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알아보기 어려운 식민화는 ‘내가 원한 것’이라고 말한다
감독자가 사라진 뒤에도
가장 효율적인 통제는 감시자를 두는 것이 아니다. 감시자가 없어도 스스로를 계속 평가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수면과 운동, 공부와 휴식까지 기록하고, 하루를 얼마나 생산적으로 썼는지 점검한다. 이런 도구는 유용할 수 있고 자기 절제도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도구가 정체성이 될 때 생긴다. 삶의 일부를 이해하려고 수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수치로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SAE는 시스템의 논리가 자기 이해의 바닥까지 들어오는 과정을 내적 식민화라고 부른다.
익숙한 다섯 가지 자아
측정되는 것만 현실이라고 믿는 지표형 자아, 타인보다 앞설 때만 가치를 느끼는 경쟁형 자아, 자신을 끝없는 개선 프로젝트로 다루는 최적화형 자아가 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서사에 갇힌 자아와, 원하는 곳으로 가기보다 뒤처질까 두려워 달리는 자아도 있다.
이런 사람은 매우 성공할 수 있다. 끈기와 성취는 욕망의 강도를 보여 줄 뿐 그 욕망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증명하지 않는다.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조언도 부족하다. 이식된 욕망 역시 언제나 1인칭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진짜 자아’를 대신 판정하지 않기
비판자는 쉽게 오만해진다. 타인의 목표를 가짜 욕망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그 사람의 진짜 마음을 더 잘 안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러나 SAE는 삶의 내용을 판정하지 않는다. 그 목적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검토와 거부, 수정이 가능한지를 본다.
보상이 사라져도 그 일을 계속 원하는가, 잠시 멈췄을 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가 아니면 정체성이 붕괴하는가, 하나의 목적이 다른 목적과 공존할 수 있는가. 답은 밖에서 확정할 수 없다. 사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순수한 자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1인칭의 저자가 되기
내적 식민화에서 벗어나는 일은 새로운 자기계발 프로젝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최적화하지 않기’를 더 완벽하게 수행한다면 통치자는 그대로다. 점수가 붙지 않는 시간, 성과가 아니라 존재를 알아보는 관계, 전혀 다른 척도로 조직된 삶과의 만남이 필요할 수 있다.
외부 명령은 권력이 어디서 오는지 보여 준다. 내적 식민화가 더 어려운 이유는 권력이 내 목소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해방은 모든 규율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다시 묻고 고칠 수 있는 저자의 자리를 회복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