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 108 · 자기 자신이 되기
노자, 말을 마치고 떠난 사람
옛 기록을 지키던 사람, 이름을 경계하는 책, 아무도 종착지를 모르는 떠남. 수레바퀴의 빈 중심에서 경계 앞에 선 일곱 사람의 모습까지.
1. 기록을 보관하는 방
노자에 관해서는 장자보다도 아는 것이 적다. 사마천은 장자를 쓰면서 몽이라는 출신지와 칠원에서 관리로 일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나 노자에 이르면 그가 누구인지부터 확정하지 못한다. 서로 다른 전승을 함께 적고, 그 가운데 한 인물과의 동일인설에 대해서는 세상 누구도 그 진위를 모른다고 말한다.
첫 번째 이름은 이이, 자는 담이다. 초나라 고현 사람으로 주나라 왕실의 기록을 보관하는 관리였다고 한다. 두 번째는 노래자다. 역시 초나라 사람이며 열다섯 편의 글을 썼다고 한다. 세 번째는 주나라의 태사 담이다. 『사기』의 서술에서는 공자가 죽은 뒤 백이십구 년이 지나서야 나타난다.
세 이름. 사마천은 첫 번째 인물을 전기의 중심에 놓지만, 나머지를 지워 매끈한 생애를 만들지는 않는다. 이름들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거리가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말이 있다. 노자는 숨어 사는 군자였다.
몸을 감춘 사람. 자기 삶을 적으려는 역사가의 눈에도 전부를 내주지 않는 사람.
그 불확실한 전기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남는 모습이 있다. 주나라 수장실의 사관. 책과 기록을 맡아 지키는 사람이다. 그 방을 이제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다. 다만 『사기』가 남긴 형상을 따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옛 기록 곁에서 오래 지내면, 눈앞의 질서가 어떻게 보일까.
왕조와 의례와 명령, 번영과 쇠락에 관한 글이 한 시대 위에 또 한 시대를 포개 놓은 풍경을 상상해 보자. 시대마다 자기 질서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더 오래된 기록 옆에 놓이는 순간, 흔들리지 않는다던 것에도 시작과 끝이 생긴다.
여기서 몇 사람의 시선이 달라진다. 공자는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며 되찾을 가치가 있는 질서를 바라본다. 묵자의 겸애는 사람 사이의 편애를 드러낸다. 기록을 지키는 노자의 모습은 다른 질문을 불러온다. 어느 왕조를 영원히 이어 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영원할 듯한 것조차 왜 쇠하는가.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이름과 마주친다.
2. 도
말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음은 하늘과 땅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다. 욕망 없이 그 미묘함을 보고, 욕망과 함께 그 드러나는 끝을 본다. 둘은 함께 나오되 이름을 달리한다. 함께 현묘하다 하고, 현묘하고 또 현묘한 것은 온갖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다.
지금 전해지는 『도덕경』 첫 장이다. 책 전체의 서곡처럼 들리면서도 문 앞에 세워 둔 경고처럼 들린다. 뒤따르는 문장을 너무 믿기 전에, 먼저 문장 자체의 힘에 한계를 긋는다.
첫 문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부터 말하려는 것이, 내가 말한 것 안에 전부 들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하나의 길을 말로 가리키는 것과 그 길을 다 말하는 것은 다르다. 이름을 주는 것과 그 대상을 영원히 고정하는 것도 다르다. 알맞은 표현을 외웠다고 해서 그 표현이 가리키는 것까지 내 소유가 되지는 않는다.
책은 처음부터 역설 속에 선다. 언어를 써서 언어가 다 닿지 못하는 곳을 가리킨다. 이름을 쓰면서 이름이 모든 것을 붙잡을 수 없다고 일러 준다. 우리에게 건네진 말이, 말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도 왜 말하는가. 그냥 책장을 비워 두면 되지 않았을까.
관문을 나서는 이야기는 하나의 답을 준다. 떠나기 전에 몇 마디라도 남겨 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3. 관문을 나서다
『사기』는 노자가 도와 덕을 닦으며 자신을 감추고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데 힘썼다고 적는다. 주나라에서 오래 살다가 그 쇠락을 보고 떠나기로 했다. 관문에 이르자 관령 윤희가 청한다. 이제 숨어 버리려 하시니, 부디 저를 위해 글을 써 주십시오.
노자는 위아래 두 편에 도와 덕의 뜻을 오천여 자로 적고 떠났다. 그가 어디에서 생을 마쳤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후대의 전승은 이곳을 함곡관으로 본다. 한 사람은 사라지려 하고 다른 사람은 무언가 남겨 달라고 붙든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계속 사람들을 지도할 자리도 아니다. 몇 마디 말이다.
내키지 않더라도 조금 수고하여 써 달라는 청. 한 사람은 가고 싶고, 다른 사람은 그 목소리를 조금 더 붙들어 두고 싶다. 이야기 속 노자는 청을 받아들인다. 글은 남는다. 사람은 길을 계속 간다.
마지막 문장은 새로운 행선지를 알려 주지 않는다. 오히려 뒤따라갈 수 있는 길을 지운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이 장면을 그대로의 실록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 긴장은 살아 있다. 이름 없이 살려 하고 이름의 영속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잠시 멈추어 말한다. 말해진 것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일단 말해 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어떻게 다루는지 감시하려고 남지는 않는다.
이 결말에는 처형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고 예수는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며 거듭 곤경에 빠졌고, 집을 잃은 개에 비유되었다는 일화도 남겼다. 노자의 이야기는 재판이나 거절로 끝나지 않는다. 주나라가 쇠하는 것을 보고 떠난다.
단순하고 말끔한 동작이다. 여기서 나란히 놓는 몇 가지 자세 가운데, 노자는 퇴장을 자기 손에 남겨 둔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으로 열어 놓은 빈터에 머문다. 공자는 이해할 사람을 기다린다. 노자는 할 말을 마치고 간다.
4. 용
『사기』는 떠남에 앞서 또 다른 이야기를 놓는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이야기다. 남아 있는 것은 의식의 절차를 가르치는 수업이 아니다. 질문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직접 닿는 대답이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들은 뼈와 함께 이미 썩었고, 말만 남아 있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세상에 나서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구르는 쑥처럼 옮겨 간다. 훌륭한 상인은 재물을 깊이 감추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고, 덕이 두터운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교만과 많은 욕망, 꾸미는 태도와 지나친 뜻을 버리라. 그것들은 당신에게 이롭지 않다. 내가 할 말은 그뿐이다.
한 사람은 옛 예를 되살리려 한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만든 이들도 죽는다고 일깨운다. 한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은 그 봉사의 뜻에 자기 욕망도 숨어 있지 않은지 묻는다. 한 사람은 엄숙한 사명을 짊어진다. 다른 사람은 덕이 있다고 늘 덕 있는 얼굴을 내보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한 번, 또 한 번 파고든다. 특정한 의견 하나가 아니라 욕망과 몸가짐과 사명감으로. 세상을 어떻게 정돈할지 묻던 사람이 어느새 자신에 관한 질문 앞에 서 있다.
돌아온 공자는 제자들에게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이야기한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짐승은 달린다. 달리는 것에는 그물, 헤엄치는 것에는 낚싯줄, 나는 것에는 화살이 있다. 그러나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용은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만난 노자는 용과도 같았다고 한다.
비유를 조금 더 따라가 보자. 도구는 붙잡고, 정의는 분류하고, 제도는 자리를 배정한다. 용은 그 그물을 빠져나간다.
공자는 예와 음악과 인과 의로 사람들의 삶을 위한 커다란 그물을 짜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안에 전부 들어가지 않는 삶이 있다. 그물을 짜는 사람이 그것과 마주친다.
이 비유는 이천 년 넘게 이어졌다. 거기에는 어느 현자가 더 높은가 하는 순위 이상의 것이 있다. 노자는 그물 밖에 있다. 그물이 쓸모 있다는 것과 그물이 전부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5. 되돌아감
노자는 도는 말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사라지기만 한 것이 아니다. 남긴 말 가운데 하나의 움직임을 응축한 듯한 문장이 있다. 되돌아감은 도의 움직임이고, 약함은 도의 작용이다. 천하의 만물은 있음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난다. 짧은 마흔 번째 장이다.
되돌아감을 뜻하는 ‘반’에는 반대로 뒤집히는 움직임도 들어 있다. 강함이 끝까지 밀려가 굳어지면 오히려 부서지기 쉬워진다. 번영의 정점에는 쇠락의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다른 방향도 들린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방향이다.
둘을 함께 읽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움직임은 아니게 된다. 자람은 쇠함으로도 이어지고, 펼쳐짐에는 돌아갈 가능성이 남아 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있음에서 다시 없음으로. 다만 이것은 변화를 바라보는 눈이지, 모든 나라의 운명을 미리 정해 둔 시간표가 아니다.
약함도 단순히 아무 힘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물은 부드럽다. 돌을 이길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돌을 닳게 한다. 효력은 언제나 강타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부드러운 것이, 힘을 동경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작용을 드러낸다.
그런데 오래된 사본이 익숙한 마지막 구절을 흔든다. 1993년 출토된 곽점 죽간의 해당 문장은 흔히 ‘천하의 사물은 있음에서 생겨나고, 없음에서 생겨난다’로 읽힌다. 전해지는 판본에 있는 ‘있음’ 한 글자가 적다. 한 글자의 차이가 문장의 방향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필사하면서 글자나 반복 표시가 빠진 것일까. 아니면 원래 있음과 없음을 나란히 놓았던 것일까. 연구자들의 답은 같지 않다. 이 죽간만으로 전래본의 독법을 뒤집을 수는 없고, 동시에 서로를 낳는다고 확정할 수도 없다. 다만 당연하게 여겼던 순서가 다시 질문이 된다.
둘째 장에는 ‘유무상생’이라는 다른 구절도 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통해 드러나고 생겨난다. 그 곁에 되돌아감을 놓으면 일방통행이 아니라 오가는 리듬이 들린다. 있음과 없음을 서로 차단된 두 상자에 가두기보다, 어떻게 상대를 드러내는지 바라보게 된다.
돌아간다. 그리고 시선의 방향을 바꾼다. 이제 상상 속 기록지기로 돌아가 보자. 과거의 성대함이 오늘은 글자로 그의 앞에 놓여 있다. 그는 현재의 왕조를 어떻게 꼭대기까지 밀어 올릴지만 궁금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꼭대기에 이른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쇠락 뒤에 반드시 부흥이 온다는 약속이 아니다. 오늘의 성대함을 영원으로 착각하지 않는 일이다.
6. 있는 것과 비워 둔 곳
책에서 유난히 빛나는 대목은 먼 우주를 다루지 않는다. 수레바퀴를 다룬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통에 모이지만,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 수레를 쓸 수 있다.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지만, 속이 비어 있어야 무언가 담을 수 있다. 문과 창을 내어 방을 만들지만, 빈 곳이 있어야 사람이 산다. 있는 것이 조건을 주고, 비어 있는 곳이 쓰임을 가능하게 한다.
바퀴, 흙그릇, 방. 이 세 가지는 추상적인 가르침을 꾸미는 삽화가 아니다. ‘빈 것은 중요하다’는 결론만 외우고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다. 손에 닿는 사물 안에서 비로소 ‘없음’이라는 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퀴살과 그릇의 벽, 집의 벽과 출입구에는 형태가 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그것들이 없으면 바퀴도 그릇도 집도 없다. 그러나 만든다는 것은 빈틈이 없어질 때까지 재료를 더하는 일이 아니다.
바퀴통의 구멍은 차축을 받아들인다. 그릇의 빈 속은 담으려는 것을 받아들인다. 방의 공간은 한 사람의 삶을 받아들인다. 그 자리를 전부 채워 버리면 물건이 더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지가 사라진다.
경계가 형태를 준다. 열려 있는 곳이 쓰임을 준다. 더하지 않은 것이 만들어 붙인 것만큼 중요해진다.
장자의 혼돈 우화를 옆에 놓아 보자. 친구들은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있는 일곱 구멍을 뚫어 준다. 그러자 혼돈이 죽는다. 더 완성된 형태를 준다는 것이 언제나 상대를 살리는 것은 아니다. 바퀴통도 그렇다. 나무는 튼튼해야 하지만 중심까지 메워서는 안 된다.
이렇게 나란히 놓으면 장자는 나누는 일의 대가를, 노자는 비워 두는 곳의 가치를 보여 준다. 한쪽은 무언가 더할 때 무엇을 빼앗는지 묻는다. 다른 쪽은 메우지 않은 곳이야말로 그 사물을 작동하게 하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 두 시선이 서로를 밝힌다.
7. 말할 수 없음과 알 수 없음
이제 노자 곁에 칸트를 놓을 수 있다. 칸트에게 우리가 아는 것은 감성과 오성의 조건 아래 나타나는 사물이지, 그 조건과 무관한 사물 자체가 아니다. 공간, 시간, 범주. 앎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도 정한다.
여기까지 읽어 온 노자에서 이름은 사물의 이름 붙일 수 있는 면에 닿는다. 그러나 그 대상을 다 말하지는 못한다. 어떤 표현이 유용한 것과 도가 내 소유가 되는 것은 다르다. 쓸모 있는 말이라고 해서 그 말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한쪽에는 앎의 경계가 있고, 다른 쪽에는 말의 경계가 있다. 물자체는 도와 같지 않다. 그래도 두 경계를 함께 보면 하나의 경고가 들린다. 우리의 도구가 곧바로 세계 전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앞에 서는 태도는 다르다. 칸트는 가능한 경험을 넘어선 대상을 지식으로 붙잡으려는 이성을 비판한다. 그렇다고 펜을 놓지는 않는다. 세 비판서를 통해 앎과 행동과 판단을 계속 묻는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오랜 세월 일한다. 경계선을 그은 뒤에도 한 생애의 일이 남아 있다.
노자도 언어의 권한에 한계를 알린다. 떠남의 전설은 그 경고에 움직임을 붙인다. 말하고 간다. 후대의 그림에서는 푸른 소를 타고 관문을 넘어 길 끝으로 사라진다. 『사기』의 이 대목에는 소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청우는 사람들이 그의 떠남을 기억하는 모습이 되었다.
칸트는 남아서 세 개의 큰 건물을 세운다. 노자는 오천 남짓한 글자를 남기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한 사람은 경계 곁에서 계속 일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 말을 관리하기 위해 머무르지 않는다. 떠나는 뒷모습이 한 가지 사유의 자세를 눈에 보이게 한다.
8. 도는 하나를 낳는다
노자와 장자의 거리도 남겨 두고 싶다. 혼돈을 다시 떠올려 보자. 일곱 구멍이 없는 존재, 선의의 도움을 받다가 죽은 존재. 그 이야기에서 구별이 새겨지기 전의 순간을 상상할 수 있다. 서둘러 눈과 귀를 만들어 주지 말고, 잠시 그대로 바라본다.
『노자』 마흔두 번째 장은 다른 움직임을 말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품으며, 기가 어우러짐으로 조화를 이룬다.
하나와 둘과 셋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주석가마다 다르다. 이어지는 음양과 기의 구절을 따라가면, 아직 나뉘지 않은 하나, 서로 마주하는 두 힘, 그 만남, 그리고 만물의 펼쳐짐으로 읽을 수 있다.
여기에는 나뉘지 않은 하나에서 다양한 사물로 펼쳐지는 순서가 있다. 도는 그저 그 자리에만 있지 않고 낳는다. 다음으로, 또 다음으로 시선이 움직인다.
이 글이 상상하는 장자에게 옆에서 질문하게 한다면 이런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낳는다’고 하는 순간 이미 선을 하나 그은 것은 아닌가. 이쪽에는 도, 저쪽에는 하나, 그다음에는 무엇이 먼저인가 하는 구분. 이름마다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 전으로 한 발 물러설 수는 없는가. 장자가 남긴 실제 말이 아니라 그의 우화를 빌려 던지는 질문이다.
마흔두 번째 장은 생겨남을 따라간다. 나비의 꿈은 시선을 왕복시킨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두 글을 함께 놓으면 방향이 하나만 남지는 않는다.
노자는 경계 위에서 말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름으로 전부를 붙잡을 수 없다고 알리면서, 그래도 도는 하나를 낳는다고 쓴다. 언어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책 전체를 백지로 두지는 않는다.
혼돈과 나비는 이름이 굳기 전으로 눈을 돌린다. 생겨남의 구절은 사물들이 펼쳐지는 쪽으로 눈을 향하게 한다. 독자는 어느 하나를 지울 필요가 없다. 한 발은 말의 한계를 알린다. 다른 한 발은 여전히 말하려 한다.
그래서 관문을 나서는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떠남이 마침표처럼 보이는 것이다. 말은 남았다. 말한 사람은 더 이상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사라진다.
9. 일곱 사람
이 연작의 일곱 사람을 불러 상상 속에서 각자의 자리에 세워 보자. 역사 속의 모임이 아니다. 일곱 자세를 나란히 바라보는 장면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거듭하여 빈터를 연다. 도시의 사형 선고 앞에서 도망하지 않고 독배를 마신다. 공자는 인을 묻고 이해할 사람을 다시 기다린다. 자신을 아는 것은 하늘인가. 니체는 망치질을 계속하다가 병으로 글쓰기를 멈추게 된다. 병은 철학이 치러야 할 값이 아니다.
칸트는 경계를 그은 뒤에도 짓기를 계속하여 쾨니히스베르크에 오랜 작업을 남긴다. 왕양명은 질문을 안쪽으로 돌린다. 용장의 전기에 나오는 돌관, 그 뒤의 실제 전장, 마지막 뱃길에서 말한 ‘이 마음은 밝다’. 장자는 이 글의 물속에 남아 물고기들과 함께 있다.
노자는 전부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떠난다.
물자체와 도, 혼돈과 빈터, 인과 양지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이 개념들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려는 것은, 쉽게 소유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사람이 취하는 자세다.
소크라테스는 남는다. 공자는 기다린다. 니체는 계속 두드린다. 칸트는 남아 짓는다. 왕양명은 자신의 길을 살아 낸다. 장자는 나누기 이전으로 돌아간다. 노자는 말을 마치고 화면 밖으로 걸어 나간다.
일곱 자세 가운데 관문을 떠나는 노자가 가장 가볍다. 여기에는 독배가 없다. 병의 침묵도, 전장도, 세 비판서의 촘촘함도 없다. 이야기에 남는 것은 두 동작이다. 오천여 자를 남긴다. 떠난다.
그 가벼움이 오히려 이야기의 무게가 된다. 경계에 닿았다고 해서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유는 죽음이나 병이나 전쟁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말을 남기고 길을 내줄 수도 있다.
말한다. 그리고 간다. 오천 자. 푸른 소 한 마리. 어디에서 끝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이야기의 가장 가볍고도 철저한 몸짓이다. 한 사람이 관문지기에게 책을 건네고 계속 걸어간다. 역사 속 『노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는 아직 많은 질문이 남는다. 한 사람이 관문에서 단번에 썼다거나 그 뒤에 전승과 편집이 전혀 없었다고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장면에는 저자가 남아 모든 해석을 관리할 의자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지금 읽는 책은 대개 도경과 덕경, 여든한 장으로 나뉜다. 초기 사본들의 순서와 구획은 모두 같지 않다. 후대에 주석이 겹겹이 쌓이고 도교 전통이 자라며 도관이 세워졌다. 노자는 공경받는 이름이 되었다. 떠나던 사람이 새로운 질서 안에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그 관문의 이야기 속에 노자는 없다. 그는 이미 떠났다.
읽기 안내와 출처
공자와 윤희가 나오는 장면은 『사기』에 전하는 이야기로 다룬다. 검증된 대화의 속기록으로 보지 않는다. 푸른 소는 후대 전승의 이미지다. 고전 구절은 직접 옮기거나 풀어 썼다.
곽점 죽간의 다른 글자만으로 있음과 없음의 관계가 확정되지는 않는다. 전승과 성립의 불확실성을 남기며, 현재의 장 구분을 초기 사본에 그대로 소급하지 않는다.
칸트·장자와의 비교, 상상 속 장자에게 맡긴 질문, 마지막 일곱 사람의 배치는 이 산문의 해석과 문학적 장치다. 서로 다른 사상의 동일성이나 역사적 만남을 주장하지 않는다.
司馬遷《史記》卷六十三〈老子韓非列傳〉 · 《道德經》(王弼本),第一、二、十一、四十、四十二章 · 周大興〈有邪?無邪?——王弼對《老子》之道的詮釋〉,《中國文哲研究集刊》29,2006,頁165–167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Laozi, biography and textual traditions · Steve Naragon, Kant in the Classroom — The Hofmeister, early biographical testimony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