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읽기 · 10
거북은 한 사람에게만 노래하겠다고 했다―사냥꾼이 사람들 앞에 데려와도 침묵할 권리는 남을까
《사냥꾼과 거북》―한 사람에게 노래해 준 일이, 모두 앞에서 공연해야 할 의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 가 보는 숲에 들어간 사냥꾼은 노래하는 이를 보기 전에 노랫소리부터 듣는다. 거북 한 마리가 앞에 작은 하프를 걸고 연주하며 노래하고 있다. 사물에 자기 뜻을 강요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지, 사물이 사람에게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노래다.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사냥꾼은 나뭇가지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놀라 바라본다. 그 뒤로도 몇 번이고 같은 곳을 찾는다. 처음부터 잡아갈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러 길을 나서 듣고 싶어 하는 청중이었던 시간이 먼저 있었다.
바커와 싱클레어가 1917년에 엮은 이 이야기에서 문제는, 더 가까워질 듯 보이는 제안으로 시작한다. 매번 숲까지 가고 싶지 않은 사냥꾼은 거북을 집에 데려가 날마다 편안하게 듣게 해 달라고 설득한다. 거북은 동의하되 그에게만 노래하겠다고 말한다. 숲을 떠나는 데 동의했다고 아무 앞에나 서기로 약속한 것은 아니다. 장소는 바뀌어도 누구에게 들려줄지에 관한 허용 범위는 분명하다.
처음에는 바라던 생활을 얻었지만 사냥꾼은 곧 만족하지 못한다. 이런 거북이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이 알면 자신에게 얼마나 영광이 될까 생각한다. 비밀은 아는 사람에게서 다른 아는 사람으로, 마침내 족장의 귀까지 전해진다. 족장이 집회로 불러 말하게 하자, 사람들은 거북이 노래하고 하프도 탄다는 이야기에 웃으며 믿지 않는다. 사적인 만남에만 속하던 사실이 갑자기 남들 앞에서 자기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일이 된다.
사냥꾼은 자기가 지어내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노래는 꿈이 아니고 거북도 실제로 집에 있다. 그래서 비웃음을 받을수록 증명하고 싶어진다. 이튿날 거북을 데려와 모두 직접 듣게 하겠다고, 못하면 죽어도 좋다고 한다. 사람들은 받아들이면서, 거북이 정말 공연하면 반대로 자기들을 마음대로 벌해도 된다고 약속한다. 양쪽 모두 무거운 것을 걸었다. 정작 탁자 위에 서서 입을 열어야 할 당사자에게는 묻지 않았다.
그날 사냥꾼은 만족했다. 드디어 명예를 되찾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거북이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아직 듣지 못한 다른 대답도 이미 받은 것처럼 확신했다. 이 사람들 앞에서도 노래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한 번 들었다고 다음번에도 뜻대로 불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 있음을 아는 것과, 그 능력을 어디에 쓸지 정할 자격을 갖는 것도 다르다. 다시 물으면 구별할 수 있던 두 가지를 자기 목숨을 건 약속으로 단단히 묶어 버린 것이다.
이튿날 준비된 탁자에 거북과 하프가 놓이고, 사람들은 둘러앉아 기다린다.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이야기는 사람들이 참을성 있게 사냥꾼과 거북에게 기회를 주려 했다고 일부러 말한다. 침묵을 보자마자 화낸 것이 아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냥꾼이 아무리 달래도 입을 열지 않는다. 기다림도 여전히 같은 전제에서 이어진다. 공연해야 하는데 시간이나 설득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라는 전제다.
그 참을성은 거북이 말한 조건까지 가 닿지 못한다. 앞에서 허락받은 것은 사냥꾼 한 사람에게 노래해 주는 일이었다. 지금 끈기 있게 실현하려는 것은 동의한 적 없는 공개 공연이다. 더 기다려도 두 일이 같아지지는 않는다. 때로 한쪽은 곧바로 강요하지 않고 계속 권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이미 아주 너그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가 들어 달라는 것은 '시간을 조금만 더 주세요'가 아니라 '그건 제가 동의한 범위가 아닙니다'일 수 있다.
마지막 햇빛이 사라질 때까지 거북은 침묵한다. 사냥꾼의 목이 베이고, 곧바로 거북이 입을 연다. 사람들은 놀라 서로를 보며 말한다. 저 사람은 참말을 했는데 우리가 벌써 죽였다고. 한순간 차이로, 앞에서는 거짓말의 증거로 썼던 침묵이 그 증거로서 힘을 잃었다. 처형은 끝났고, 사실은 이제야 다른 길에서 나타난다.
거북은 사냥꾼이 스스로 벌을 불렀다고 설명한다. 원래 숲에서 즐겁게 노래하고 있었는데, 그는 들으러 오는 데 만족하지 않고 비밀을 모두에게 알려 구경거리가 되게 하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에는 사람이 사물에 자기를 강요한다는 처음의 가사를 다시 부른다. 노래로 시작한 이야기가 노래로 결말을 설명한다.
그 설명은 분명히 사냥꾼의 잘못을 짚는다. 참말을 했다고 모든 일에 무고한 것은 아니다. '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이야'로 비밀을 흘리고 허락받은 범위를 넘은 책임까지 벗을 수는 없다. 사실인 정보도 자신이 마음대로 들고 가 보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자신과 지내기는 원하지만 공개되는 범위는 분명히 제한했던 다른 생명에 관한 정보라면 그렇다. 노래를 좋아하는 마음은, 가수를 소유해 명성을 얻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노랫말이 죽음의 책임을 전부 사냥꾼에게 돌리면, 다른 이들의 행동은 결말에서 사라진다. 족장과 집회는 처형으로 이야기의 참거짓을 가리는 방법을 받아들였고, 실제로 실행했다. 거북이 입을 열지 않는 것에서 사람들이 죽이기로 정하는 데까지는, 아무 판단도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놓인 것이 아니다. 사냥꾼이 죽어도 좋다고 한 말은 스스로 어떻게 위험을 만들었는지 보여 준다. 그렇다고 죽인 사람들에게 약속을 지킨 역할만 남는 것은 아니다.
집회는 믿지 않을 수도, 오늘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인정할 수도 있었다. 거북이 공연하지 않는다고 세상에 노래하는 거북이 절대 없다는 것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증명은 더더욱 아니다. 사냥꾼이 지킬 수 없는 공개 보증을 한 것은 맞다. 그래도 실패했을 때 어떻게 대할지는 따로 판단해야 한다. 사실 확인에 생사를 묶는다고 사실을 더 쉽게 알게 되지는 않는다. 아직 모르는 부분을 다시 물을 시간이 없어질 뿐이다.
거북이 입을 연 뒤 사람들은 '우리가 참말을 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한다. 적어도 잠깐은 자기 손을 보았다. '허풍 떨면 안 되는 줄 진작 알았어야지'보다 한 가지를 더 인정하는 말이다. 먼저 내기를 건 것은 사냥꾼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정하고 실행한 일 역시 있었다고 인정한다. 뒤의 말은 처형 전부를 사냥꾼의 성격 문제로 돌리기 쉽다. 누군가 먼저 잘못하면, 그 뒤의 사람들은 자기 행동에 더는 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거북의 침묵도 아무 무게 없는 경계 지키기의 승리로만 쓸 수 없다. 공개적으로 노래하기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기를 전부 알았는지, 해가 지면 사냥꾼이 죽으리라는 것을 내다봤는지는 이야기가 마음속에 들어가 설명하지 않는다. 계획한 복수를 지어내서도,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보장해서도 안 된다. 죽음 뒤에 이유를 말하게 하지만, 마지막으로 내놓은 판단과 당시에 실제 얼마나 알았는지라는, 본문에 설명되지 않은 사실은 독자가 여전히 구별해야 한다.
만일 위험을 알았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당연히 진지하게 생각할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있다고 해서 사냥꾼이 먼저 약속을 어긴 뒤 자기 목숨으로 거북에게 공연 의무를 만들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결과를 충분히 심각하게 만들기만 하면 처음의 경계는 언제나 상대가 일방적으로 취소할 수 있게 된다. '노래하면 살고, 안 하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두 선택지로 줄일 문제가 아니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끝까지 침묵을 처형으로 바꾸지 않기로 정할 수 있다.
거북은 공연하지 않고 거절을 설명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사냥꾼도 거북이 입을 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허락받지 못했다고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 길을 마련하지 않았다. 협상이 이미 있었던 것처럼 덧붙일 수는 없다. 다만 무대가 갈수록 좁아져, 모두 처음 선택한 행동을 끝까지 해내야만 하는 것처럼 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바로 이럴 때 계속 실행하기를 멈추는 일도 현장에 있는 사람이 새로 내릴 판단이지, 저절로 생기는 양보가 아니다.
이런 해석은 사냥꾼의 진짜 감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숲에서 넋을 잃고 듣고, 먼 길을 몇 번이고 걸으려 했던 시간은 나중에 영광을 탐했다고 전부 가짜가 되지 않는다. 안타까운 점은 만남을 양쪽이 계속 동의해야 하는 관계로 남겨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으로 데려온 뒤에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진귀한 물건 하나를 손에 넣었다는 뜻으로 점점 받아들인다. 다시 그 물건을 대외적인 명예를 보장할 재산으로 여긴다.
그래서 마지막 가사는 남겨 두되, 모든 책임에 관한 판단을 거기서 끝낼 필요는 없다. 사냥꾼은 자기 소망을 가수에게 강요했고, 집회는 한 번의 공연 요구를 생사를 가르는 판결로 강요했다. 두 강요는 잇따르지만, 뒤의 것이 앞의 잘못 다음에 왔다고 판단할 필요 없는 처벌이 되지는 않는다. 다시 노래한 거북의 경계는 마침내 모두에게 알려졌다. 동시에 결말에는 이제 다시 돌아와 들을 수 없는 한 사람이 남는다.
원래는 숲에 들어가기만 해도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는 노래하는 이를 더 가까이 두고도, 맨 처음 말한 조건은 갈수록 듣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말은 사냥꾼이 죽은 뒤 거북이 한 교훈만이 아니다. 곁에서 살아가던 때 이미 한 말이다. 당신에게만 노래하겠다고. 그 말을 여전히 대답할 수 있는 생명이 준 허락으로 끝까지 받아들였다면, 데려온 뒤 점점 고쳐도 되는 제한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그 탁자는 애초에 필요 없었을 것이다.
출처
현재 공개된 중국어 에세이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다시 썼다. 특정 영어 편집본에 근거한 해석이며, 원래 구전 이야기 전체의 번역이나 한 민족을 대표하는 설명은 아니다. 한 사람에게 들려주는 허락과 공개 공연을 나누고, 사냥꾼의 허락 위반, 집회의 판단과 실행, 거북이 어느 정도 알았는지라는 미결 문제를 모두 남긴다. 생명을 구할 이유의 무게를 무시하지 않되, 그 이유를 상대가 일방적으로 공연 의무를 만들 수 있는 권리로 바꾸지 않는다.
판본에 관한 주석
텍스트는 W. H. 바커와 세실리아 싱클레어가 엮은 《West African Folk-Tales》(1917)의 제XXI화 〈The Hunter and the Tortoise〉, 책 안의 119–122쪽을 따른다. 공공 영역의 전문을 참조한다. 책은 'collected and arranged'라고 밝히지만, 이 이야기에는 이름이 밝혀진 구연자, 원언어의 말 그대로를 남긴 기록, 독립적인 판본 대조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영어 편집본을 해석할 뿐, 어느 한 민족의 단일한 목소리로 보지 않는다. 사적인 허락, 사냥꾼이 스스로 목숨을 거는 일, 집회의 참을성 있는 기다림과 처형, 그 뒤 거북의 발언, 원래 가사를 보존한다. 공연 전에 거북이 내기의 모든 내용을 이미 알았다고 단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