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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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육상 · 한국어 독립 재구성판
제 01 편 / 전23편

이름만 있고 숫자는 없다

고대 올림피아는 천 년 동안 이어진 우승자 명단을 남겼지만, 경기 성적은 남기지 않았다. 숫자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 제도는 처음부터 숫자를 만들어 낼 생각이 없었다.

Han Qin (秦汉)
이 글의 목차

1 연도를 헤아리기 위한 명단

오늘날 남아 있는 고대 올림피아 우승자 명단 가운데 가장 온전한 것은 에우세비오스의 연대기 저술에 보존되어 있다. 제1회부터 제249회까지 이어지는 이 명단에는 대회마다 항목이 하나뿐이다. 그해 스타디온 달리기 우승자의 이름이다. 스타디온 달리기는 경기장 주로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달리는 종목이다. 올림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종목이자, 이 명단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는 유일한 종목이기도 하다.

이 명단은 경기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역법이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공통으로 쓰는 기년법이 없었다. 도시국가마다 자기네 집정관을 기준으로 해를 셌고, 달의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두 도시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에도 양쪽이 붙이는 연도가 달랐다. 올림피아 경기는 4년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열렸고, 그리스 세계 전체가 인정하는 행사였다. 그렇게 4년에 한 번 등장하는 우승자의 이름이 누구나 쓸 수 있는 시간 좌표가 되었다. 어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밝히려면, 누구누구가 스타디온 달리기에서 우승한 대회 때의 일이라고 하면 됐다.

우승자들의 이름을 연속된 목록으로 정리한 사람은 대체로 엘리스의 히피아스로 본다. 시기는 기원전 400년 무렵이다. 첫 대회의 우승자 이름은 코로이보스였고, 후대의 전승은 그 대회를 기원전 776년에 놓았다. 명단은 히피아스 이후 여러 세대의 연대기 작가를 거쳐 아프리카누스로, 마지막에는 에우세비오스의 저술로 들어갔다. 다만 에우세비오스의 원본은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아르메니아어 번역본과 라틴어로 전해진 계통이다.

먼저 짚어야 할 일이 있다. 히피아스가 명단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그가 기록하려던 첫 대회는 이미 거의 400년 전의 일이었다. 이름들을 맨땅에서 지어냈을 가능성은 낮다. 현대 연구는 그가 엘리스의 지역 전승, 올림피아 성지에 관한 기록, 경기 관련 저술, 지방사와 승리 찬가에 흩어진 우승자 정보를 활용했다고 보는 쪽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아 하나의 연속된 선으로 만들기 전까지, 그것들은 한 줄이 아니었다. 오늘날 초기 수십 회의 항목을 다루는 방식도 통째로 믿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다. 활용하되 사료의 층위를 나누어 검토한다. 의심할 이유는 세 가지다. 너무 긴 시간 간격, 초기 그리스의 제한된 문자 사용과 문서 보존 여건, 그리고 전승 안에 남은 불일치와 후대의 보완 흔적이다. 파우사니아스가 각 종목의 신설 시기를 서술한 대목만 보아도 이런 긴장이 드러난다.

크리스테슨은 놓치기 쉬운 점을 하나 더 지적했다. 어떤 우승자를 언급한 글이라고 해서 모두 우승자 명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람을 위해 지은 승리 찬가가 그의 올림피아 우승을 노래하고, 어느 지방사가 조상의 우승을 언급할 수 있다. 둘 다 승리에 관한 기록이지만 대회별로 정리한 명부는 아니다. 명부를 명부답게 하는 것은 누가 이겼는지를 적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매 대회에 하나씩 항목을 마련하고, 그 항목들을 같은 방식으로 배열하겠다는 약속이다. 흩어진 서술과 연속된 목록을 가르는 것은 양이 아니라 형식이다. 히피아스가 한 일이 바로 그 전환이었다. 이 전환을 거치자 제각각 자기 이야기를 하던 승리의 기록들은 공통의 자리를 얻었다. 동시에 각자가 지녔던 원래의 모양은 잃었다.

다시 말해, 이 제도적 구축이 처음 내놓은 산물은 사후의 추인이었다. 400년에 걸쳐 여기저기 흩어진 이름을 한 줄로 세웠고, 그 줄은 이내 시간 자체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이후 그리스 세계 전체가 자기 역사의 위치를 이 선 위에서 찾았다. 정작 그 선은 그것이 가리키는 400년이 지나고 나서야 만들어진 것이었다.

출발점인 기원전 776년도 문서에서 읽어 낸 연도가 아니다. 계산으로 얻은 연도다. 연속된 명부만 있으면, 그중 어느 한 대회의 절대 연대를 알아낸 뒤 거꾸로 세어 첫 대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 그 연도는 명부의 근거가 아니라 명부가 만들어 낸 결과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이 출발점을 둘러싸고 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대다수는 이를 확증된 역사적 시점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전해진 연대로 쓴다. 다른 사건의 연도를 정해 주는 도구가 정작 자신의 첫해는 계산으로 얻은 셈이다.

하나의 구축이 무엇을 생산하는가는 그것을 무엇 하려고 만들었는가에 달려 있다. 이 명단의 목적이 해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었다면, 필요한 것은 4년마다 그 시점을 고유하게 가리킬 이름 하나뿐이었다. 그 사람이 얼마 동안 달렸는지 알 필요는 없었다. 심지어 지난 대회의 우승자보다 빨랐을 필요도 없었다. 이후 2천 년이 넘도록 사람들은 이 명단에 한 번도 담긴 적 없는 것을 거듭 찾아 나섰다. 그러고는 찾지 못한 이유를 오랜 세월 속에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라진 것들이야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생산되지 않았다.

2 명단에는 이름 하나면 된다

올림피아처럼 우승자에게 관을 주는 대회에서는 대회 자체가 주는 보상은 기본적으로 승자만의 몫이었다. 2등상도, 3등상도, 어떤 형태로든 등수에 따라 이어지는 시상 체계도 없었다. 크라우더의 정리는 명료하다. 그리스의 주요 대회에서 대회가 주는 상은 1등만 받았다. 다만 그는 승리만이 의미 있었다고 지나치게 단정해도 실제와 어긋난다고 덧붙였다. 문학 작품과 비문에는 우승하지 못한 사람의 성적도 이따금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예가 알키비아데스다. 시칠리아 원정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는 아테네인들에게 자신이 적임자임을 주장하며, 올림피아 전차 경주에서 1등과 2등, 4등을 한꺼번에 차지한 일을 들었다. 투키디데스가 이 발언을 적어 두었다. 헤로도토스의 글에도 누군가가 2등을 했다는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그러니 2등을 입에 올릴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이야기 속에 들어가는 것과 명부에 기록되는 것은 다르다. 알키비아데스의 2등과 4등은 그날 그의 정치적 논증에 쓸모가 있었기에 투키디데스의 글에 남았다. 명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명부가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사실이 서술 안에는 자리가 있고, 제도 안에는 자리가 없었다.

뒤로 갈수록 이 차이가 대단히 중요해지므로, 아직 단순한 모습일 때 알아 두는 편이 좋다. 서술은 고른다. 무엇을 적을지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때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 제도는 고르지 않는다. 미리 정한 형식에 맞추어 채우고,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모두 밖에 둔다. 서술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으니 더 넉넉해 보인다. 하지만 담겠다고 약속하지는 않는다. 무엇이 담기는지는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다. 알키비아데스가 그날 아테네인들에게 출병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그 두 등수는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제도의 그릇은 더 작아 보이지만, 제도는 약속한다. 담겠다고 약속한 그 작은 영역 안에서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 구축의 작동 방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2등을 탄압하지도, 2등 선수가 달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 선수가 어디서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막지도 않는다. 다만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서 잔여항은 지워 버린 칸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리지 않은 칸이다. 이후 육상의 역사는 거듭 이 형태로 돌아온다. 구축이 말끔히 처리하지 못한 것은 흔히 그것이 쫓아낸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받아들일 자리를 만들어 두지 않은 것이다.

보상의 형태도 같은 원리를 따른다. 경기 현장에서 주는 것은 야생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 하나, 그뿐이다. 실질적인 보상은 고향 도시로 돌아온 뒤에 받는다. 현금, 평생 공비로 제공되는 식사, 극장 앞줄 좌석, 몇몇 의무의 면제다. 크세노파네스는 이를 못마땅해하는 시까지 썼다. 빨리 달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받는다는 불평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솔론이 아테네인들의 포상액을 정했다고 전한다. 올림피아 우승자는 500드라크마, 이스트미아 우승자는 100드라크마였다. 기록의 출처는 분명하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와 솔론 사이에는 너무 긴 세월이 있어 구체적인 액수의 신빙성은 논쟁거리다. 고대 아테네의 포상 제도를 믿을 만하게 전한 기록으로 읽는 견해도 있고, 후대의 도덕적 시각으로 꾸린 입법 이야기로 읽는 견해도 있다.

아마추어와 프로라는 말은 여기서 펼쳐 놓지 않겠다. 뒤의 글에서 다룰 문제다. 지금은 보상의 분업만 기억하면 된다. 대회가 주는 것에는 가격이 없다. 야생 올리브 관은 재료로 보면 값어치가 없고, 돈으로 살 수 없기에 귀하다. 도시국가가 주는 것에는 모두 가격이 있다. 법령에 적어 넣을 수 있을 만큼 액수도 명확하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과 액수를 정할 수 있는 돈이 한 사람에게 차례로 이어진다. 둘을 바꾸어 주는 매개가 바로 명단에 오른 그 이름이다.

액수가 믿을 만한지는 별개로, 방향은 분명하다. 도시국가가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름이다. 이름은 돈으로 바뀌고, 좌석으로 바뀌고, 이후 몇 세대 동안 한 가문 전체를 소개하는 말로 바뀐다. 이 교환에 숫자는 끼어들지 않았다. 숫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3 길이가 다른 네 개의 주로

네 성지의 주로는 길이가 서로 달랐다. 문헌에서 추정한 이야기가 아니다. 출발선, 거리 표지, 주로 옆 배수로의 유구를 바탕으로 고고학자들이 직접 잰 결과다. 올림피아는 약 192미터, 델포이는 약 177.5미터, 네메아는 약 178미터, 이스트미아의 후대 주로는 약 181미터다. 이스트미아에서는 600척이던 주로를 559척으로 바꾸었다는 고고학적 해석도 나왔다.

올림피아는 델포이보다 거의 15미터나 길다. 작은 차이가 아니다. 만약 이 네 곳의 스타디온 달리기에서 시간을 쟀다면, 그 시간들을 서로 견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네메아의 자료가 이를 가장 잘 보여 준다. 밀러는 발굴 보고서와 현장 설명에서 모두 주로가 현지 척도로 600척, 약 178미터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주로에 100척마다 세운 표지의 간격은 실제로 재 보면 일정하지 않다. 밀러는 여기서 곧바로 짚는다. 고대인들이 이 표지를 배치한 목적은 현대적 의미의 정밀한 경기 기록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증거가 무거운 것은 실물이기 때문이다. 고대 문헌에 경기 기록이 없다고 하면, 문헌이 사라졌을 뿐이라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주로는 그 자리에 있고, 표지 사이의 간격은 잴 수 있다. 거리를 재기 위한 표지라면 간격이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측정한 숫자는 의미가 없다. 그런데 간격이 다르다. 똑같은 간격으로 돌을 놓을 기술이 충분했던 시대인데도 다르다. 이는 간격이 다른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유일한 설명은, 아무도 그 표지로 거리를 재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멈추자. 가장 쉽게 판단을 잘못하는 대목이 바로 이곳이다. 주로의 길이가 제각각이라는 사실은 이 구축의 결함이 아니다. 결함이란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때 하는 말이다. 성지 사이의 비교는 애초에 목적이 아니었다. 따라서 네 주로의 길이가 다르다는 것은 당시 누구에게도 문제가 아니었다. 불평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길이가 같아야 할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더 못 박아 주는 사실도 있다. 한 선수가 같은 해에 여러 성지를 돌며 출전할 수 있었다. 네 대회의 주기가 엇갈렸으므로 순회 전승을 노리는 사람은 네 곳을 모두 찾아가야 했다. 같은 다리가 같은 시즌에 길이가 다른 네 주로를 달렸다는 뜻이다. 당시 누군가 비교 가능성에 관심을 두었다면, 가장 먼저 문제를 알아챌 사람은 그 선수였을 것이다. 차이가 바로 자기 몸에 걸렸을 테니까. 그런데 성적을 환산하자고 제안하거나, 델포이에서 달리는 것이 올림피아보다 쉽다고 불평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네 개의 우승관이었다. 네 개의 관을 얻는 데 주로의 길이가 같을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물을 수 있다. 길이가 다르다면 긴 주로에서 우승하는 것이 짧은 주로에서보다 어려운가. 지금은 자연스러운 질문이지만, 당시에는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두 경기를 하나의 척도에 올려 난도를 평가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평가 척도는 상대였다. 올림피아에서 이기기 어려운 이유는 가장 강한 사람들이 모여서이지, 주로가 가장 길어서가 아니었다. 이 구축이 승리의 무게를 달 때 보는 것은 누구를 꺾었느냐였지, 몇 미터를 지나왔느냐가 아니었다.

오늘날 이 숫자들을 읽으면 본능적으로 환산하고 싶어진다. 모두 192미터로 맞춘다면 델포이의 성적은 얼마가 될까. 이 본능은 당시의 사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후대의 구축에서 나온 것이다. 나중에 만들어진 요구를 원래부터 있던 요구로 취급하고, 고대인들이 그것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거슬러 지적하는 것. 고대 제도를 읽을 때 가장 흔히 벌어지는 오독이며, 이 오독은 19세기까지 줄곧 이어진다.

곁들여 한 가지 더 분명히 해 두자. 주로는 각 지역의 척으로 쟀고, 한 척의 길이는 지역마다 달랐다. 네 성지에서 600척이라는 숫자는 같았지만, 척이 달랐다는 뜻이다. 당시 사람들은 같은 수를 써서 서로 다른 길이를 얻었고, 거기에 모순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수는 의례에 속했고, 길이는 장소에 속했다. 장소를 넘나들며 비교할 생각이 없는 세계라면, 수는 통일하되 실제 길이는 통일하지 않아도 앞뒤가 맞는다. 후대의 구축은 정반대로 했다. 의례적인 수를 버리고 실제 길이를 통일했다. 400미터는 400미터이고, 1미터는 1미터다. 1미터가 무엇인지는 경기장과 무관한 다른 곳에서 정한다. 두 방식 사이에 놓인 차이는 정밀도가 아니라 목적이다.

4 측정은 있었다. 아직도 답은 없다

고대에 숫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개가 있다. 하나같이 놀랍다.

크로톤의 파이울로스는 55척을 뛰고 원반을 95척 던졌다고 한 명문시의 전승은 말한다. 이 글은 후대의 주석과 《수다 사전》을 통해 전해졌고, 해리스가 1960년에 이 시를 따로 논했다. 스파르타의 키오니스에게도 수치로 된 기록이 하나 있는데, 이쪽은 숫자 자체가 일정하지 않다.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에우세비오스 계통의 전승에는 22척이라고 되어 있다. 반면 아프리카누스나 문헌 교감을 근거로 52척이어야 한다고 보는 연구 계통도 있다. 엄밀히 다루자면 52척은 논쟁 중인 교감 결과로 표시해야지, 이견 없는 확정값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55척은 환산하면 16미터 안팎이다. 현대 멀리뛰기의 세계기록은 8.95미터다. 그러니 이 숫자는 같은 종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거나, 믿을 수 없는 숫자다.

멀리뛰기에 도구를 쓴 것은 사실이다. 선수들은 양손에 도약용 추를 하나씩 들었다. 파우사니아스의 묘사에 따르면 반원형이면서 약간 타원에 가까웠고, 손가락을 끼워 넣을 수 있었다. 필로스트라토스는 이 추가 5종 경기 선수들의 발명품이라고 했으며, 박자를 맞추기 위해 피리 소리를 쓰는 것도 규칙상 허용되었다고 전한다. 현대 생체역학 실험에서도 추의 효과는 확인된다. 무게가 알맞으면 몇 센티미터를 더 뛸 수 있다. 센티미터다. 16미터와의 거의 두 배 차이를 메울 수는 없다.

피리에 관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필로스트라토스의 말대로 박자를 맞추기 위한 피리 소리를 규칙으로 허용했다면, 당시 멀리뛰기는 반주가 있는 종목이었다. 반주를 두는 종목과 초시계로 재는 종목은 주목하는 것이 다르다. 반주는 동작의 완성도와 볼거리를 돕고, 초시계는 결과를 비교할 수 있게 한다. 당시의 규칙이 전자를 위해 조항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이 종목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보여 준다.

그래서 해석은 네 갈래로 나뉘어 오늘까지 나란히 남아 있다. 어느 하나도 나머지를 눌러 버리지 못했다. 첫째는 여러 번 뛰었다는 해석이다. 헨트의 연구팀과 그 뒤를 이은 여러 학자는 제자리에서 다섯 번 연속 뛰는 종목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실험에서도 실제로 15미터 이상이 나왔다. 둘째는 경기 방식이 달랐다는 해석이다. 현대식으로 한 번 뛰는 멀리뛰기가 아니었고, 정해진 도움닫기 구역이 있었을 수 있으며, 측정 방식도 달랐으리라는 견해다. 셋째는 문헌의 오류다. 특히 키오니스의 경우, 필사 과정에서 숫자가 바뀌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넷째는 수사적 과장이다. 해리스는 파이울로스의 시를 논하면서 문학적 과장과 풍자적 과장을 명시적으로 하나의 해석 경로에 넣었다. 명문시라는 장르가 그런 표현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 몇 개의 숫자를 두고 오늘까지 논쟁하는 이유는 바로 당시 대조해 볼 장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숫자는 문서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시 한 편에서 나왔다. 시는 과장할 수 있고, 잘못 전해질 수 있으며, 옮겨 적는 동안 글자 하나가 빠지거나 더해질 수도 있다. 장부는 그래서는 안 된다. 숫자가 대조 가능한 것이 되려면 누군가 한 번 적어 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적겠다고 약속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에도 같은 방식으로 적겠다고 약속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 가장 주의해서 볼 대목이다. 드문드문 남은 수치는 기록 제도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없었다는 증거다. 그런 제도가 있었다면 파이울로스의 도약에는 같은 대회에 나온 다른 선수들의 성적이 비교 대상으로 붙었을 것이다. 앞뒤 대회의 같은 종목 자료가 배경이 되었을 것이고, 그 수치가 터무니없는지 판단할 분포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하나도 없다. 시 한 편 속에 숫자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2,500년, 네 가지 독법.

달리 말하면, 숫자의 신뢰성은 결코 그 숫자 하나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주변의 다른 숫자들에서 나온다. 지금 누군가 세계기록을 훌쩍 뛰어넘는 성적을 내놓는다면, 진위를 가리려고 현장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그 숫자가 분포의 어디에 놓이는지, 함께 뛴 사람들의 성적은 어떤지, 그 선수의 이전 성적 곡선은 어떤지, 당일 풍속과 경기장은 어땠는지 보면 된다. 이 참조점들이 그물 하나를 이룬다. 숫자는 그물 위에 놓여야 무게를 얻는다. 파이울로스의 숫자에는 그물이 없다. 그 아래가 비어 있다. 그래서 참임을 입증할 수도, 거짓임을 입증할 수도 없고, 해석만 할 수 있다. 해석은 여럿일 수 있다. 네 갈래의 설명이 아직도 나란히 남아 있는 이유다.

현대인이 이 자료를 접하면 대개 먼저 묻는다. 그래서 실제로는 얼마나 뛰었다는 것인가. 이 물음에는 이미 그 값을 확정할 수 있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더 정확히 짚어야 할 것은 이렇다. 대조할 생각 없이 만든 숫자와 대조하려고 만든 숫자는 애초에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다. 적어 놓은 모양이 같더라도 그렇다.

5 고도로 발달한 구축, 다만 그것이 재는 것은 성적이 아니다

올림피아의 심판은 ‘그리스인들의 심판관’, 헬라노디카이라고 불렸다. 파우사니아스는 제도가 바뀔 때마다 그 수가 거듭 달라졌다고 명확하게 적었다. 처음에는 이피토스 혼자였다고 한다. 제50회부터는 추첨으로 뽑은 두 명이 맡았고, 제95회에는 아홉 명, 그 뒤에는 열 명으로 늘었다. 제103회에는 열두 명이었다가 제104회에는 부족 수가 줄어 여덟 명으로 줄었다. 제108회에 다시 열 명이 되었고, 이후로는 그 수가 이어졌다.

이 숫자들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 많다. 심판의 수는 엘리스의 부족 수를 따라갔다. 부족이 늘거나 줄면 심판도 늘거나 줄었다. 즉 경기장에서 몇 명이 판정을 내릴지는 경기장 바깥의 행정구역 개편이 정했다. 구축의 내부 구조를 외부 구조가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대회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는 이것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심판의 수를 경기상의 이유로 정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발 방식과 권한도 문헌에 직접 나온다. 심판은 엘리스인 가운데서 뽑았다. 엘리스의 심판관 숙소에 열 달 동안 머물며 법을 지키는 관리들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경기 당일에는 새벽이 밝기 전에 나와 달리기 선수들의 조를 편성했고, 한낮에는 5종 경기와 격투 종목들을 감독했다. 이들은 심판인 동시에 대회의 행정관이었다.

선서도 있었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선수 자신과 그의 아버지, 형제, 훈련 지도자는 맹세를 지키는 제우스의 신상 앞에서 선서해야 했다. 정해진 열 달의 훈련을 실제로 마쳤으며, 대회에서 부정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누가 선서하는지 한 번 더 보자. 경기장에 나서는 사람은 한 명인데, 그의 아버지와 형제, 지도자도 맹세한다. 여기서 구축은 출전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책임을 나누어 준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선수가 정말 열 달을 채워 훈련했는지는 곁에 있던 사람들만 안다. 대회는 그 열 달을 확인할 수 없으니, 사정을 아는 사람들도 자기 자신을 함께 걸게 한다. 전형적인 처리 방식이다. 구축이 어떤 사실을 직접 관찰할 수 없으면,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을 대신 세우고 원래의 사실을 보증하라고 요구한다.

처벌도 있었다. 체벌, 벌금, 자격 박탈이 있었고, 채찍질은 이를 전담하는 집행인이 맡았다. 리카스는 규칙을 어기고 자기 전차를 몬 사람에게 승리의 띠를 매어 주었다가 현장에서 채찍을 맞았다. 에우폴로스가 뇌물을 건넨 사건도 상세하게 전해진다. 그런데 이 제도 전체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벌금의 쓰임새다. 벌금으로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경기장으로 가는 길에 세웠다. 받침대에는 처벌받은 사람의 이름과 경고문을 새겼다. 오늘날 올림피아 유적에도 그 돌 받침대들이 줄지어 남아 있다.

이 모두를 한데 놓고 보면 조잡한 구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열 달의 집중 훈련, 경기 전 선서, 부족 수에 맞춰 조정하는 심판 수, 추첨, 조 편성, 채찍질, 벌금, 그리고 그 벌금으로 만들어 누구나 지나야 하는 길에 세운 일렬의 경고. 정교하기로는 어느 현대 대회의 징계 규정에도 뒤지지 않는다. 몇몇 대목은 오히려 더 독하다.

후대 사람들은 고대 경기에 숫자가 없었던 이유를 아직 그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곧잘 설명한다. 이 자료들은 그 설명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발달과 미발달은 같은 축 위의 앞뒤를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에는 축이 두 개 있다. 이 구축은 정교함의 전부를 다른 축에 쏟았다. 보장하려는 것은 이 승리가 깨끗하다는 사실이지, 성적의 크기가 아니었다. 조작에는 극도로 예민했고, 수치의 크기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이 둘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부정을 엄격히 단속하면서 시간을 정밀하게 재는 대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늘날의 대회가 그렇다. 앞의 일만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고대가 그랬다. 둘을 묶어 하나의 진보가 지닌 두 측면으로 보는 것은 나중에 생긴 습관이다. 승리의 정당성과 성적의 크기는 독립된 질문이다. 구축은 그중 하나에만 답할 수 있고, 그 하나에는 아주 훌륭하게 답할 수도 있다.

한 걸음 더 가 보자.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재는 일과 규칙에 맞게 이겼는지 판정하는 일은 서로 다른 작업이다. 필요한 장치도 다르다. 앞의 일에는 통일된 자와 시계가 필요하고, 뒤의 일에는 선서의 입회, 감독, 조사, 징계가 필요하다. 고대는 자원을 전부 뒤의 일에 쏟았고, 상당히 완비된 체계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정교함은 한 직선 위에서 쌓여 가는 것이 아니다. 늘 특정한 방향으로 자라며, 그 방향은 구축이 무엇을 생산하려 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벌금으로 만든 제우스 신상은 이 절의 논의를 가장 단단하게 받쳐 준다. 벌금의 목적은 대회에서 부정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몰아내는 방식은 부정행위자의 이름을 청동에 새겨, 입장하는 누구나 지나야 할 길에 세우는 것이었다. 제거한 것이 경고의 형태로 그 자리에 남았다. 더 나아가, 그 신상의 돌 받침대는 지금도 남아 있지만 우승자의 동상은 대다수가 사라진 지 오래다. 구축이 치우려던 것이 구축이 기리려던 것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6 누구의 이름이 들어가는가

키니스카는 기원전 396년과 기원전 392년, 두 차례 올림피아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 경주에서 우승했다. 파우사니아스는 그녀가 올림피아에 동상을 세웠다고 기록한다. 비문도 남아 있다. 거기서 그녀는 그리스 전체에서 이 승리의 관을 얻은 유일한 여자라고 자처한다. 증거는 확실하다.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전차를 몰지 않았다. 전차 경주의 승자로는 몰았던 사람이 아니라 말의 주인을 기록했다.

전차를 몬 사람이 모든 일을 했다. 그는 명단에 없다. 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어느 도시국가 출신인지, 자유민인지 노예인지도 알 수 없다.

이 구축이 그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전차 경주의 규칙은 전차를 모는 사람을 다룰 수밖에 없다. 출발, 반칙, 충돌의 결과를 그가 감당해야 하고, 채찍도 그의 몸에 떨어진다. 그래서 규칙 안에는 그가 있지만 명단 안에는 없다. 한 사람이 제도의 통제를 온전히 받으면서도 그 제도에 전혀 기록되지 않을 수 있다. 통제하는 일과 기록하는 일은 별개다. 앞의 일에는 그가 현장에 있으면 되지만, 뒤의 일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한다. 이 구축은 그가 현장에 있어야 할 곳에서만 그를 필요로 했다. 이 대목의 규칙은 지극히 명확했고 집행에도 모호함이 없었다. 승리는 말의 주인에게 돌아간다.

참가 자격 역시 대중적인 설명만큼 딱 잘라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는 출전에 앞서 자신이 그리스인임을 입증해야 했다. 아르고스의 혈통을 잇는 족보를 제시하고 나서야 출전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교과서들은 이를 근거로 ‘그리스인 자유민 남성만 참가할 수 있었다’고 써 왔다. 그러나 레메이선은 이 해석을 크게 수정하자고 제안했다. 범그리스 대회에 비그리스인을 공식적으로 배제하는 규정이 있었다는 관념 자체가 상당 부분 19세기 민족주의적 재구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사료를 읽으면 안정적이고 보편적인 강행 규정이 있었다기보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누가 그리스인에 해당하는지를 협상한 모습에 더 가깝다. 이것은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지 확증된 규칙이 아니다. 두 독법을 함께 놓아두어야 한다.

노예와 비시민의 위치는 더 흐릿하다. 노예는 출전할 수 없었다는 견해는 개연성이 높은 통설로 볼 수 있다. 다만 이를 직접 명시한 자료는 대중적인 글에서 느끼는 것보다 빈약하다. 어느 도시국가의 시민이어야 했다는 조건은 한층 더 신중하게 적어야 한다. 왕족, 식민 도시의 주민, 지역을 넘나들던 엘리트, 그리고 말의 주인을 승자로 적는 전차 경주의 제도는 실제 운용이 현대의 국적법보다 훨씬 유연했음을 보여 준다.

여자들에게는 다른 구축이 있었다. 헤라 경기는 실제로 열렸다. 종목은 소녀들의 단거리 달리기였고 연령별로 조를 나누었다. 가장 어린 조가 먼저, 중간 조가 그다음, 가장 나이 많은 조가 마지막에 달렸다. 거리는 남자 스타디온 달리기보다 조금 짧았다. 독립된 대회였다. 같은 구축의 수용 범위를 넓힌 것이 아니었다.

이 차이는 육상의 역사 전체에서 되풀이되므로 여기서 짚어 두자. 구축이 자신 안에 자리를 마련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면 두 가지 길이 있다. 자기 경계를 넓혀 안으로 들이거나, 옆에 다른 구축을 하나 더 세우거나. 두 번째 방법도 수용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두 일을 동시에 한다. 그 사람들이 갈 곳을 마련해 주면서, 원래의 구축은 글자 하나 바꿀 필요가 없게 만든다. 헤라 경기와 올림피아 경기는 서로 다른 대회였다. 열리는 날도, 주관하는 사람도, 달리는 거리도 달랐다. 하나의 명단을 함께 쓸 필요가 없었다. 기혼 여성의 관람 금지에 관해서는 파우사니아스가 엘리스의 법을 전한다. 금지된 날 올림피아에 나타난 여성은 티파이온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야 한다는 법이며, 칼리파테이라 이야기도 이 금령을 바탕으로 한다. 현대의 의문은 이런 금지 전승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디까지 적용했고 얼마나 자주 집행했느냐에 있다. 대상은 모든 여성이 아니라 기혼 여성이었다. 여사제와 특정 역할을 맡은 사람은 예외였을 수 있다.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극형은 실제 집행 사례가 충분하지 않아 규범적 위협에 더 가까워 보인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금지 전승에는 분명 사료상의 근거가 있지만 실제 운용은 법문의 글자보다 훨씬 유연했을 수 있다.

이 절에 등장한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식으로든 명단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키니스카는 명단에 들어갔고 대신 전차를 몬 사람은 들어가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들어가는 데 필요했던 것은 경주 한 번이 아니라 족보 한 벌이었다. 헤라 경기의 소녀들은 다른 명단에 들어갔다. 금령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구경할 자격마저 심사를 받아야 했다.

구축은 재기 시작하기 전에 누가 측정 대상이 될 수 있는지부터 선을 긋는다. 그 선은 숫자를 하나도 생산하지 않지만, 뒤에 나올 모든 숫자가 어느 집단에서 뽑혀 나올지는 정한다. 이 층위는 육상의 역사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 선을 긋는 근거만 계속 바뀌었다. 혈통에서 국적으로, 성별에서 호르몬 수치로, 신체에서 장비로. 근거가 무엇으로 바뀌든 그 선은 늘 있었다.

7 고대인도 비교했다. 다만 숫자로 하지 않았다

‘순회 전관왕’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네 성지의 큰 대회에서 모두 우승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 칭호는 누적된다. 어느 한 경기의 빠르기를 명부에 고정하는 대신, 한 사람이 네 성지에서 거듭 거둔 승리를 쌓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정체성으로 만든다.

이것은 실제로 비교의 기능을 일부 수행했다. 누가 순회를 완주했는지, 누가 더 먼저 했는지, 누가 두 번 이상 해냈는지 물을 수 있었다. 비슷한 비교도 있었다. 우승관의 총수, 한 가문이 거둔 승리의 총수, 선대나 후대 사람보다 더 많은 관을 얻었는지를 견주었다. 파우사니아스의 책에도 이런 가문 간 비교가 나온다.

구조적으로 다른 점이 또 있다. 쌓인 명예에는 보관을 맡을 중앙 기관이 필요하지 않다. 명예는 비문에, 동상의 받침대에, 찬가에, 누군가를 소개할 때 그 이름 앞에 붙이는 한마디에 자리 잡는다. 누구나 다시 말할 수 있고, 누구나 새길 수 있다. 수치 기록은 그럴 수 없다. 공인하는 곳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종목에 서로 모순되는 최고 성적이 동시에 여럿 존재하게 된다. 누적 방식은 보관을 모두에게 나누어 맡기고, 수치 방식은 공인을 한곳에 모아야 한다. 물론 누적 방식에도 다툼은 있다. 그러나 다투는 것은 그 성취가 해당 명예로 인정될 만하냐이지, 그 숫자가 유효하냐가 아니다.

그러니 고대에는 기록이라는 관념이 없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단정이다. 고대인들은 비교에 관심이 있었고, 비교하기 위한 것을 따로 만들어 놓기까지 했다. 다만 그것은 숫자 하나가 아니라 이어진 명예들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대에는 장소와 시대를 넘어 곧바로 대조할 수 있는 통일된 수치 기록 제도가 없었다. 말만 다듬는 문제가 아니다. 이 차이가 구축 전체의 작동 방식을 결정한다.

누적 방식에는 수치 방식에 없는 성질이 있다. 따로 짚을 만하다. 순회 전관왕이라는 칭호는 후대 사람이 깨뜨릴 수 없다. 같은 칭호를 얻거나, 횟수에서 앞설 수 있을 뿐이다. 칭호가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 어느 오후에 나타나 지워 버리지도 못한다. 그것은 선 하나가 아니라 이력이다.

수치 기록은 다르다. 기록은 지워질 때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기록이 세워지는 순간은 동시에 언젠가 깨지리라는 예고이기도 하다. 여기서 두 구축은 갈라진다. 이 연작의 뒤편에서 만날 골칫거리 대부분은 수치 쪽 가지에서 자란다. 누적 방식은 잠정성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없다. 잠정성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드는 것은 늘어나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는 연속이다. 거기에 들어간 항목은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남는다.

대가도 바로 거기에 있다. 누적 방식은 빠르고 느림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없다. 누가 그 시대 최고의 선수였는지는 알려 준다. 다른 시대의 선수보다 빨랐는지 느렸는지는 알려 주지 못한다. 300년 간격으로 살았던 두 순회 전관왕 사이에는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는 양이 하나도 없다. 명예의 계보는 늘일 수는 있지만 세대를 건너 환산할 수는 없다.

더 잘 보이지 않는 대가도 있다. 누적 방식이 보상하는 것은 꾸준히 여러 무대를 두루 거친 성취이지, 어느 하루의 극치가 아니다. 어느 오후에 아무도 달려 본 적 없는 속도로 달렸지만 다른 경기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사람에게 이 제도는 자리를 주지 않는다. 그의 그 오후도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진다. 수치 방식이라면 건져 올릴 사람을 누적 방식은 건져 올리지 않는다. 반대로 매번 이기되 매번 힘겹게 이기는 사람은 누적 방식에서는 최정상에 서지만, 수치 방식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두 구축이 골라내는 사람도, 놓치는 사람도 같지 않다.

이것이 이 구축의 경계다. 후대의 구축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다른 문제를 풀었을 뿐이고, 자기 문제만큼은 상당히 철저하게 풀었다. 그것이 남긴 잔여항과 수치 방식이 남긴 잔여항은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8 후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고대의 경기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

널리 알려진 설명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3년에 금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현대 연구에서는 대체로 너무 거친 설명이라고 본다. 올림피아 경기의 폐지를 명시한 온전한 칙령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연구는 종말을 4세기 말부터 5세기까지 이어진 과정으로 보는 편이다. 반이교 입법, 제의 기능의 쇠퇴, 지역 재정, 자연재해 등 여러 요인이 얽혔다. 다른 종결 연도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426년이다. 그해 더 철저한 반이교 조치와 성역 파괴가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단일한 종결 연도를 택하지 않고, 5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더는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고 적는 편을 택한다.

그리스 세계 전체의 연도를 정해 주던 명단이 정작 자기 끝에는 연도가 없다. 해를 헤아리는 도구에 자신의 마지막 해가 없다. 우연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 글에서 본 모든 것과 같은 문제다. 이 구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름만 생산했다. 제도의 죽음은 어느 한 사람의 이름으로 명단에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끝을 위한 항목은 마련해 두지 않았다.

한마디 더 할 수 있다. 끝을 확정하기 어려운 까닭의 일부는 대회가 한 번에 꺼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대회는 제사였고, 장터였고, 분쟁을 중재하는 자리였고, 도시국가들이 소식을 주고받는 곳이었다. 경기는 그중 한 층이었다. 법령 하나로 제물을 바치는 일은 금할 수 있어도, 사람들이 같은 때 같은 곳에 모이는 일까지 금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라질 때도 층마다 따로 사라졌다. 각 층의 시간은 서로 겹치지 않았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것에는 깔끔한 사망일 하나가 붙지 않는다.

1,500년 뒤, 그것은 다시 만들어졌다. 그것을 다시 세운 사람들에게는 다른 모습이 필요했다.

1896년의 부활은 고대에 근거가 없는 여러 가지를 고대 정신의 귀환으로 포장했다. 아마추어주의가 그중 하나다. 고대 경기는 처음부터 포상, 후원, 명성, 도시국가의 보답이 얽힌 체계 안에 있었다. 물질적 보상 없는 순수한 경기라는 생각은 19세기 귀족과 신사들의 스포츠 윤리를 고대에 투사한 것이었다. 마라톤도 그렇다. 고대 올림피아에는 그런 종목이 없었다. 브레알과 쿠베르탱이 1896년에 도입했다. 국제 평화와 보편적 형제애를 중심에 놓는 이념도 그렇다. 그것은 19세기 말 국제주의와 국민국가 정치의 산물이었다.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고대의 경기 문화가 강조한 것은 승리와 영광과 수치였지, 참가가 아니었다.

한 가지가 더 있다. 통일된 기록이라는 관념이다.

중요한 것은 부활을 이끈 사람들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일이 아니다. 그중에는 고전학 소양이 상당한 사람도 많았고, 이런 구축은 당시에도 숨겨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왜 그것이 존재해야 했느냐는 점이다.

막 세워진 제도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같은 자로 같은 것을 재라고 요구한다. 측정 결과가 국경과 시대를 넘어 유효하다는 것도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려면 이 자가 방금 발명된 것이 아님을 입증해 줄 출처가 필요하다. 막 발명한 자는 의심할 수 있다.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자는 쉽사리 의심하기 어렵다. 그래서 고대가 동원되었다. 하지만 고대에는 자가 없었다. 길게 이어진 이름들만 있었다. 이름으로는 자를 입증할 수 없다. 그러니 자를 덧붙였다. 과거에다가.

그리고 그 덧붙임은 실로 단단했다. 아마추어 원칙은 구호로 끝나지 않았다. 자격 심사가 되었고, 입상을 취소하는 근거가 되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여러 선수의 실제 운명이 되었다. 고대에 관한 잘못된 판단도 규정집에 들어가는 순간 더는 판단이 아니다. 집행할 수 있는 규칙이다. 그 규칙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에게는 고대의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무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 이 연작에서 거듭 만나게 될 장면이다. 구축이 정당성을 끌어오는 원천은 허구일 수 있다. 그렇다고 구축의 효력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부터 연작의 나머지 글들은 모두 한 가지를 다룬다. 덧붙인 그 자를 사람들이 진짜로 받아들였고, 실제로 만들어 냈다는 것. 자는 재기 시작했고, 점점 더 정확해졌다. 조금 더 정확해질 때마다 그 안에 담아 잴 수 없는 것들도 조금 더 또렷한 모양으로 드러났다.

고대의 대회는 천 년이 넘도록 돌아갔고, 길게 이어진 이름들을 남겼다. 그 이름들 뒤에 따라붙었어야 할 것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생산된 적이 없었다. 명단 가장자리에 남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키니스카 대신 전차를 몰았던 사람, 알키비아데스가 얻었지만 명부에는 없는 두 등수, 파이울로스가 실제로 뛴 거리, 네메아의 간격이 고르지 않은 표지들 사이를 달리는 데 실제로 걸린 시간. 지워진 것이 아니다. 이 구축에 그런 칸이 없었을 뿐이다.

한마디는 덧붙여야 한다. 이 모두가 억울한 사연인 것도 아니다. 전차를 몬 사람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기지 않았을 수 있다. 전차 경주의 승리를 말의 주인에게 돌리는 세계에서 살았고, 그것이 그가 아는 규칙이었다. 잔여항이 곧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잔여항은 구축의 장부에서 셈이 맞지 않는 부분이다. 그 안의 사람들이 스스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구축도 모르고, 오늘날의 우리도 알 길이 없다. 명단 밖에 남은 사람을 모조리 억울한 피해자로 쓰는 것은 후대의 구축을 빌려 그들 대신 말하는 일이다. 바로 그것을 피하려고 이 글을 썼다.

후대의 구축은 그 칸을 더했다. 더하고 나서야 한 칸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는 아직 제대로 재지 못한다. 그래도 계속 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