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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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 · Buddhist Interfaces · 한국어 재구성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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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목적지가 아니다

Han Qin (秦汉)

팔불은 여덟 칼이 아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음, 현상 뒤의 더 깊은 ‘무’, 세상일을 대수롭지 않게 만드는 위안으로 오해되기 쉽다. 중관의 공은 셋 모두가 아니다. 자생하고 자립하며 조건과 무관하게 자기 안에서 완성된 본성이 있다는 자성 집착을 겨눈다. 연기하는 것은 자기 힘만으로 서는 고유 본성을 가질 수 없다.

『중론』 첫머리의 불생불멸·불상부단·불일불이·불래불출은 서로 무관한 여덟 대상을 베는 칼이 아니다. 자성적으로 생기고 지속하는 실체라는 한 집착을 여러 방향에서 푼다. 그 뿌리가 빠지면 영원하거나 완전히 끊어지고, 절대적으로 같거나 다르며, 실체로 오고 가는 ‘나’도 서지 못한다.

세우지 않기와 나머지를 밝히며 세우기

SAE도 어떤 구성도 스스로 닫히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엔진은 다르다. 중관은 의존에서 무자성을 이끌고, SAE는 가림에서 나머지를 이끈다. 하나의 구성이 경계를 그어 성립하는 순간 거두지 못한 바깥이 생긴다는 논리다. 결론의 모양이 가까워도 이유를 교환할 수는 없다.

삼론의 파사현정은 거짓 이론을 부수고 마지막 참 이론을 세운다는 뜻이 아니다. 길장에게 ‘정’은 어떤 교설도 자성 있는 거처로 만들지 않는 데 있다. SAE는 여기서 한 걸음 갈라진다. 부정 뒤에는 새 언어·판단·실천이 실제로 침전한다. 아무것도 세우지 않았다고 하면 그 작동을 숨긴다. SAE의 규율은 세우지 않기가 아니라 세운 것이 남긴 나머지를 함께 인수하는 일이다.

사중이제와 되돌아가지 않는 부정

길장은 이제를 여러 겹으로 밀어 올린다. 첫째 유는 속제이고 공은 진제다. 둘째 유/공의 대립 전체가 속제가 되고 비유비공이 진제가 된다. 셋째 이/불이의 틀까지 비이비불이로 옮긴다. 넷째 앞선 단계 모두를 교화의 문으로 거두고 의지하거나 얻을 대상을 남기지 않는다.

셋째 단계가 중요한 이유는 이중부정이 단순 긍정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틀 안의 항을 다시 뒤집는 대신 이/불이라는 틀 자체를 대상으로 올린다. 넷째는 더 높은 제5의 진리가 아니다. 사다리와 목적지 모두 자성 지위를 잃는다. SAE도 종합을 종점으로 삼지 않지만, 나머지를 구성 밖의 실재적이며 다 거둘 수 없는 것으로 남긴다.

가명의 봉합선

연기한 법은 공하고, 가명이며, 중도라는 용수의 명제에서 가명은 무효라는 뜻이 아니다. 공한 사물도 인과를 낳고 말과 수행을 지탱한다. 효력이 자성을 주지 않을 뿐이다. SAE는 여기에 구성이 실제 제약을 남긴다고 더 말한다. 법적 판결·어린 시절의 기억·언어 습관은 다음에 가능한 것을 바꾼다.

중관은 ‘실제 제약’이 SAE가 몰래 보존한 자성의 흔적 아닌지 물을 수 있다. SAE는 그 비판을 수행하고 유지하는 행위도 실제 작동이며 새로운 위상을 만든다고 답한다. 가명을 너무 얇게 읽으면 계속 구성한다는 말의 발판이 사라진다. 어느 답도 상대 언어 안으로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다. 이것이 핵심 봉합선이다.

공도 다시 공하게 한다

중관의 칼은 SAE의 출발점도 겨눈다. 존재에 앞선 부정인 Negativa는 부정에서 면제되는가. 누가 부정해도 “지금 부정이 작동하므로 내 말이 증명된다”고 답한다면 가장 깨뜨리기 어려운 자성을 만든 셈 아닌가.

SAE는 Negativa에 관한 자기 설명도 나머지를 가진 구성이라고 인정할 때만 질문을 받을 수 있다. Negativa는 숭배할 대상이나 최종 면허를 가진 문장이 아니다. 중관은 공까지 공하게 하여 불립을 지키고, SAE는 “이 글도 구성이다”라고 하여 잠정적 구성을 지킨다.

팔불이 14DD(자기 목적 주체)의 실체화를 푼다고 읽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15DD(자기 입법 주체)의 타인 인정으로 간다는 뜻은 아니다. 그 윤리적 하류는 SAE의 독법이지 중관의 숨은 목적이 아니다. 공은 목적지가 아니고 나머지도 영원한 정답이 아니다. 두 체계는 도착을 거부하지만 하나는 무소득 때문에, 다른 하나는 나머지가 0이 되지 않기 때문에 거부한다.

세속제는 공을 설명하기 위한 낮은 단계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름과 약속, 책임과 고통이 실제로 작동하는 자리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독립된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도 드러난다. 여기서 SAE의 주체성은 유용한 관습적 구성일 수 있지만 중관의 공이나 무아와 동일하지 않다. 14DD와 15DD는 목적과 입법 권한을 보호하기 위해 구조를 세우고, 중관은 그 구조마저 붙잡을 실체가 되는 순간 해체한다. 한쪽은 ‘누가 배제되었는가’를 묻고 다른 쪽은 그 ‘누가’가 어떻게 성립했는지를 묻는다. 둘을 합치지 않을 때 규범적 책임과 비실체성의 긴장이 생산적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