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상나라, 왕이 무당이기도 했을 때
하나라 권력의 토대는 혈연과 무력이었다. 이 두 가지면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탄탄하지는 않았다. 버틸 수 있었다는 말은 400년 동안 통치를 이어 갔다는 뜻이다. 탄탄하지 못했다는 말은 끝내 한 겹이 빠져 있었다는 뜻이다. “왜 하필 너희 집안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깊이 들어가 답해 줄 이야기가 없었다.
하나라 권력의 토대는 혈연과 무력이었다. 이 두 가지면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탄탄하지는 않았다. 버틸 수 있었다는 말은 400년 동안 통치를 이어 갔다는 뜻이다. 탄탄하지 못했다는 말은 끝내 한 겹이 빠져 있었다는 뜻이다. “왜 하필 너희 집안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깊이 들어가 답해 줄 이야기가 없었다.
혈연은 “왕위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에만 답한다. “왕위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는 답하지 않는다. 무력은 “누가 그 자리를 지켜 낼 수 있는가”에만 답한다. “누가 그 자리에 앉아야 마땅한가”에는 답하지 않는다. 하나라는 이 두 물음을 모두 어물쩍 넘겼다. 왜 우리 집안이냐고? 우(禹)가 홍수를 다스린 공이 있으니까. 왕위는 왜 있어야 하냐고? 그런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다들 원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상나라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제대로 된 이데올로기 하나를 만들어 냈다.
그 핵심은 이렇다. 왕은 하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다.
보통 사람은 하늘, 곧 제(帝)와 상제(上帝), 조상신과 직접 소통할 수 없다. 오직 왕만 할 수 있다. 소통하는 방법은 제사와 점복이다. 왕은 제사를 주관하고 조상에게 제물을 바치며, 하늘에서 인간 세상의 사정을 대신 전해 달라고 청한다. 또 점복을 주관하여 거북의 껍데기와 짐승의 뼈에 생긴 균열에서 하늘의 뜻을 읽는다. 균열은 하늘의 언어다.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왕과 그 곁의 정인(貞人), 즉 점복 전문가뿐이다.
그러니 왕은 정치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최고 제사장이다. 사람을 다스릴 뿐 아니라 하늘과 인간 사이의 정보 통로까지 관리한다. 그의 정치적 명령에 불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를 거치지 않고 하늘과 소통할 수는 없다. 당신도 직접 신과 통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상나라의 시스템은 바로 그것을 허용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신과 소통할 권리는 왕실이 독점한다.
이것이 상나라의 구축이다. 제사 구축, 또는 신권 구축이라 부를 수 있다. 하나라의 혈연·무력 구축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 단순히 “이 자리는 우리 집안 것”이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상나라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자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없으면 하늘과 인간의 연결이 끊어진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우리 집안만 앉을 수 있다. 하늘에 있는 조상은 우리 집안의 조상뿐이니까.”
논증은 세 층이다. 왕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기능의 논증, 반드시 우리 집안이 차지해야 한다는 혈연의 논증, 반드시 내가 앉아야 한다는 제사장의 논증. 하나라에는 가운데 한 층만 있었다. 상나라는 나머지를 채워 세 층을 완성했다. 구축의 형식을 크게 끌어올린 변화였다.
1. 갑골문, 구축의 물적 토대
우리가 상나라에 관해 아는 것은 대부분 갑골문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 자료가 어떤 성격을 띠는지만 보아도 많은 것이 드러난다.
십수만 조각에 이르는 갑골 가운데 절대다수는 점복 기록이다. 내용은 없는 것이 없다. 오늘 전쟁을 해야 하는가, 올해 수확은 좋을 것인가, 왕의 치통은 나을 것인가, 어느 여인의 출산은 순조로울 것인가, 어느 조상에게 소 서른 마리를 바쳐야 하는가.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모두 점을 쳐서 결정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점복은 가끔 치르는 의식이 아니라 일상 통치의 핵심 장치였다는 뜻이다. 왕은 중대한 결정을 할 때만 점을 친 것이 아니다. 거의 날마다 점을 쳤다. 점복은 그가 권력을 행사하는 기본 방식이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제사 구축은 겉에 두른 장식이 아니라 운영체제 그 자체였다는 말이다. 하나라의 혈연 구축은 “나는 우의 후손이므로 왕이다”라는 논리였다. 일단 이 논리가 자리 잡으면 일상 통치는 통상적인 행정에 맡길 수 있었다. 정당성을 날마다 새로 입증할 필요는 없었다. 상나라는 달랐다. 상나라 왕은 매일 점복을 통해 자신과 하늘의 연결을 재확인했다. 점을 한 번 칠 때마다 작은 규모로나마 정당성이 새로 생산되었다.
여기에는 장점이 있다. 정당성이 한 번 쌓아 두고 꺼내 쓰는 재고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산되는 흐름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라의 정당성은 우가 계(啓)에게 왕위를 넘기는 순간 생산이 끝났다. 그 뒤로는 보충 없이 소모만 했으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상나라의 정당성은 날마다 채워졌다. 매일 점을 쳤고, 매번의 점복은 “하늘은 여전히 왕과 소통하고 있다. 시스템은 아직 돌아간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장점의 뒷면도 있다. 생산이 멈추면 정당성도 곧바로 끊긴다. 하나라의 정당성은 예금과 같아서 밑천을 까먹으며 버틸 수 있었다. 상나라의 정당성은 월급과 같아서 끊기면 그만이었다. 어느 날 점괘가 번번이 빗나가거나, 누군가 점복이 진짜인지 의심하거나, 왕실이 점복 기술의 독점권을 잃는다면 정당성 체계 전체가 무너진다.
이것이 제사 구축의 첫 번째 잔여항이다. 의례 체계가 쉼 없이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에 꼼짝없이 매여 있다. 의례는 멈춰서도 안 되고, 틀려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이 배워서도 안 된다. 어느 한 고리라도 끊기면 구축에 금이 간다.
2. 조상의 계보, 혈연을 신성하게 만들다
상나라 사람들은 혈연의 정당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조상을 신으로 만든 것이다.
하나라의 혈연 논리는 세속적이었다. 나는 우의 후손이고, 우에게 공이 있으므로, 나에게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공적은 역사 속의 일이라 시간이 흐르면 효력이 줄어든다. 태강(太康) 대에 이르면 “우가 홍수를 다스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할아버지 적 옛날이야기였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거의 바닥이 났다.
상나라 사람들은 다르게 했다. 그들의 조상은 역사 속에 살지 않았다. 하늘에 살았다. 죽은 선왕은 조상신이 되어 천제 곁에 자리를 얻고, 인간 세상의 화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제사를 받는 대상은 기억 속의 누군가가 아니라 여전히 권력을 가진 존재였다.
이제 혈연은 “왕위는 이 가문의 것”이라는 정치 원칙에 머물지 않는다. “이 가문의 죽은 이들은 하늘에서 신통력을 지닌다”라는 종교 원칙이 된다. 정치 원칙에는 따질 수 있다. 왜 너희 집안 사람이 왕이어야 하는가? 종교 원칙에는 그렇게 따지기가 어렵다. 그것을 의심하려면 대신 내놓을 신학이 있어야 하는데, 상나라의 세계 안에서는 아무도 그런 신학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상나라 중기 이전까지는 없었다. 훗날 주나라 사람들이 천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천명은 어느 한 가문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덕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제야 대안이 될 신학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은 뒤의 이야기다.
조상을 신성하게 만들자 혈연의 잔여항은 정치 문제에서 종교 문제로 바뀌었다. 하나라에서 혈연은 도전할 수 있는 정치적 제도였다. 후예(后羿)가 실제로 도전했다. 상나라에서 혈연은 신권이라는 껍질에 싸여 있었다. 혈연에 도전하는 일은 곧 신에게 도전하는 일이 되었고, 치러야 할 대가도 훨씬 커졌다.
그렇다고 신성화가 잔여항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잔여항이 터져 나올 문턱을 높일 뿐이다. 문턱이 높아지면 터지는 횟수는 줄지만 한 번 터질 때의 위력은 커진다. 상나라 내부의 계승 위기는 하나라만큼 잦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터지면 구세의 난(九世之亂) 정도는 되었다.
3. 구세의 난, 계승 규칙끼리 벌인 내전
상나라의 계승 제도에는 하나라에 없던 특수한 문제가 있었다. 두 가지 계승 규칙이 동시에 돌아갔다는 점이다.
하나는 부사자계(父死子繼)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잇는다. 다른 하나는 형종제급(兄終弟及)이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다.
두 규칙은 논리적으로 양립하지 않는다. 부사자계는 세로의 논리다. 권력이 한 줄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형종제급은 가로의 논리다. 권력이 같은 세대 안에서 한 바퀴 돈 다음에야 다음 세대로 내려간다.
형종제급을 엄격히 적용한다고 해 보자. 왕위가 형제들을 한 바퀴 다 돌고 나면 맏형의 아들에게 주어야 할까, 막내의 아들에게 주어야 할까? 맏형의 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먼저 왕이었으니 내가 적통이다.” 막내의 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 왕이었으니 왕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다.” 양쪽 다 일리가 있다. 판정해 줄 사람은 없다.
두 규칙을 섞어 쓰면 사정은 더 나빠진다. 어떤 때는 아들에게, 어떤 때는 동생에게 넘긴다. 기준이 무엇인가? 이번에는 어느 규칙을 쓸지 누가 결정하는가? 답은 이렇다. 기준은 없다. 매번 정치적 힘겨루기가 결정한다. 그 결과를 가르는 것은 규칙이 아니라 힘의 크기다. 규칙은 있으나 마나다.
구세의 난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중정(仲丁)부터 양갑(陽甲)까지 상나라의 아홉 왕이 다스리는 동안 계승은 혼란에 빠졌고 왕실의 내분은 끊이지 않았다. 『사기』의 표현대로 “아우와 아들들이 때로 서로 다투어 왕위를 이었다.” 제후들은 그 틈을 타 통제에서 벗어났고 상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다.
구세의 난은 구조를 분석하기에 더없이 좋은 사례다. 이 사건은 한 가지를 입증한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규칙이 하나의 구축 안에 함께 있으면, 규칙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규칙의 기능은 불확실성을 없애는 데 있다. 부사자계 하나만 있다면 후계자는 정해져 있고 다툴 여지가 없다. 형종제급 하나만 있더라도, 동생들 차례가 끝난 뒤 누구에게 돌아가는지까지 정해 놓았다면 후계자는 대체로 확정된다. 하지만 두 규칙이 공존하면 왕위가 넘어갈 때마다 선택 문제가 생긴다. 이번에는 어느 쪽인가? 그 선택 문제 자체가 갈등의 씨앗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두 규칙이 공존한 이유는 상나라 사람들의 설계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두 규칙의 배후에 서로 다른 정치적 이해관계가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부사자계가 대변하는 것은 왕실 핵심부의 이익이다. 왕과 그 적장자가 안정적인 권력 계승의 사슬을 만들고, 주변부의 친족 집단은 밖으로 밀려난다. 형종제급이 대변하는 것은 왕족 전체의 이익이다. 왕의 형제들도 왕위를 넘볼 기회를 얻고, 권력은 더 넓은 범위에서 나뉜다.
이 두 이해관계의 구조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각자 지지자가 있고, 무장 세력이 있고, 정치적 인맥이 있다. 한쪽 규칙을 고른다는 것은 다른 규칙을 떠받치는 이익집단을 억누른다는 뜻이다. 상나라 초기에는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히 제압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러니 두 규칙을 함께 둘 수밖에 없었다. 그 공존의 결과가 구세의 난이었다.
반경(盤庚)이 은(殷)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야 이 문제를 잠시 눌러 놓을 수 있었다. 주의할 것은 ‘눌러 놓았다’는 말이다. 해결한 것이 아니다.
4. 반경의 은 천도, 구축 내부에서 살아남는 법과 그 한계
반경은 상나라의 스무 번째 왕으로, 구세의 난이 끝나 갈 무렵 즉위했다. 그는 큰일을 하나 벌였다. 도읍을 엄(奄)에서 은으로 옮겼다.
고대의 천도는 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일이었다.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정치 중심 전체를 물리적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종묘를 다시 지어야 했고, 귀족들은 따라가야 했다. 아니면 남겨져야 했다. 새 장소에 제사 체계를 다시 세우고 행정망도 새로 짜야 했다. 반경은 왜 이런 일을 하려 했을까?
『상서』의 「반경」 세 편에는 천도 전후 반경의 연설이 남아 있다.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치 연설 기록 가운데 하나다. 반경의 말은 거칠고 엄중하다. 거듭 강조하는 요지는 이렇다. 너희 귀족들은 제 이익만 챙기지 말고 나를 따라오라. 따라오지 않으면 큰일을 치를 것이다. 거의 협박에 가까운 어조다.
이 연설들은 천도의 진짜 목적을 드러낸다. 옛 도읍에 홍수가 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다. 실제로는 옛 도읍의 이해관계가 왕권으로도 뚫을 수 없을 만큼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구세의 난의 본질은 왕족의 여러 갈래가 왕위를 놓고 다투는 데 있었다. 각 갈래가 싸울 수 있었던 기반은 옛 도읍과 그 주변에 쌓아 둔 세력, 곧 토지와 인구, 무력과 제사 자원이었다. 이 세력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기존의 공간 질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반경이 은으로 옮기려 한 진짜 의도는 물리적 공간을 재설정해 기존의 세력 판도를 깨뜨리는 데 있었다. 엄에서 몇 대에 걸쳐 기반을 다졌다고? 좋다. 이제 이사 간다. 그 기반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새 장소에서는 모두 처음부터 시작하고, 왕권은 다시 자원 배분의 주도권을 쥔다.
독한 한 수였다. 규칙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다. 부사자계와 형종제급의 모순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대신 규칙 뒤에 있는 힘의 문제를 해결했다. 왕족 각 갈래의 세력 기반을 재설정함으로써 왕이 잠시나마 다시 압도적 우위에 서게 한 것이다.
구축의 관점에서 반경의 은 천도는 구축 내부에서 스스로를 구한 사례다. 구축의 설계를 바꾸지 않았다. 제사 구축의 핵심 논리는 그대로였다. 구축의 규칙도 바꾸지 않았다. 계승 제도 역시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구축이 작동하는 환경이었고, 그것을 재설정하여 수명을 늘렸다.
이런 생존법은 뒤에도 되풀이된다. 북위 효문제의 낙양 천도는 겉으로는 한화 개혁이었지만, 깊은 논리는 반경의 천도와 똑같았다. 공간을 재설정해 구귀족의 세력 기반을 깨뜨리는 것이다. 명나라 성조의 베이징 천도에도 비슷한 구조적 동인이 있었다. 건문제의 옛 신하들이 자리 잡고 있던 난징의 이해관계망을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축 내부에서 스스로를 구하는 방식의 한계도 반경에게서 선명히 드러난다. 수명은 늘릴 수 있어도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반경 이후 상나라는 분명 한동안 안정을 누렸다. 하지만 계승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세력 판도를 잠시 재설정했기 때문에 뒤로 미뤄졌을 뿐이다. 미루는 것은 해결하는 일이 아니다. 옛 문제는 언젠가 새 환경에서 다시 자라난다. 문제의 뿌리는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제도 설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면 귀족을 자기 땅에서 떼어 놓을 수는 있다. 구축의 허점까지 떼어 놓을 수는 없다.
5. 무정의 중흥, 제사 구축의 절정
반경 이후 세 번째로 왕위를 이은 사람이 무정(武丁)이다. 상나라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왕 가운데 하나로, 59년 동안 재위하며 나라를 전성기로 이끌었다.
무정의 통치에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특징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제사 체계를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무정 시대의 갑골복사는 양이 방대하고 내용도 세밀하다. 제사의 대상은 직계 조상에서 방계와 배우자로까지 넓어졌다. 무정의 왕후 부호(婦好)도 죽은 뒤 제사 체계에 들어갔다. 강과 산, 바람과 구름 같은 자연신까지 그 대상이 되었다. 제사의 빈도와 규모 모두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정이 의식적으로 제사 구축의 적용 범위를 넓혔다는 뜻이다. 제사는 더 이상 왕과 조상 사이의 사적인 통로에 머물지 않았다. 온갖 것을 아우르는 정보 체계이자 통제 체계가 되었다. 더 많은 존재를 제사의 대상에 넣을수록 왕은 더 많은 힘과 소통할 권리를 얻었다. 그만큼 더 넓은 영역에 대해 해석권과 통제권을 얻게 된 것이다.
둘째는 부호다. 무정의 왕후 부호는 중국의 문자 기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군사 지휘관이다.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고, 많을 때는 1만 3천 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동시에 중요한 제사의 주관자이기도 했다.
부호의 존재는 상나라의 구축 형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후대의 유교적 틀에서 여성은 정치 권력과 제사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다. 하지만 상나라의 제사 구축에서는 제사권과 정치권력이 하나였고, 제사권을 배분하는 논리가 전적으로 부계에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왕후는 왕의 배우자로서 제사 체계 안에 독립된 자리를 가졌다. 따라서 독자적인 정치 권력도 있었다.
이는 제사 구축이 성별을 다루는 방식이 후대의 예악 구축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악 구축은 윤리적 위계로 여성을 배제한다. 남존여비는 윤리 원칙이다. 제사 구축은 의례에서 맡은 역할에 따라 권력을 배분한다. 의례 안에 자리가 있으면 성별에 상관없이 권력도 있다. 부호가 군대를 이끌고 싸울 수 있었던 뿌리에는 제사 체계 안에서 인정받은 독립적인 지위가 있었다.
무정 시대는 제사 구축의 절정이었다. 구축이 포괄하는 영역은 가장 넓었고, 작동은 가장 원활했으며, 정당성도 가장 풍부하게 생산되었다. 그러나 절정 뒤에는 쇠퇴가 왔다. 원인은 외부의 충격이 아니었다. 구축 내부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6. 주왕, 제사 구축이 스스로를 소진하다
무정에서 주왕(紂王), 곧 제신(帝辛)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이 흘렀고, 그 사이 여덟아홉 명의 왕이 다스렸다. 이 2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많이 알지 못한다. 이 시기의 갑골복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를 보면, 주왕 때의 제사 구축은 내부 모순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전통적인 이야기는 주왕을 폭군으로 그린다. 술로 연못을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았으며, 달군 쇠에 사람을 지지는 포락형을 쓰고, 달기를 총애하고, 기자를 가두고, 비간을 죽여 심장을 갈라 구멍을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걸왕의 이야기와 판박이다. ‘왕조를 망친 마지막 암군’이라는 틀로 찍어 낸 두 번째 제품이다.
하지만 이 도덕적 이야기를 벗겨 내면, 주왕의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사 구축 내부에서 개혁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은 아닐까.
몇몇 간접 증거는 주왕이 상나라 말기에 갈수록 경직되어 가던 제사 체계를 바꾸려 했음을 시사한다. 『좌전』에는 주왕이 “어리석게도 제사를 버렸다”, 곧 “혼기기사(昏棄其祀)”라고 기록되어 있다. 보통은 주왕이 신을 공경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다. 하지만 달리 읽을 수도 있다. 주왕이 일부 제사를 줄였고, 제사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던 구귀족의 이익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주왕의 처지는 훗날 수많은 개혁가가 맞닥뜨린 상황과 같다. 낡은 구축은 이미 굳어 있었다. 제사 체계는 지나치게 거대해져 너무 많은 자원을 삼켰고, 귀족은 일부 제사권을 독점하여 왕권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 구축을 고치는 일은 모든 기득권자의 몫에 손을 대는 일이었다. 결국 주왕과 구귀족은 싸우다 함께 상처를 입었고, 주나라 사람들은 그 틈으로 들어왔다.
목야 전투의 중요한 대목 하나가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주왕의 병사들이 모두 창끝을 돌렸다.” 결전 중에 상나라 군대가 편을 바꾸어 주나라 무왕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것은 폭군에게 극한까지 억압받은 군대의 행동이 아니다. 억압받은 군대라면 뿔뿔이 달아나지, 편제를 유지한 채 적에게 투항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내부의 편 가르기에서 이미 반주왕 쪽을 선택한 군대가 전장에서 마지막 한 단계를 마친 모습에 가깝다.
다시 말해 목야 전투는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린 결정적 순간이 아니라, 상나라 내부의 분열이 마지막으로 드러난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붕괴는 전장에 이르기 훨씬 전에 끝나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주왕에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든, 구축의 차원에서 보면 상나라의 멸망은 제사 구축의 몇 가지 근본적 약점을 드러냈다.
첫째, 제사 구축의 유지 비용은 갈수록 늘어난다.
제사 체계는 일단 생기면 스스로 불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왕은 매 대마다 앞선 모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 조상은 점점 늘고, 제사는 점점 잦아지고, 필요한 가축과 순장할 사람, 청동기와 정인, 곧 점복가도 점점 많아진다. 늘기만 하고 줄지는 않는 시스템이다. 제사 하나라도 줄이면 그 제사를 받던 조상에게 죄를 짓는 셈이다. 그 제사에 기대어 사는 귀족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실제로 줄일 수가 없다.
상나라 말기에 이르면 제사 체계가 소모하는 자원은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고정된 주기에 따라 모든 조상에게 돌아가며 제사하는 주제(周祭) 제도는 표준화를 통해 비용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세대가 더해질수록 제사의 총량은 여전히 늘어났다.
이것은 구축이 흔히 앓는 병이다. 세우기는 쉽고 해체하기는 어렵다. 새 요소 하나를 구축에 넣는 일은 쉽다. 이미 들어 있는 요소를 빼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요소마다 그 뒤에 이해관계의 뿌리가 자라 있기 때문이다. 구축은 팽창할 수만 있고 줄어들 수는 없다. 환경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팽창하는 순간 무너진다.
둘째, 신권의 토대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상나라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핵심은 “우리 집안의 조상이 천제 곁에 있다”는 명제였다. 약점은 천제가 오직 상나라 사람들의 조상과만 이야기한다고 전제한다는 데 있었다. 누군가 새로운 신학을 내놓는다면 어떨까? 천제가 누구와 이야기할지는 혈연이 아니라 덕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면? 상나라의 독점은 깨진다.
주나라 사람들이 내놓은 것이 바로 그 새로운 신학이었다. 그들의 천명 개념은 이렇게 말한다. 천명은 어느 한 가문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덕 있는 자가 얻고 덕을 잃은 자는 잃는다. 이 말은 상나라 신권 구축의 이론적 토대를 곧바로 무너뜨렸다. 이제는 “천제는 우리 집안 조상하고만 이야기한다”라고 할 수 없다. 천제가 보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덕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깎아내기였다. 주나라 사람들은 제사 구축 안에서 개혁한 것이 아니다. 전혀 새로운 신학으로 제사 구축의 밑바탕 논리를 교체했다. 옛 논리는 “조상이 천명을 결정한다”는 혈연 중심의 논리였다. 새 논리는 “덕행이 천명을 결정한다”는 행위 중심의 논리였다. 겉으로는 여전히 천명론이지만 밑바탕의 논리는 완전히 바뀌었다.
셋째, 제사 구축은 계승의 잔여항을 소화하지 못했다.
구세의 난에서 반경의 은 천도를 거쳐 상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승 문제는 끝내 제도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반경 이후 부사자계가 차츰 우위를 점하고 형종제급은 밀려났다. 하지만 이 변화는 명확한 제도 개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실제 권력 투쟁을 거치며 서서히 굳어진 관행이었다. 규칙으로 만들지 않은 것에는 구속력이 없다. 상나라 말기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과 주왕 사이의 갈등 뒤에도 여전히 왕족 내부의 계승을 둘러싼 긴장이 있었다.
제사 구축은 신권이라는 정당성의 이야기는 제공했지만 실제로 적용할 계승 규칙은 제공하지 못했다. 이야기와 규칙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야기는 “왕은 왜 있어야 하는가”에 답하고, 규칙은 “다음 왕은 누구인가”에 답한다. 상나라에는 강력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명확한 규칙은 없었다. 이 빈틈 때문에 왕위가 넘어갈 때마다 위기를 터뜨릴 불씨가 생겼다.
7. 상주 교체, 왕조가 아니라 구축의 형식이 바뀌다
구축의 관점에서 상나라의 멸망과 주나라의 등장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다. 중국 정치사에서 구축의 형식이 처음으로 온전히 교체된 사건이다.
하나라를 상나라가 대신했을 때는 구축의 형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상나라 사람들이 제사라는 껍질을 한 겹 씌웠지만, 밑바탕은 여전히 혈연과 무력이었다. 한 단계 보강했을 뿐이다. 기존 구축의 개량판이지 새로운 구축은 아니었다.
상나라를 주나라가 대신했을 때는 달랐다. 주나라 사람들은 천하를 차지할 가문만 바꾼 것이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정치 이론을 내놓고 새로운 제도 질서를 세웠다. 천명론이 조상 신권론을 대신했고, 봉건제가 상나라의 방국 연맹제를 대신했으며, 예악이 제사를 대신하여 사회 질서를 조직하는 핵심 원리가 되었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 법칙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그전의 정치 변동, 곧 우가 계에게 왕위를 넘긴 일, 태강이 나라를 잃은 일, 소강의 중흥, 구세의 난, 반경의 은 천도, 탕의 하나라 정복은 모두 같은 유형의 구축 내부에서 일어났다. 구축의 형식은 그대로이고 운영자가 바뀌거나 설정값이 조정되었다. 상주 교체에서는 처음으로 구축의 형식 자체가 바뀌었다.
구축의 형식을 교체하는 것과 구축 안에서 조정하는 것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내부 조정은 밑바탕 논리에 손대지 않는다. “왕은 왜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그대로다. 형식의 교체는 그 논리를 새로 쓴다. 상나라 사람들은 “우리 집안의 조상이 하늘과 통하니까”라고 했다. 주나라 사람들은 “하늘이 덕 있는 사람을 골랐으니까”라고 했다. 같은 질문에 전혀 다른 답이다.
하지만, 이 ‘하지만’이 가장 중요하다. 구축의 형식을 교체한다고 옛 구축의 잔여항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주나라 사람들은 상나라의 신학을 바꾸었으나, 그 밑바탕을 이루는 세 가지 코드 가운데 두 가지는 물려받았다. 혈연 계승을 기본값으로 삼는 것, 마지막 왕을 암군으로 그리는 이야기를 정당성의 도구로 쓰는 것이다. 주왕의 모습은 걸왕의 틀에 맞춰 만들어졌다. 주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서사 전략을 발명하지 않았다.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를 무너뜨릴 때 만든 틀을 그대로 재사용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주나라의 천명론 자체에도 풀리지 않은 모순이 들어 있다. 천명은 덕에 따라 정해진다. 그렇다면 주 왕실의 후손에게 덕이 있는지는 누가 판단하는가? 하늘이 판단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망했다면 덕을 잃었다는 뜻”이 기준이라면 천명론은 언제나 정답인 사후 해설이 된다. 무너진 왕조는 어느 것이든 뒤늦게 “덕을 잃었다”고 판정할 수 있고, 성공한 반란은 어느 것이든 뒤늦게 “천명이 돌아간 결과”라고 인정할 수 있다.
이 순환 논증이 주나라 사람들이 후세에 남긴 가장 큰 잔여항이다. 권력 교체는 언제나 정당화할 수 있게 되고, 권좌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마음 놓을 수 없게 된다. 뒤에 올 사람이 언제든 “덕을 잃었다”는 혐의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천명론은 양날의 칼이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대신한 일의 정당성을 지켜 주는 동시에, 훗날 누구든 주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이론적 무기도 건네주었다.
모든 구축은 옛 문제를 해결하면서 새 문제를 생산한다. 그 새 문제가 새로운 잔여항이다. 옛 잔여항은 흡수되고 새 잔여항은 방출된다. 총량은 보존되고 형태만 바뀐다.
다음 편은 「서주, 주공이 예를 만들다」다.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시스템을 설계한다는 자각을 지닌 인물, 처음으로 개인의 품성 대신 제도를 통해 구축을 작동시키려 한 인물을 만난다. 그의 성취와 한계는 이후 800년의 정치적 틀을 규정하게 된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