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아닌 것
정의를 서두르기 전에 바닥부터 치운다
권력만큼 서로 다른 뜻을 한 단어에 얹은 개념도 드물다. 의지를 관철하는 능력, 함께 행동할 때 생기는 힘, 담론과 지식의 그물, 계약이나 일반의지까지 모두 권력이라고 불린다. 각 설명은 현실의 일부를 붙잡지만 같은 대상을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첫 글은 “권력이 무엇인가”보다 “무엇을 권력으로 잘못 부르는가”를 먼저 묻는다.
동의는 이미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반응이지 그 관계의 최초 원인이 아니다. 정당성은 권력이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이야기이며, 제도는 먼저 형성된 힘의 배치를 굳혀 놓은 그릇이다. 헌법과 선거가 권력을 안정시키고 이어 줄 수는 있어도, 그 제도를 만들기 전부터 있었던 위치 차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힘과 자원이 있어도 권력이 아닐 수 있다
폭력도 권력 그 자체는 아니다. 곰이 다른 곰을 쓰러뜨리는 것은 물리적 힘의 충돌이다. 그러나 사람이 총구 앞에서 상대의 사회적 위치와 자신의 선택 가능성을 읽고 그 비대칭을 행동 조건으로 받아들이면, 폭력은 권력의 매개가 된다. 다른 주체가 관계의 의미를 등록해야 힘이 권력으로 바뀐다.
자본 역시 소유권, 교환, 법 집행이라는 사회적 구조가 있을 때에만 타인의 행동 공간을 바꾼다. 지하실의 금덩이는 저절로 명령하지 않는다. 동물의 서열도 인간 권력의 출발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직원이 상사에게 따르는 이유는 근력이 아니라 지위에 붙은 기대와 제재, 그리고 공동의 이야기 때문이다.
주체가 사라지면 권력도 사라진다
의식을 잃은 사람을 옮기는 일은 몸에 영향을 주지만 권력 관계는 아니다. 반대로 감옥에 갇힌 사람이 분노하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계산한다면, 그는 비대칭을 행위의 조건으로 등록하고 있으므로 권력이 작동한다. 가장 극단적인 지배자가 상대를 완전한 물건으로만 취급할 때 남는 것은 대상 조작이지 권력이 아니다.
이 역설이 이론의 문을 연다. 권력은 상대를 제한하지만 동시에 상대가 주체이기를 필요로 한다. 주체성을 완전히 없애면 권력의 성립 조건도 없어진다. 동의도 폭력도 자본도 권력의 뿌리가 아니라면, 다음 질문은 두 주체 사이의 비대칭이 어떻게 사회적 관계로 자라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