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본에 관하여
한국어판 안내: 중국어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를 위해 새로 쓴 글이다. 원문에서는 간체자와 번체자를 전환해 읽을 수 있다.
어느 학원. 교내 한쪽에 문이 하나 있다. 그 문 뒤로 길고 긴 나선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는 결투장이 펼쳐진다.
학생 둘이 결투장에 서 있다. 가슴에는 각자 장미 한 송이를 달았다.
규칙은 하나다. 상대의 가슴에 달린 장미를 베어 떨어뜨리면 이긴다.
이긴 사람은 한 사람을 데려갈 수 있다.
이 결투에는 심판도 관객도 기록도 없다. 싸움이 끝나면 둘은 계단을 내려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그 사람
그녀의 이름은 히메미야 안시다.
그녀의 신분은 ‘장미의 신부’다.
이 말은 칭호도 영예도 아니다. 하나의 기능이다.
결투가 벌어지는 동안 안시는 결투장 한편에 선다. 싸움에 끼어들지도, 소리를 내지도, 입장을 밝히지도 않는다. 싸움이 끝나면 이긴 사람 앞으로 걸어간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 사람의 것이다.
그녀에게 적용되는 규칙
작품은 장미의 신부가 따라야 할 규칙을 단도직입적으로 알려 준다.
자신과 약혼한 사람에게 절대복종할 것.
절대복종은 말 그대로다. 시키는 일을 하고, 시키는 말을 하고, 서 있으라는 곳에 선다.
이 규칙은 작품의 첫 화에서부터 실제로 작동한다.
당시 안시의 약혼자는 사이온지 쿄이치다. 그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뺨을 때린다.
안시는 피하지 않는다. 맞서 때리지도, 울지도, 누구에게 알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사과한다.
작품은 주변 사람들조차 이를 별일로 여기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학원에서 그것은 추문이 아니다. 신고할 일도 아니며, 누구도 놀라지 않는다.
그녀를 억눌러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복종이 바로 그 자리가 맡고 있는 일이다.
그 검
뺨을 맞는 장면보다 더 중요하게 살펴야 할 것이 있다.
초반의 결투들에서, 안시와 약혼한 승자는 그녀의 가슴에서 검을 한 자루 뽑아야 한다.
이름은 디오스의 검. 평소에는 그녀의 몸속에 있다. 검이 필요해지면 그 사람이 그녀의 몸 안으로 손을 넣어 검을 뽑아낸 뒤, 그것을 들고 싸운다.
작품은 이 동작을 아주 또렷이, 여러 차례 보여 준다. 안시가 몸을 뒤로 젖히면 상대가 그녀의 가슴에서 검을 뽑는다.
그녀의 몸은 무기를 보관하는 장소다.
이 규칙 안에서 그것은 학대가 아니라 절차다. 그 동작을 담는 화면은 장엄하다. 빛이 있고 꽃잎이 날린다. 의식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안시는 협조한다. 상대가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스스로 자세를 잡는다.
우테나는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이제 다른 한 사람을 보자.
텐조 우테나는 이 학원의 학생이다. 남학생 교복을 입어 여학생들 사이에서 눈에 띈다. 싸움을 잘하고 성격은 곧다.
그녀는 결투자가 아니다. 이 체계와 아무 관계도 없다.
우테나는 이미 사이온지가 안시의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도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친구 와카바의 연애편지 사건이다.
화가 난 우테나는 사이온지를 찾아가 따진다. 그러다 그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계단을 올라, 규칙조차 전혀 모르는 결투를 치른다.
그리고 이긴다.
이겨서 얻은 것
결투가 끝나자 안시가 다가와 우테나에게 고개를 숙인다.
이제부터 안시는 우테나의 것이다.
여기서 작품은 우테나의 반응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녀는 얼어붙는다.
이해할 수 없다. 친구를 위해 사이온지에게 따지러 갔을 뿐이다. 그가 안시를 때리는 모습에도 분노했다. 그런데 이제 한 사람이 눈앞에 서서, 앞으로는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한다.
친구를 위해 나섰고, 안시가 물건 취급을 당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이기고 나니, 자신이 안시를 소유하는 자리에 놓였다.
승리하는 순간부터 그 자리는 우테나의 몫이다.
빠져나가고 싶다
우테나는 우선 이 모든 것을 거절하려 한다.
이런 건 필요 없다고 한다. 히메미야는 상품이 아니라고 한다. 이제 결투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만두는 방법이 없다.
다음 결투에 나가지 않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신분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안시를 ‘놓아줄’ 수도 있다. 그래도 안시는 제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놓아준다는 행위 또한 하나의 명령이고, 안시는 명령을 실행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규칙에는 ‘해제’라는 절차가 없다.
이겨서 이 자리를 얻을 수는 있다. 스스로 내놓을 수는 없다.
자리를 옮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다음 도전자가 결투에서 당신을 이겨야 한다.
따라서 우테나가 안시를 이 체계에서 빼내려 할 때 할 수 있는 일도 하나뿐이다. 계속 이기는 것.
계속 이기는 것. 바로 이 체계가 우테나에게 요구하는 일이다.
부수고 싶은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기계의 부품이 되는 것이다.
결투자들
우테나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찾아온다.
학생회 멤버들이다. 키류 토우가, 아리스가와 쥬리, 카오루 미키, 사이온지 쿄이치. 저마다 원하는 것을 품고 결투에 나서지만, 그 전에 안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결투가 상품으로 약속하는 것은 ‘세계에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힘이다.
이 규칙대로라면 새로운 도전자가 이길 때마다 안시는 그 승자를 따라가야 한다.
그가 시키는 일을 하다가, 그가 패하면 다음 승자를 따라가야 한다.
작품은 이 일에 대한 안시의 의견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의견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우테나가 하려는 일은 안시를 그 자리에서 빼내는 것이다.
그녀는 서른 화가 넘도록 시도한다.
다음 글에서 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