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작을 한국어 독자를 위해 새로 쓴 글이다. 원문 사이트에서는 간체와 번체를 전환해 읽을 수 있다.
마지막 싸움에서 마키마는 이런 말을 한다.
대략 이렇다. 왜 또 덴지 군으로 돌아온 거야. 정말 불쾌하네.
눈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런데 마키마는 기분이 나쁘다. 자신이 원하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키마가 원하는 것은 체인소 맨이다.
능력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작동 방식부터 마저 짚고 가자. 이 글의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나온다.
마키마는 지배의 악마다. 지배할 수 있는 대상에는 조건이 하나 붙는다.
자기보다 격이 낮다고 여기는 대상에게만 능력이 통한다.
이것은 기술적인 제약이 아니라 능력 자체의 정의다. 누군가를 지배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자기 아래에 놓아야 한다. 아래에 있지 않다고 여기는 순간, 능력은 발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체인소 맨은 마키마에게 무엇인가.
동경하는 대상이다.
마키마는 체인소 맨을 사랑하고 숭배한다. 판을 짜고, 길을 닦고, 모으고, 기다리며 그토록 많은 일을 한 것은 전부 체인소 맨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작품은 분명하게 말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마키마는 체인소 맨이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체인소 맨을 지배하지 못한다.
계산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 마키마의 진심이 있는 바로 그 부분이 능력을 가로막는다. 숭배가 깊어질수록 능력은 더더욱 발동하지 않는다.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덴지다. 관심도 없고, 제 아래에 두고, 개처럼 먹여 기르는 소년이다.
한 가지 행동, 두 방향
여기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설명은 이렇다. 능력에 허점이 있었고, 그 허점 때문에 졌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기술적 고장으로만 보면 이 일이 실제로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놓치기 때문이다.
마키마가 두 대상에게 하는 일을 보자.
체인소 맨에게 하는 일은 손에 넣는 것이다. 몸을 원하고 힘을 원한다. 그 힘으로 세계를 다시 쓰고 싶어 한다. 그것을 위해 여러 해에 걸쳐 판을 짰다.
덴지에게 하는 일도 손에 넣는 것이다. 밥을 주고, 거처를 주고, 소원 목록을 하나씩 채워 주어 자기 개로 만든다.
체인소 맨은 위에, 덴지는 아래에 놓는다. 하지만 어느 자리에 놓든 하는 행동은 같다. 상대를 제 손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마키마에게 동경과 지배는 두 가지 태도가 아니다. 같은 행동이 두 방향으로 향한 것이다.
무언가를 올려다볼 때 마키마는 그것을 차지하고 싶어 한다. 내려다볼 때도 차지하고 싶어 한다. 세 번째 방식은 없다.
마키마가 원하는 것
그런데 작품은 마키마에게 동기를 하나 준다. ‘지배욕’이라는 말보다 훨씬 구체적인 동기다.
마키마가 원하는 것은 대등한 관계다.
이렇게 적어 놓으면 잠깐 멈칫하게 된다. 그동안 한 모든 일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이 실제로 준 동기다. ‘체인소 맨으로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근본적으로 바라는 것은 협력이지 예속이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바라는 것은 대등함인데, 할 줄 아는 것은 손에 넣는 일뿐이다.
대등한 관계에는 다른 행동이 필요하다. 어느 순간에는 가져오려는 손을 멈추고, 상대가 자기 자신으로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 일은 내게 아무런 이익도 돌려주지 않는다.
마키마가 가진 능력에는 그런 기능이 없다. 하는 일 전부가 서열 매기기와 차지하기다. 위에 놓고 차지한다. 아래에 놓고 차지한다.
그 체계에는 자기와 같은 높이에 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없다.
그래서 원하는 관계를 자기 방식으로는 끝내 만들어 낼 수 없다. 한 걸음 밀고 나갈수록 한 걸음 더 멀어진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상대를 자기가 손에 넣은 물건으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본인은 이 사실을 모를 것이다. 작품은 마키마가 깨닫게 하지 않는다. 끝까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눈앞에 선 사람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왜 또 덴지 군으로 돌아온 거야”라는 말로 돌아가자.
그 말이 드러내는 것은 단순하다. 마키마는 체인소 맨을 알아본다. 덴지는 알아보지 못한다.
그동안 함께 밥을 먹고, 영화관에 따라가고, 소원 목록을 한 줄씩 지워 받은 사람은 덴지였다.
마키마는 덴지가 무엇을 먹기 좋아하는지 기억한다. 언제 무엇을 조금 주어야 하는지 안다. 이 사람의 어디를 건드리면 움직이는지 하나하나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 모든 일을 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본 것은 가슴속에 든 것이었다.
두 가지는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오랫동안 실제로 그랬다. 누군가는 당신을 아주 잘 알면서 당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을 수 있다. 아는 것과 마음을 쓰는 것은 같지 않다. 움직이게 하려면 알아야 한다. 마음까지 쓸 필요는 없다.
작품은 이 사실을 몇 번이고 조용히 되풀이한다. 마키마는 덴지에게 잘해 준다. 함께 놀러 나가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한다. 그런데 그 모든 행동은 그릇을 향한 것이다. 정작 받드는 것은 그 안에 든 존재다.
마지막에 바로 그 지점에서 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키마가 대상을 알아보는 방식에는 두 칸밖에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을 잘못된 칸에 넣었다. ‘관심 없음’에 분류한 탓에 덴지에 관해 아는 모든 것은 ‘어떻게 말을 듣게 할까’까지만 닿았다.
한 사람을 말 잘 듣게 만드는 법만 아는 사람은, 그가 그 밖에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먹어 치우는 수밖에
한 겹이 더 남았다. 이 글에서 마지막으로 볼 작동 원리다.
마키마는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계약을 맺었다. 자신을 향한 공격은 무작위로 고른 일본 국민의 사고나 병사로 바뀐다.
그러니 공격해서 죽일 수 없다. 마키마를 때리면 다른 사람이 죽는다.
마침내 덴지가 떠올린 방법은 마키마를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먹는 것은 공격이 아니기에 가능한 방법이다.
덴지는 마키마의 살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미소된장국과 흰쌀밥을 곁들였다.
키시베가 그 방법을 실행하는 일을 도왔다. 요리에도 거드는 사람이 있었다.
덴지 자신은 그렇게 하면 마키마와 하나가 된다고 설명한다.
작품은 이 장면을 매우 고요하고 투박하게 그린다. 비장하지도, 장엄하지도, 역겹지도 않다. 그저 한 사람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장면이다. 밥, 국, 반찬이다.
작품은 마지막에 자신이 다뤄 온 가장 큰 것을 밥 한 끼로 처리한다. 이 연작의 첫 글 역시 시작은 밥이었다.
흰 식빵
이제 작품의 맺음이다.
지배의 악마는 죽은 뒤 중국에서 어린 여자아이로 다시 태어난다. 이름은 나유타다. 마키마에 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키시베가 그 아이를 데려왔다. 이유는 현실적이다. 일본 정부에 맡기면 두 번째 마키마로 자라날 테니까.
그래서 덴지가 맡았다. 데리러 갈 때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몰랐다.
누군가 나유타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묻는다.
나유타는 말한다. 흰 식빵.
이 연작은 여기서 끝난다.
마지막으로 두 장면을 나란히 놓겠다. 사이에 말을 보태지는 않겠다.
첫 장면. 여러 해를 굶주린 소년이 처음으로 자리에 앉아 제대로 된 밥을 먹는다. 밥을 준 사람은 그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 개가 되든가, 여기서 죽든가.
둘째 장면. 막 데려온 아이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묻는다. 아이는 흰 식빵이라고 한다. 묻는 사람은 그때 그 밥을 먹었던 사람이다.
두 장면. 같은 크기. 똑같이 밥 한 끼.
그 사이를 채운 97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 끼니가 정말 같은 것인지, 오랫동안 남이 주는 밥을 먹다가 직접 다른 사람을 먹일 때 그 손에는 무엇이 쥐어져 있는지.
그것은 여기에 쓰지 않겠다.
원문 연작 · 다루는 범위: 후지모토 타츠키 《체인소 맨》 제1부, 1–97화. 결말까지의 내용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