 철저한 코미디다. 여자를 쫓아다니고, 모자를 바꿔 쓰고, 우연을 꾸며 내고, 약혼식 연회를 뒤집어 놓는다. 영화를 다 보고 돌아보면, 이 앞부분은 뒤에 닥칠 참혹함을 더 도드라지게 하려는 장치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뒤의 쓴맛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앞에 놓아둔 단맛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읽으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

전반부가 먼저 보여 주는 사실은 하나다. 이 사람은 원래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

나중에 귀도가 수용소에서 하는 일들은 궁지에 몰려 그 순간에만 발휘한 기적이 아니다. 부성애가 갑자기 깨운 잠재력만으로 설명되지도 않는다. 늘 써 오던 자기 방식이었고, 다만 그것을 가장 끔찍한 곳에서 써야 했을 뿐이다.

그 게임이 기차 승강장에서 불현듯 떠올린 아이디어에 불과했다면, 영화는 위기 앞에서 한 아버지가 얼마나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게임은 전반부에서 펼쳐 보인 삶의 방식 전체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영화의 질문도 달라진다. 상상력이 더는 현실을 바꿀 수 없을 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II. 강요된 엄숙함을 연기로 무너뜨리다

귀도가 사는 세계에는 남들이 미리 써 놓은 각본이 사방에 널려 있다.

서점을 여는 데 필요한 허가는 관리의 손에 달렸다. 도라의 가족은 그녀의 결혼 상대를 이미 정해 놓았다.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로마에서 올 장학사를 기다린다. 이른바 우수한 인종에 관해 전교생과 교사들에게 강연할 사람이다.

귀도는 장학사 행세를 하며 초등학교 교단에 선다. 겉옷을 벗고 책상 위로 뛰어오른 그는 자기 귀와 배꼽과 다리를 가리키며, 이른바 순수한 인종의 특징을 보라고 한다.

영화에서 가장 날카로운 대목 중 하나가 가장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 인종 이론은 애초에 사뭇 진지한 무대가 있어야만 그럴듯하게 성립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무대를 빼앗아 자기 배꼽을 가리키며 그 이론을 진지하게 실연하는 순간, 권위는 허물어지고 터무니없음만 남는다.

귀도는 조목조목 논박하지 않는다. 끝까지 연기해서 그 허위를 드러낸다.

다른 장난들은 그보다 소소하다. 낯선 사람과 이리저리 바꿔 쓰는 모자, 실수로 로돌포의 모자에 들어간 달걀, 하늘에서 떨어지는 열쇠, 몇 번이고 연출하는 우연한 만남. 물론 이 모두가 같은 정치적 무게를 지니지는 않는다. 재미있다고 해서 저절로 무해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매번 같은 일을 해낸다. 눈앞에 짜인 상황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은 아니라고 느끼게 한다.

III. 도라는 속아서 따라간 것이 아니다

도라는 어리석지 않다. 장치 하나하나를 어떻게 꾸몄는지는 몰라도, 귀도가 줄곧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다. 그녀가 웃는 것은 장난의 흔적이 감쪽같이 가려졌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 연기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겠다는 뜻이다.

이 점은 약혼식 연회에서 가장 선명해진다.

도라는 어머니가 이미 승인한 미래 안에 앉아 있다. 관료 로돌포가 바로 그 미래의 얼굴이다. 연회의 모든 순서는 정해졌고,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일뿐이다.

그때 귀도가 삼촌의 말을 타고 들어온다. 반유대주의자들이 초록색으로 칠하고 유대인을 모욕하는 글씨까지 써 놓은 말이다. 귀도에게 그 모욕을 지울 시간은 없다. 대신 모욕을 실어 나르던 것을 그곳을 떠날 수단으로 바꾼다.

하지만 말이 알아서 도라를 데려가지는 않는다. 데려가 달라고 말한 사람도 도라이고, 손을 내밀어 말에 올라탄 사람도 도라다.

귀도는 선택할 길을 열었을 뿐, 그녀 대신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는 끈질기게 구애한 끝에 여자를 차지하는 정복담이 아니다. 진정 눈여겨볼 것은 다른 데 있다. 누군가 이미 짜인 인생에 문 하나를 내고, 그 문 안에 있던 사람은 여전히 자기 대답을 할 권리를 갖는다.

IV. 누가 위험을 지고, 누구에게 출구를 내주는가

귀도의 장난은 번번이 자신을 위험에 드러낸다. 장학사 행세가 들통나 체포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다. 약혼식 연회에 난입해 망신을 준 상대는 서점 허가를 막을 수도 있는 지역 관리다. 교단 위의 우스꽝스러움 역시 자기 몸으로 떠안는다.

물론 희극적 장난에 주변 사람이 전혀 휘말리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도 영화가 거듭 강조하는 윤리적 방향은 분명하다. 자기가 만들어 낸 일의 위험은 되도록 스스로 짊어지고, 그 일이 열어 놓은 여지는 다른 사람에게 내준다.

서점 이야기는 특히 정확히 짚어야 한다. 영화 전반부에서 귀도는 서점을 열려고 허가 절차를 거듭 밟으며 관료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린다. 5년 뒤에는 서점이 실제로 문을 열었고, 도라와 가정을 이루어 아이도 낳았다.

그렇다고 가로막는 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파시즘은 이미 거리와 학교에 스며들었고, 누가 이곳에 속할 자격이 있는지를 국가가 판정하는 분류 체계 안에도 자리 잡았다. 서점이 증명하는 것은 그보다 작다. 그 구조들이 삶의 길을 완전히 틀어막기 전, 귀도는 가족을 위해 평범하게 살아갈 작은 자리를 실제로 마련한 적이 있다.

V. 나쁜 일은 조금씩 스며든다

이 영화가 시대를 다루는 방식은 독특하다. 재앙을 한꺼번에 들이닥치게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초록색으로 칠해지고 반유대주의 모욕이 적힌 말이 있다. 귀도는 그 말을 타고 떠난다.

그다음에는 표지판 하나가 나온다. 귀도와 아들이 지나가는 가게 입구에 유대인과 개는 들어올 수 없다고 쓰여 있다. 아들이 이유를 묻자 귀도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가게마다 자기 규칙이 있으니, 다른 가게에서는 스페인 사람과 말이 못 들어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 서점은 어떠냐고 아들이 묻는다. 두 사람은 거미와 서고트족을 금지할지 의논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첫째, 표지판의 말이 곧장 다섯 살 아이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가 누구인지를 남김없이 규정하지 못하게 한다. 그 문구는 잠시, 둘이 함께 지어내도 되는 우스꽝스럽고 제멋대로인 규칙들 사이에 놓인다.

둘째, 관객은 아무도 속지 않는다. 우리는 표지판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모두 보았고, 그것이 어느 가게 주인의 별난 취향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나중에 이 가족을 기차에 실어 보내는 힘은 바로 이 분류 체계에 부여된 국가 권력이다.

이 이중 구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방식이다. 아이는 하나의 이야기를 보고, 관객은 아이에게 가려진 그 너머를 본다.

VI. 같은 사람이 다른 장소로 들어간다

1944년, 조슈아의 생일에 기차가 찾아온다.

귀도와 삼촌, 아이가 끌려간다. 도라는 유대인도 아니고 체포 명단에도 없다. 그런데도 역으로 달려가 남편과 아들이 실린 기차에 타겠다고 끝까지 요구한다.

이 선택은 약혼식 연회 장면에 화답하지만, 그때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귀도는 한때 도라에게 정해진 인생을 떠날 출구를 열어 주었다. 이제 도라는 남편에게 강요된 위험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기를 선택한다. 어느 쪽도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대답할 권리는 선택하는 사람의 손에 남아 있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장소를 바꾼다. 사람은 바꾸지 않는다.

귀도가 가져가는 것은 아레초라는 작은 도시에서 줄곧 써 온 방식이다. 남이 강요하는 각본을 받아 들고 그 곁에 즉흥적으로 두 번째 판본을 쓴다. 위험은 가능한 한 스스로 감당한다. 그러고는 두 판본 사이의 좁은 틈을 이용해 다른 사람이 행동 하나를 더 할 수 있게 한다.

이전에는 그 틈에 사랑과 웃음이 담겼다.

이제 그 틈은 다섯 살 아이를 다음 날 아침까지 품고 있어야 한다.

이 글은 로베르토 베니니와 빈첸초 체라미가 공동 각본을 쓰고, 베니니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1997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바탕으로 한다.

중국어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