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 108 · 세계가 사람을 되빚을 때
갈릴레오,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
망원경과 철회의 말. 판결로 바꿀 수 없는 세계를 바라보되,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을 잊지 않기.
1. 그래도 움직인다
1633년 6월 22일,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예순아홉 살의 갈릴레오가 서약문을 읽었다. 이단의 강한 혐의가 있다는 판결을 받은 그는 지구가 움직이며 태양이 중심에 있다는 주장을 버려야 했다. 수십 년을 연구한 사람에게, 이제 무엇을 주장해서는 안 되는지 다른 사람들이 정해 주고 있었다.
그는 서명했다. 일어나면서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고 중얼거렸을까?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 장면을 뒷받침할 믿을 만한 동시대 기록은 없다. 후대는 이 이야기에 강렬한 마지막 말을 보태 주었다. 강요된 침묵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목소리가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노인에게 마지막까지 영웅다운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필요는 없다. 얼마나 두려웠는지, 무엇을 저울질했는지, 결과 하나를 안다고 해서 그의 내면까지 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전설은 중요한 차이를 붙잡는다. 서약은 한 사람이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바꾼다. 행성의 움직임은 바꾸지 못한다. 판결은 그의 목소리를 빼앗을 수 있어도 우주를 대신해 서명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가 입은 상처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지구는 그의 변호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사람에게는 지켜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봐야 한다.
2. 망원경
갈릴레오는 1564년 피사에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다 수학으로 옮겨 갔고, 피사와 파도바에서 가르쳤다. 1609년에는 이미 운동과 기구를 오랫동안 연구한 뒤였다. 새로운 기구는 그가 쌓아 온 경험과 질문을 만나게 되었다.
네덜란드에 먼 물체를 가깝게 보여 주는 장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만들고 개량했다. 선원은 그것으로 먼 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하늘을 보았다. 영국의 토머스 해리엇도 이미 망원경으로 달을 그린 적이 있었다. 갈릴레오의 특별함은 홀로 차지하는 ‘최초’보다 그다음에 있다. 꾸준히 관찰하고 기록하며, 더 많은 사람이 그 결과를 알게 했다는 점이다.
달의 그림자가 달라졌다. 그는 그 변화에서 산과 골짜기를 읽었다. 매끈하고 완전하며 지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천상의 그림에는, 울퉁불퉁한 달이 잘 들어맞지 않았다.
1610년 초에는 목성 곁의 밝은 점들을 여러 날 따라갔다. 위치 변화에는 질서가 있었다. 네 개의 위성이 목성 주위를 돌고 있었다. 하늘의 모든 움직임이 지구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해 금성의 온전한 위상 변화가 또 다른 문제를 던졌다. 전통적인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로는 밝은 부분과 겉보기 크기의 변화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금성이 태양을 돌면 설명이 나아졌다. 하지만 티코 브라헤의 체계에서도 금성은 태양을 돌고 지구는 정지해 있었다. 금성을 보았다는 것이 곧 지구의 움직임을 보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발견에는 이런 힘이 있다. 옛 그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나타나면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그러나 새 그림이 다 완성되었는지는 또 다른 질문이다. 계속 보아야 한다.
3. 무엇을 열었는가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하며 움직이는 지구를 새로운 우주의 배치에 넣었다. 계산을 편하게 해 주는 요령만은 아니었다. 천체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하려 했다. 물론 그 배치에도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갈릴레오는 논쟁에 새로운 현장감을 더했다. 오래된 책과 기하학 도형 사이만 오갈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다른 밤에 자기 망원경을 목성으로 향하게 해, 작은 빛들이 또 자리를 옮겼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직접 보라’가 모든 논쟁을 끝내는 주문은 아니다. 렌즈를 믿어도 되는가? 빛점이 기구가 만든 착시는 아닌가? 같은 현상에 여러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가? 관찰은 거듭 확인해야 하고 추론도 질문을 받아야 한다. 갈릴레오 자신도 조수로 지구의 운동을 증명하려다 잘못된 길을 갔다.
소크라테스는 안다고 여기는 말을 다시 묻게 했고, 마르크스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포장된 사회관계를 물었다. 갈릴레오는 하늘을 논하는 자리에 기구와 기록과 수학을 가져왔다. 이는 이 글에서 그어 보는 연결이지, 세 사람에게 저마다 틀릴 수 없는 도구를 쥐여 주는 말이 아니다.
남는 요구는 더 소박하다. 세계가 내놓은 것이 자신의 설명에 맞지 않을 때, 세계에 입을 다물라고 명령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 요구는 갈릴레오 자신의 설명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4. 누가 하늘을 해석하는가
논쟁은 어째서 재판이 되었을까? ‘교회가 과학을 두려워했다’고 말하면 쉽지만 너무 쉽다. 갈릴레오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다. 교회 안에도 진지하게 하늘을 관찰하고 그의 발견 일부를 확인해 준 이들이 있었다. 신앙과 관찰은 두 진영으로 깔끔하게 나뉘지 않았다.
첨예한 문제 하나는 누가 성서를 해석할 권한을 갖는가였다. 특정 구절을 지구가 정지해 있다는 보증으로 읽으면, 천문학은 천문학에만 머물 수 없다. 갈릴레오는 자연의 문제에서는 감각적 경험과 논증을 들어야 하며, 성서의 일상적인 표현을 곧바로 천체 운행의 설명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주장은 해석 권한을 건드렸다. 당시의 종교 갈등과 정치적 압력, 복종의 요구도 얽혔다. 1616년에는 이미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어디까지 말할 수 있었는지, 그 제한을 어겼는지가 재판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지구가 중심에서 벗어난다고 사람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저절로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위험은 제도가 자신의 해석을 바꿀 수 없는 질서와 동일시할 때 생긴다. 사실 하나를 더하는 말이 복종을 거부하는 말로 들리게 된다.
진시황의 서적 통제와 비교하면 권력이 공개적으로 유통될 것을 정한다는 제한적인 닮음은 있다. 하지만 서로 먼 역사를 하나의 원인으로 눌러 담을 수는 없다. 여기서 묻는 것은 토론이 언제 복종 시험으로 바뀌는가다. 틀린 답의 대가가 계산을 다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유를 잃는 일이 되는 순간이다.
5. 그는 무릎을 꿇었다
1632년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가 출판되었다. 세 인물이 두 체계를 놓고 논쟁하며, 작가가 어느 쪽에 마음을 두는지는 어렵지 않게 읽힌다. 전통적인 입장을 옹호하는 심플리치오의 이름은 고대 주석가에게서 왔지만, 어리석음을 연상시키는 울림도 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한때 갈릴레오를 지지했으나 관계가 나빠졌다. 교황이 중요하게 여기는 논점을 심플리치오의 입에 넣은 일은 갈등을 더 날카롭게 했다. 그렇다고 재판 전체를 조롱당한 통치자의 분노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이전의 금지 명령과 출판 허가, 권위의 문제도 걸려 있었다.
1633년 갈릴레오는 심문을 받았고 고문하겠다는 위협도 받았다. 결국 철회문을 읽고 남은 생을 가택연금 상태로 살았다. 그가 한 행동은 안다. 그것만으로 그가 자기 자신까지 포기했다고 판정할 권한까지 우리에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와의 비교가 떠오른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았다. 치욕을 견딘 뒤에도 글을 쓴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도 생각난다. 이런 비교는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억압받는 이에게 죽어서 정직함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시험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갈릴레오는 뒤에 운동과 재료의 강도를 다룬 『두 새로운 과학』을 완성해 출판했다. 하지만 그 책이 없었더라도 그는 살아갈 자격이 있었다. 훗날의 성과는 목숨을 보전한 대가로 내야 하는 몸값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사유 역시 처형되어야만 유효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구의 운동은 그가 말을 철회했는지에 달려 있지 않았다. 사람의 존엄도 위협 앞에서 후대가 좋아할 자세를 보여 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
6. 방법을 이어받을 손
이 연작은 거대한 답이 더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게 된 뒤에도 그 질문 방식이 도움이 되는지 묻는다. 뉴턴 역학에는 적용 범위가 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나 마르크스의 사회관계 분석도 다시 사용하고 논쟁하고 수정할 수 있다. 유산이란 통째로 받아들일 체계 아니면 버릴 기념물만은 아니다.
갈릴레오가 남긴 것도 단순히 보라는 말 이상이었다. 측정과 수학, 실험의 구성과 논증을 연결해, 자연에 관한 주장이 확인 가능한 결과를 책임지게 했다. 모든 과학적 방법을 혼자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뒤이은 많은 작업의 출발점을 바꾸었다.
그 실천은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설 수 있다. 그렇다고 저절로 살아남지는 않는다. 책을 인쇄하고 기록을 보존하고 기구를 만들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젊은 사람에게는 배울 장소가 필요하다. 권력은 금성의 위상을 바꾸지 못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 기회는 오랫동안 막을 수 있다.
1638년 초에는 갈릴레오가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편지와 방문자, 조수들이 말년의 작업을 도왔다. 그는 고장 나면서도 성과를 뱉어 내는 기계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돌봄을 필요로 하며, 한 문장을 끝까지 말하도록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방법은 살고 사람은 부서졌다’로 끝낼 수 없다. 지식이 전해졌음을 기뻐하면서 그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을 소모품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연구를 계속하게 하는 일과 연구하는 사람이 파괴되지 않게 하는 일은 같은 책임에 속한다.
7. 그와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나온 1543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그는 오래도록 교회 조직 안에서 일했고 책을 교황에게 바쳤으며, 출간 초기에는 훗날과 같은 공식 금지 조치를 겪지 않았다. 빨리 죽어서 교회가 재판할 시간이 없었다는 식으로 그의 삶을 쓸 수는 없다.
천문학 이론을 계산상의 가설로 소개하는 익명 서문은 안드레아스 오지안더가 덧붙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마련한 영리한 퇴로가 아니었다. 서문의 실제 글쓴이를 확인하면, 책이 저자의 의도와 다른 독법을 곁들인 채 독자에게 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코페르니쿠스는 새 배치를 제시했고, 갈릴레오는 중요한 관찰과 운동에 관한 논증을 보탰다. 그러나 한 사람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증명했다는 분업은 너무 단순하다. 티코와 케플러, 수많은 관찰자도 이 역사에 있다. 특히 케플러의 타원 궤도는 문제를 크게 바꾸었다.
1600년 로마에서 조르다노 브루노가 처형된 일은 이 시대의 또 다른 참사다. 그의 재판에는 여러 신학적 주장이 관련되어 있었다. 지동설을 증명해서 화형당한 사람이라는 간단한 사례로 쓸 수 없다. 폭력을 기억하는 데 역사를 작게 만들 필요는 없다.
옛 우주상이 물러난 과정은 한 영웅이 도화선에 불을 붙여 일으킨 단 한 번의 폭발이 아니었다. 모델과 증거, 새로운 난제가 여러 세대의 작업을 거치며 어떤 설명이 버틸 수 있는지를 바꾸었다. 그 뒤의 모든 사람을 대신해 생각을 끝낸 한 사람은 없었다.
8. 세계는 판결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는 말은 왜 여전히 마음을 건드릴까? 한 사람의 시련과 세계의 움직임을 같은 화면에 놓기 때문이다. 이쪽에서는 노인이 말을 바꾸어야 한다. 저쪽에서는 목성의 위성들이 자기 궤도를 돈다.
다윈이 태어나기 전에도 자연선택은 일어났다. 두보의 시에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그 안에 묘사된 굶주림과 이별은 시가 없어도 존재했다. 소크라테스가 처형되지 않았더라도 그의 질문은 의미가 있을 수 있었다. 사람과 세계의 관계는 희생이 필요한 나머지와 필요 없는 나머지라는 구분보다 풍부하다.
여기서 ‘나머지’는 기존 설명에 담기지 않고 명령으로도 지울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 산문의 표현 방식이지, 설명되지 않은 현상마다 철학적 증명이 하나씩 생겼다는 선언이 아니다. 칸트의 물자체도 망원경으로 보이는 천체와 곧바로 같다고 할 수 없다.
과학은 ‘내가 보았으니 영원히 옳다’가 아니다. 오히려 달갑지 않은 결과가 다시 문을 두드리도록 허락하는 일에 가깝다. 기록을 확인하고 모델을 고칠 수 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틀릴 수 있다. 세계가 우리의 자존심에 맞춰 줄 의무는 없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연설에서 갈릴레오 사건을 다루며 당시 신학적 해석의 오류를 인정하고 학문 영역의 경계를 돌아보았다. 뒤늦은 인정에도 의미는 있다. 하지만 그날 지구가 마침내 움직일 허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지구는 그 삼백오십구 년을 기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다렸다. 제약이 풀리기를, 책을 공개적으로 읽을 수 있기를, 질문하는 사람이 더는 질문 때문에 위험해지지 않기를 기다렸다.
9. 망원경은 하늘을 향한다
갈릴레오는 1642년 1월 8일 아르체트리에서 일흔일곱 살로 세상을 떠났다. 가택연금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통용되는 그레고리력으로 이듬해 1월 4일, 뉴턴이 태어났다. 당시 영국의 달력으로는 1642년 12월 25일이었다. 달력의 우연보다 중요한 것은 이후의 사람들이 앞선 작업을 읽고 이어 갔다는 사실이다.
뉴턴은 앞선 연구를 읽고 새로운 수학과 설명을 만들었다. 뒤이은 물리학은 고전역학의 한계와 만났다. 이는 미리 정해진 승자 명단이 아니라, 문제를 열린 채로 남겨 두는 사람들의 이어짐이다.
이제 이 연작이 상상하는 다리 어귀로 그를 데려오자. 늙어 눈은 보이지 않지만 손에는 망원경이 있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칼, 마르크스에게는 펜, 바흐에게는 악보가 있다. 갈릴레오가 가져온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한 번 더 보라고 권하는 방법이다.
이번에는 재판 이야기만 하려고 그를 둘러쌀 필요가 없다. 빠진 용감한 한마디를 채워 달라고 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 망원경을 받아 하늘로 향하게 한다. 다른 누군가는 말년의 생활을 묻고 노인이 천천히 답하는 말을 듣는다.
망원경은 위를 향하고, 돌봄은 사람 사이에 남는다. 세계는 인간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판단을 억지로 내주지 않아도 되는 자리가 필요하다. 두려워하고 물러서고 다친 뒤에도 여전히 한 사람으로 대우받아야 한다.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 뒤에 오는 사람들은 계속 볼 수 있다.
읽기 안내와 출처
마지막 다리 장면은 문학적 상상이며 유명한 말은 확인된 동시대 발언이 아니라 후대의 전승으로 다루었다. 역사 자료는 아래에 제시한다.
갈릴레오 박물관: 금성의 위상 · 갈릴레오 박물관: 생애 연표 · 라이스대학교: 토머스 해리엇 · 라이스대학교: 코페르니쿠스 체계 · 라이스대학교: 갈릴레오와 조수 · 요한 바오로 2세: 1992년 10월 31일 연설 · 옥스퍼드대학교: 뉴턴의 생애와 달력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