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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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 / 108 · 진리의 경계 긋기

하이젠베르크, 불확정

물리학의 한계를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에게도 자기 선택에 답해줄 공식은 없었다. 코펜하겐과 팜홀, 그리고 자신의 설명으로 목소리를 대신할 수 없는 맞은편의 사람.

1. 밖으로 나가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1941년 9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를 찾아갔다. 덴마크는 독일에 점령되어 있었다. 손님은 서른아홉 살, 주인은 쉰다섯 살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일하고 논쟁하며 물리학을 낯선 곳까지 밀고 나간 사이였다. 이번에는 역사 속에서 서로가 서 있는 자리가 낯설었다.

후대의 설명은 흔히 이 대화를 산책 중에 이루어진 일로 전한다. 집 밖으로 나가 누군가의 귀를 피하면 예전처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점령은 문 안에 두고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점령국에서 왔고, 다른 사람은 점령당한 나라에 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무기를 과학자들끼리 논의하고 개발을 피할 길이 있는지 알아보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증언은 중요하다. 자신의 방문 목적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알려준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확인한 대화록과 같은 것은 아니다.

보어가 기억한 압박은 달랐다. 보내지 않은 편지 초안에서 그는 두 사람이 도덕적 뜻을 같이했다는 설명에 이의를 제기했다.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는 말을 들었으며, 독일 과학자들이 원자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썼다. 대화의 장소와 표현까지도 하나의 장면으로 빈틈없이 이어지지 않는다.

초안들은 2002년에 공개되었다. 종이가 그날의 녹음을 돌려준 것은 아니지만, 살펴볼 자료는 늘어났다. 증언이 다르다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드는 인물 한쪽을 고른 뒤 그의 기억에 다른 모든 증거를 판정할 권한을 줄 수도 없다.

이 글은 여기서 시작한다. 어떤 물리적 한계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표현한 사람이 자기 선택 앞에서는 그만큼 명료한 공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대화의 맞은편에도 진지하게 자기 말을 들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2. 현미경 안에 들어 있는 질문

1925년으로 돌아가 보자.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안의 전자를 보이지 않는 행성처럼 궤도를 도는 것으로 그리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관측할 수 있는 스펙트럼의 양들 사이에서 관계를 찾았다. 헬골란트섬에 잠시 머문 일도 이 과정에 속한다. 어느 기적 같은 하룻밤에 홀로 끝낸 발견은 아니었다.

막스 보른은 수를 배열한 표에서 행렬 계산과의 연관을 알아보았다.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수학적 형식을 발전시켰고, 이후 세 사람이 행렬역학을 함께 확장했다. 익숙한 그림을 버린 까닭은 그림이 유행에 뒤처져서가 아니었다. 연구 대상이 그 그림의 요구대로 답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7년 코펜하겐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위치와 운동량을 함께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감마선 현미경을 상상했다. 전자의 위치를 더 세밀하게 보려면 파장이 짧은 빛이 필요하다. 그런데 빛과 전자의 상호작용이 관측 과정 자체에 운동량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이 사고실험은 문제를 선명하게 보여주지만 증명 전체는 아니다. 익숙한 식 ΔxΔp ≥ ℏ/2는 같은 양자상태에서 위치와 운동량 분포의 표준편차를 말한다. 한 분포를 아주 좁게 만들면 다른 분포도 동시에 원하는 만큼 좁게 만들 수는 없다.

똑같은 방식으로 준비한 계를 많이 떠올려 보자. 한 묶음에서는 위치를, 다른 묶음에서는 운동량을 측정한다. 결과는 각각 퍼져 나온다. 손을 떨지 말라고 실험자를 나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 비싼 기계를 사면 두 분포를 모두 한 점으로 모을 수 있다는 약속도 아니다.

하이젠베르크가 1927년에 문제를 열었고, 같은 해 케너드가 위치와 운동량의 엄밀한 부등식을 제시했다. 로버트슨은 1929년에 이를 일반화했다. 발견에도 이어달리기가 있다. 다른 사람이 확인하고 다듬고 보충하면서 우리가 물려받는 지식의 모양이 갖추어진다.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상은 1933년에 수여되었다. 아직 젊었다. 자연을 설명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드문 능력이다. 그렇다고 그 능력에 역사의 모든 갈림길에서도 똑같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보증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3. 관측은 마법의 시선이 아니다

현미경이라고 하면 우선 들여다보는 사람이 떠오른다. 하지만 물리적 측정에는 장치의 배치와 상호작용, 기록이 필요하다. 빛이 어디로 가고 검출기가 어떤 신호를 남기는지는 구체적인 과정이다. 여기서 관측자는 우주를 응시하여 존재하게 만드는 정신을 뜻하지 않는다.

아무도 화면을 보고 있지 않아도 장치는 작동하고 기록은 나중에 읽을 수 있다. 양자론은 인간의 의식이 바라는 대로 세계가 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측정을 소망의 힘으로 설명하면 오히려 측정이 흥미로운 진짜 이유를 가려버린다.

교란과 통계적 퍼짐도 구별해야 한다. 측정 장치가 계를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표준편차의 부등식은 첫 번째 측정이 두 번째 측정을 망가뜨린다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같은 방식으로 준비한 서로 다른 계를 각각 측정할 때도 분포에는 그 제약이 적용된다.

사소하게 들리는 구별이 문제의 모양을 지켜준다. 구별하지 않으면 빛을 더 부드럽게 비추거나 실험자가 마음을 가라앉히면 한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이론은 관찰하면 언제나 대상이 변한다는 격언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말한다.

정확성은 연구하는 습관도 바꾼다. 전자가 어디 있느냐고만 물어서는 안 된다. 계를 어떻게 준비했고 어떤 양을 측정하며 기록을 어떻게 읽는지 밝혀야 한다. 간단해 보이는 질문에, 대상까지 도달하는 경로를 설명하라는 요구가 더해진다.

여기서 신중함을 배울 수는 있다. 그렇다고 삶에 대한 모든 판단을 물리학으로 보증할 필요는 없다. 양자상태에는 계산할 수 있는 제약이 있다. 편지 한 통이 왜 발송되지 않았는지 이해하려면 그 편지와 주변 사정을 읽어야 한다. 둘은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다.

4. 주사위가 논쟁을 끝내주지는 않는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보른의 연구는 흔히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다. 불확정성 관계와 상보성, 확률 해석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세 사람이 완전히 일치된 선언문에 서명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 사이에도 차이와 논쟁이 있었다.

입자마다 정해진 경로가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새 이론은 불편하다. 어떤 결과가 나올 확률은 놀랍게 예측하지만, 톱니바퀴 하나가 다음 것을 밀어 움직이는 모습을 다 볼 수 있는 작은 시계 그림은 주지 않는다. 계산이 맞는다고 잃어버린 그림까지 돌아오지는 않았다.

아인슈타인도 여기서 멈춰 섰다. 그가 묻던 것은 단지 우연이 싫다는 취향 문제가 아니었다. 이론이 완전한지, 멀리 떨어진 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가능한지를 물었다. 보어와의 논쟁은 고집 센 노인이 마침내 설득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질문을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뒤에 나온 벨 부등식과 실험은 국소성 등 특정한 가정을 만족하는 숨은 변수 이론에 강한 제약을 주었다. 그 힘은 구체성에 있다. 어떤 가정들을 함께 받아들이면 상관관계에 한계가 생기는데, 실험 결과는 그 한계를 위반한다. 무엇이 시험되고 있는지가 분명하다.

그렇다고 유일한 해석이 선택되거나 가능한 모든 숨은 변수 이론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한 예측, 쓸 수 있는 수학적 형식, 세계의 최종 모습을 설명하는 일은 한꺼번에 발급되는 세 장의 증명서가 아니다. 풀리지 않은 질문이 있다고 검증된 결과마저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모른다고 외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동료들과 계산하고 시험하고 표현을 고치며 작동하는 이론을 만들었다. 옛 그림이 통하지 않을 때에도 연구는 계속되었다. 익숙한 그림을 떠나는 일과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하는 일은 다르다.

5. 남아 있던 사람

1941년의 방문자로 돌아오자. 그는 이제 보어가 알던 젊은 동료만이 아니었다. 독일 우라늄 연구의 주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사적으로 자기 역할을 어떻게 이해했든 그 연구는 나치 통치 아래의 기관과 자원, 군사적 관심에 실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독일에 남았다. 유대인 동료들은 쫓겨나고 박해받았다. 유대인이 아닌 과학자들 가운데도 떠난 사람이 있었다. 하이젠베르크 자신 역시 현대 물리학을 낙인찍는 독일 물리학 운동의 공격을 받았다. 아무 압력도 없는 곳에서 마음대로 삶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았다.

독일 과학을 지키고 연구를 유지하며 다음 세대를 보호한다는 이유는 그가 나중에 자신의 잔류를 설명할 때 중요하게 등장했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면서도 통치자의 이념 전부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더 어려운 질문은 남은 뒤 무엇을 위해 일했느냐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나라와 정권을 나누어 생각해도 연구가 정권의 자원에서 저절로 떨어져 나가지는 않는다. 불씨를 보존한다고 믿는다고 해서 권력이 그 불을 우리의 뜻대로만 쓰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의 자기 이해는 들을 만한 설명이지만, 유일한 심판자가 될 수는 없다.

독일은 원자폭탄을 만들지 못했다. 그 결과만으로 과학자들의 도덕적 저항이 성공했다고 증명되지는 않는다. 자원과 조직, 기술적 판단과 우선순위를 살펴야 한다. 반대로 핵 연구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모든 사적인 말 뒤에 최악의 동기를 지어넣을 권한을 주는 것도 아니다.

복잡한 사람이라는 말은 면책장이 아니다. 그의 소망이 어떻게 섞여 있었는지 전부 모르더라도 어떤 일을 맡았는지는 알 수 있다. 공정한 판단은 가장 큰 이름표를 붙이는 일이 아닐 수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선의가 확인할 수 있는 행동을 덮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6. 라디오가 소식을 전했을 때

1945년 여름, 독일 과학자 열 명이 영국 팜홀에 억류되어 있었다. 연합군은 그들의 대화를 몰래 녹음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세계는 이미 한 문턱을 넘었지만 집 안 사람들의 첫 반응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이젠베르크도 처음에는 의심했다. 동료들과 미국이 정말 그 엄청난 일을 해냈는지 논의하고 방법을 추측하며 자신들의 이전 판단을 다시 따졌다. 기록에 남은 머뭇거림과 반박과 모순은 훗날 매끈하게 정돈되기 쉬운 역사에 거친 표면을 돌려준다.

8월 14일 그는 처음 반응과는 다른 기술적 이해를 보여주는 설명을 했다. 이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간단하지 않게 된다. 다만 급하게 나눈 대화 일부로 전쟁 중의 모든 계산과 의도에 최종 판정을 내릴 수도 없다.

실패를 어떻게 설명할지를 두고 나온 이견도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해내지 못한 일을 원칙상 하고 싶지 않았던 일로 바꾸어 말하려 했고, 다른 사람은 반대했다. 모두가 비밀스러운 도덕적 합의를 지켜온 모습이 아니다. 자기들의 역사를 어떻게 말할지 이미 다투고 있는 모습이다.

도청 기록은 영혼까지 곧바로 통하는 관이 아니다. 억류 환경과 동료의 시선, 미래에 대한 불안은 말에 스며든다. 그래서 보고서와 편지, 연구 기록과 서로 대조해야 한다.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증거를 탁자에서 치워버려서는 안 된다.

그들의 논쟁 뒤로 사라져서는 안 되는 장소가 있다. 히로시마다. 억류된 물리학자들에게 그 소식은 충격이자 전문적 판단의 붕괴, 불확실한 앞날이었다. 도시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몸과 가족과 일상이 파괴된 일이었다. 피해자들은 과학자의 도덕적 전기를 꾸미는 배경이 아니다.

많이 안다고 먼 곳의 사람을 더 잘 듣는 것은 아니다. 팜홀은 누가 계산을 맞혔는지뿐 아니라 다른 질문을 남긴다. 중요한 숫자를 알아보는 사람이 어떻게 그 숫자 속에서 남의 삶을 들을 수 있는가. 자기 일의 성패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삶을 말이다.

7. 대화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

젊었을 때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논쟁에서는 새로운 물리학이 자라났다. 다른 의견은 관계가 깨졌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서로를 진지하게 답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생각을 상대에게 건네도 되는, 드문 작업 조건이었다.

점령된 코펜하겐에서는 그 조건을 그대로 가져올 수 없었다. 보어에게는 자기 두려움을 밀어놓고 독일 핵 연구에 참여한 친구의 가장 선한 의도를 먼저 찾아낼 의무가 없었다. 방문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큼이나 듣는 사람이 걱정할 이유도 대화의 일부였다.

두 사람은 전쟁 뒤에도 연락했다. 1961년 보어는 생일 축하 전보를 보냈고 하이젠베르크가 답했다. 관계가 옛 우정과 영원한 침묵이라는 두 조각으로 잘린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연락을 이어갔다는 사실만으로 방문을 둘러싼 견해 차이가 해소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보어의 말년 초안에는 이견이 남아 있다. 썼지만 보내지 않은 말들이다.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는 읽을 수 있다. 발송하지 않았다고 완전히 용서했다거나 끝까지 원망했다고 대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침묵은 나중의 글쓴이가 마음대로 타인의 감정을 채워넣을 빈칸이 아니다.

자기를 설명할 때 우리는 서두르곤 한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부터 알아달라고. 그러나 상대는 그보다 먼저 자기의 당시 처지를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지 듣고 싶을 수 있다. 자기 의도만 이야기하면 상대에게 다시 한번 자기 이미지를 수리할 일을 떠맡기게 된다.

양자 법칙이 아니라 관계의 어려운 공부다. 이해받고 싶은 쪽이 혼자 화해가 완성되었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 상대는 듣거나 되묻거나, 모두가 마음 편해지는 결말을 제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대답은 여전히 상대의 몫이다.

8. 콰인이 가져오는 것은 면죄부가 아니다

콰인은 의미와 경험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물리량을 함께 기술하는 방식을 바꾸는 데 참여했다. 둘 다 익숙한 확신을 멈추게 한다. 다만 서로 다른 문제를 다루며 다른 증거 앞에서 답해야 한다. 비슷해 보인다고 그 거리를 지울 수는 없다.

하이젠베르크에게서는 특히 편리한 오독이 기다린다. 자연도 불확실하다면 역사에도 진실은 없고 도덕적 판단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양자론에서 나오는 결론이 아니다. 유명한 공식을 빌려 다른 종류의 어려운 일을 피하는 방식이다.

동기를 확정할 수 없는 이유는 자료가 부족하거나 증언이 충돌하거나 여러 바람이 함께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새 자료를 만나면 판단이 바뀔 수 있다. 이는 위치와 운동량의 수학적 관계와 다르다. 관점을 골라 잡으면 과거의 사실을 마음대로 다시 쓸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사람은 이름표 하나보다 크다. 그래도 그의 행동에는 방향이 있다. 복잡함을 보존하는 이유는 더 정확하게 판단하려는 것이지 모든 선택을 똑같이 미지근한 물에 담그려는 것이 아니다. 해를 입은 사람이 설명을 요구할 자격은 상대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사라지지 않는다.

콰인은 우리가 그린 인물 지도를 점검하도록 도울 수 있다. 어느 화살표가 증거에서 나왔고 어느 화살표가 호감에서 나왔는가. 점검이 끝나도 땅 위에는 사람들이 남는다. 개념 사이를 끝없이 오간다고 그들의 상처가 없어지거나 책임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는 않는다.

일반 독자에게 가장 가까운 질문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내가 일을 잘하고 있다고 믿을 때, 그 일이 무엇을 위해 쓰이는지도 여전히 보고 있는가. 전문성은 어떤 질문에 답할 힘을 키운다. 동시에 다른 질문을 더 능숙하게 피하는 기술을 키울 수도 있다.

9. 종이를 조금 내려놓고

하이젠베르크는 1976년 2월 1일 뮌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흔네 살이었다. 그의 과학은 실험실과 교실에, 전시 행적은 기록과 논쟁에 남았다. 이제 이 연작의 상상 속 다리로 그를 오게 해보자. 어느 유산도 도착 전에 지워놓을 필요는 없다.

공식이 적힌 종이를 든 채 앞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곳까지 다가온다. 종이 끝이 바람에 조금 흔들린다. 그는 대개 문제 하나를 꺼내며 대화를 시작하던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망설인다. 먼저 말하려는 사람에게도 먼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콰인이 자리를 내준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를 떠올리며 다리의 다른 입구를 바라본다. 자연에 대해 다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서로에 대해서도 끝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여기서는 그 대화를 위한 자리를 조금 더 남겨둘 수 있다.

보어가 온다면 하이젠베르크가 바라는 방식으로 오지 않아도 된다. 먼저 묻거나 잠시 멈추거나 준비된 설명을 거절할 수 있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만족스러운 결말을 만드는 데 협조하라고 재촉하는 상상이 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하이젠베르크 또한 고백 한마디나 변명 한 편으로만 남을 필요는 없다. 자기가 알았던 것과 두려워했던 것, 했던 일을 말할 수 있다. 다만 구별해서 말해야 한다. 어떤 결과를 두려워했다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보호하려 했다는 말이 실제로 보호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곁에서 노벨상을 들어 대신 대답하는 사람도 없고 그의 물리학을 책에서 지우는 사람도 없다. 업적이 책임을 대신 갚지 않으며, 책임이 업적을 없던 일로 만들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두 가지를 함께 탁자에 두는 일이 완벽한 영웅이나 순전한 악인을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종이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다. 그 종이는 인류가 하나의 한계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 앞에 선 사람은 풀어야 할 물리 문제가 아니다. 상대의 침묵과 질문과 거절을 공식에 넣어서 자기 마음에 드는 답을 계산해낼 수는 없다.

다리에는 아직 자리가 있고 대화는 계속될 수 있다. 누군가의 마음속 구석구석을 먼저 다 알아야 진지한 대답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전지전능함이 아니라,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이미 보이는 책임까지 내주지 않는 일이다.

읽기 안내와 출처

ΔxΔp ≥ ℏ/2는 같은 양자상태의 위치와 운동량 분포의 표준편차에 관한 관계이며, 모든 장치에 적용되는 측정 오차의 곱이 아니다. 하이젠베르크의 1927년 논의, 같은 해 케너드의 엄밀한 결과, 로버트슨의 1929년 일반화를 구별한다. 코펜하겐 해석에도 내부 차이가 있다. 벨 실험은 특정 가정을 따르는 이론에 제약을 주며 모든 숨은 변수 이론을 배제하거나 의식이 현실을 만든다고 증명하지 않는다.

1941년 대화에는 양측이 인정한 축어록이 없다. 2002년 공개된 보어의 초안은 회고 자료다. 전후에도 연락했으며 1961년 축하 전보와 답장이 있으므로 영구히 절교했다고 쓸 수 없다. 팜홀 기록은 다른 전시 자료와 대조해야 하며, 그 자체만으로 고의적인 폭탄 개발 방해나 모든 동기를 확정할 수 없다. 마지막 다리 장면은 역사적 증언이 아니라 문학적 상상이다.

닐스 보어 아카이브: 1941년 만남 관련 문서 · 닐스 보어 아카이브: 공개 문서 해설 · 팜홀 도청 기록: 1945년 8월 6~7일 · 미국물리학협회: 팜홀과 독일 원자력 연구 · 미국물리학협회: 양자역학의 형성 · 하이젠베르크의 1927년 논문: 미국물리학협회 전시 · 로버트슨: 불확정성 원리(1929) · Busch·Lahti·Werner: 측정 불확정성 관계 · 노벨상 공식 자료: 1933년에 수여된 1932년 물리학상 · 스웨덴 왕립과학원: 역설에서 부등식으로(2022)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