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N / 中文|繁體|日本語|Français|Deutsch|Español|한국어
← 위대한 삶들

048 / 108 · 진리의 경계 긋기

체호프, 모스크바로

차가 식고 마부는 아직 말하고 싶으며 총성 뒤에도 장부는 남는다. 삶을 대신 끝내지 않는 것은 무판단이 아니다. 물러섬은 타인에게 자리를 주는 일이기도 하다.

1. 아무 일도 없었을까

시골 저택에서 몇 사람이 차를 마신다. 누군가 말하고 다른 사람은 대답하지 않는다. 차가 식는다. 이제 가야겠다고 한 손님이 조금 더 앉아 있다.

어느 희곡의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다. 체호프를 읽을 때 알아볼 수 있는 공기다. 같은 방에 있어도 같은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한 사람은 날씨를 말하고, 한 사람은 사과를 기다리며, 또 한 사람은 마음속에서 이미 떠났다.

그래서 체호프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들 한다. 사실이 아니다. 자살과 결투, 총성과 화재, 소유권의 이동, 질병과 죽음이 있다. 다만 사건이 늘 무대 중앙을 차지하거나 모든 사람의 삶을 한꺼번에 마무리하지 않는다.

총성이 난 뒤에도 장부는 써야 한다. 저택이 팔린 뒤에도 그 안에 잊힌 사람이 있다. 다른 인물에게 결정적인 변화는 총성보다 이제 상대가 답하지 않으리라는 깨달음일 수 있다.

우리가 다른 곳을 보는 사이 시간과 기회, 말했더라면 아직 늦지 않았을 한 문장이 흘러간다. 전환점이라고 발표하지 않았다고 전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체호프는 삶에 사건이 없다고 증명하지 않는다. 사건 사이의 틈에도 무게를 준다. 우리는 큰일이 일어날 때뿐 아니라 차가 천천히 식을 때도 살아 있다.

2. 의사

안톤 체호프는 1860년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식료품점을 운영하다가 파산했다. 엄격한 아버지와 경제적 압박이 어린 시절과 청년기의 일부였다. 공부하면서 짧은 글을 써 집안 살림을 도왔다.

1884년 모스크바 대학에서 의학 과정을 마쳤다. 의사는 이력서의 장식이 아니었다. 환자를 보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으며 1892년 콜레라의 위협 속에서는 농촌 방역을 맡았다. 말년에는 병이 활동을 제한했으므로 임종까지 같은 강도로 진료했다고 할 수는 없다.

편지에서 의학과 문학을 아내와 정부에 빗대어 농담한 적이 있다. 의학이 문학에 버려진 옛 직업이라는 뜻은 아니다. 환자를 관찰하는 데 필요한 인내는 인물을 보는 시선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의사는 당연히 진단하고 약을 처방한다. 체호프는 처방하지 않는다는 말은 문학적 비유일 뿐이다. 사람에게 먼저 꼬리표를 붙이고 이야기 전체를 그 꼬리표의 증거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환자에게는 병명이 대신 말해 주지 못하는 문장이 남아 있을 수 있다.

1890년 그는 사할린으로 가서 유형과 강제노동 체제 아래의 삶을 조사했다. 인구와 생활 조건을 기록하고 뒤에 『사할린 섬』을 썼다. 사회를 폭로하거나 비판한 적이 없다는 주장은 이 작업만으로도 무너진다.

글에서는 물러설 수 있었고 현실에서는 다가갈 수 있었다. 절제와 행동은 반대가 아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진지하게 볼 수 있다.

3. 들어 줄 사람이 있을까

1886년의 「슬픔」에서 마부 이오나는 아들을 잃었다. 그래도 마차를 몰아야 한다. 승객에게 말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바쁘고 불평하고 자기 이야기를 한다. 문장이 시작되자마자 밀려난다.

마지막에는 작은 암말 곁으로 가서 아들 이야기를 한다. 말은 씹고 그의 손에 숨을 내쉰다. 인생의 철학을 가르치지 않고 사람처럼 답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또 한 번 그의 말을 끊지는 않는다.

윤리적 판단이 없는 장면이 아니다. 거듭되는 중단 끝에 우리는 듣는 이의 부재를 느낀다. 사회가 차갑다는 말로만 정리하면 이오나를 또 하나의 요약 안에 서둘러 넣는 셈이다. 먼저 끝까지 듣는 쪽이 이 작품에 가까울 수 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다른 가벼움에서 시작한다. 구로프는 얄타에서 안나를 만나며 여자와 여행지의 연애를 보는 낡은 습관을 가져온다. 그러나 관계는 그의 분류대로 끝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도 그리움이 끝나지 않는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진짜 애착과 함께 결혼, 거짓말, 아직 바꾸는 법을 모르는 삶을 마주한다. 작품은 불륜을 곧장 구원으로 봉인하지도, 벌을 내려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는다.

더 어려운 일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삶에는 영원히 결말이 없다는 법칙이 아니다. 작가가 인물의 미래를 대신 끝까지 쓰지 않기로 한 선택이다. 독자가 페이지를 떠나도 그들의 난점은 남는다.

4. 네 가지 계속됨

『갈매기』의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초연은 실패했고,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공연은 새 생명을 주었다. 한 연출가가 작가를 혼자 구해 낸 기적은 아니다. 스타니슬랍스키, 네미로비치단첸코와 배우들의 작업이 함께 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예술적 야심, 무대 밖 트레플레프의 자살이 있다. 돌아온 니나는 여전히 배우의 일을 말한다. 한 죽음이 다른 모두의 욕망과 수치, 노동에 같은 마침표를 찍지는 않는다.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는 교수에게 두 발을 쏘고 두 번 다 빗맞힌다. 폭발해도 자기 일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일과 장부로 돌아온다. 언젠가 쉬리라는 소냐의 위로는 그를 받쳐 주면서 현재를 버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도 들려준다.

『세 자매』는 삼 막이 아니라 사 막이다. 모스크바를 그리워한다고 모두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일하고 사랑하며 집안 권력이 달라지고 화재가 나며 투젠바흐는 결투로 죽는다. 막이 내릴 때까지 모스크바에 못 갔다는 말은 그들의 평생을 다 썼다는 뜻이 아니다.

『벚꽃 동산』에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로파힌은 별장 부지로 임대하자는 계획을 내놓고 뒤에 영지를 산다. 기회를 잡는 이, 미루는 이, 바꿀 힘이 없는 이가 있다. 집이 비고 피르스는 안에 잊힌 채 남으며 멀리서 도끼 소리가 난다.

네 작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야기의 반복이 아니다. 행동과 지연과 결과가 어긋난다. 한 사람의 해결이 다른 사람의 문제를 시작한다. 막은 공연을 끝내지 모든 삶을 끝내지는 않는다.

5. 절제에도 날이 있다

체호프는 깎아내지 않는다고 하면 독서의 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눈앞에서 망치를 휘두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아무것도 드러내거나 비판하지 않고 판단을 바꾸지도 않는다는 뜻이라면 글의 힘을 지나치게 작게 보는 것이다.

「슬픔」은 듣는 이 없는 호소를 구체적으로 만들기에 바쁘다는 대답을 완전히 무고한 말로 여기기 어렵게 한다. 날카로움은 있다. 그것을 화자에게 맡겨 독자 대신 소리치게 하지 않을 뿐이다.

「6호 병동」은 제도의 잔혹함과 방관자가 자신을 위로하는 추상론에 더 직접 다가간다. 사할린 조사 역시 제도를 몸의 경험까지 따라간다. 우아하게 차 마시는 사람만 구경하는 작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작업이다.

폭로가 단순한 배역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은 악, 저 사람은 진리라는 배치가 아니다. 영리한 사람도 회피하고 고통받는 사람도 그 이유만으로 모든 답을 갖지는 않는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도 도덕 처방전보다 복잡하다. 두 사람을 훈계자로 줄여야 체호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인물들도 논지를 넘어설 수 있다.

체호프는 자주 세부를 통해 독자의 판단을 천천히 바꾼다. 대화에 끼지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배경이 아니게 된다. 그를 듣기 시작하면 방에 들어왔을 때와 완전히 같은 독자는 아니다.

6. 질문을 어디에 둘까

1888년 10월 27일 편지에서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올바르게 제기하는 일을 구별했다. 뒤의 일은 예술가가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다. 누가 먼저 말하고 누가 계속 들리지 않으며 이야기를 어디서 멈출지 모두 선택해야 한다. 삶이 스스로 단편으로 편집되지는 않는다. 무대의 침묵도 종이를 비워 둔다고 효과가 생기지는 않는다.

구성하지 않는다는 말이 모든 인생을 관리할 체계를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절제를 설명한다. 형식이나 방법이 없다는 뜻이라면 틀린다. 열린 결말에는 쓰이지 않은 미래가 독자의 마음에 남도록 하는 정밀한 구성이 필요하다.

독자 대신 모든 판결을 내리지 않는 것도 피해는 중요하지 않다거나 어떤 해석이든 같다는 뜻이 아니다. 교수의 허영, 바냐의 원망, 소냐의 노동은 판단의 재료다. 다만 판결문 하나로 그 재료가 소진되지는 않는다.

모스크바는 기억과 희망일 수 있고 지금 있는 곳에서 살기를 미루는 핑계일 수도 있다. 인물마다 그 이름과 맺는 관계가 다르다. 공인된 뜻 하나만 지정하면 오히려 작아진다.

독자에게 일을 남기고 일할 재료도 충분히 준다. 아무렇게나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이 여기 있으니 가장 빠른 답만 챙겨서 떠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7. 지하실과 거실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실, 체호프는 거실이라는 비교는 제한적으로 유용하다. 전자는 범죄와 심문, 고백의 압력 속에 사상을 놓는 경우가 많다. 후자는 스치는 말, 회피, 평범한 오후로 문을 여는 경우가 많다.

라스콜니코프의 도끼는 놓치기 어렵다. 찻상 옆에서 멎은 문장은 지나치기 쉽다. 체호프는 놓친 것에 목소리를 준다. 작기 때문이 아니라 작은 일로 취급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방들이 밀봉되어 있지는 않다. 도스토옙스키도 일상과 다정함과 희극을 쓰고 체호프도 폭력과 정신적 괴로움, 제도의 학대를 쓴다. 무게중심을 말하는 것이지 작가가 넘어가면 안 되는 영토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두 작가 모두 삶이 이미 끝낸 행동만은 아님을 보여 줄 수 있다. 후회와 인정하지 않은 욕망, 다른 사람 앞에서 끝내 꺼내지 못한 말도 삶에 속한다.

누가 더 깊은지 판정할 필요는 없다. 폭풍 속에서야 자기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고 조용한 방에서 처음 듣는 사람이 있다. 입구가 다르다고 도착한 자리까지 정확히 같다고 선포할 필요도 없다.

체호프에게서는 불편한 가까움이 남는다. 대부분의 독자는 도끼를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잃은 마부에게 빨리 가라고 하는 승객에서는 쉽게 자신을 발견한다. 이번에는 이야기 밖의 안전한 자리에 서기가 더 어렵다.

8. 입 밖에 나오지 않은 질문

소크라테스는 물음을 통해 자신만만한 정의에 금을 낸다. 체호프는 질문을 직접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장면에 놓고 그 경험이 서서히 질문이 되게 한다.

능동과 수동의 단순한 차이는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묻는 방식도 체호프가 침묵을 배치하는 방식도 방법과 선택을 필요로 한다. 삶을 독자 앞에 놓는 일 자체가 어렵다.

문답에서는 방금 내놓은 답이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수 있다. 체호프의 이야기에서는 이동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사람이 아들의 죽음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될 수 있다.

한쪽은 개념을 다시 심사에 부치고 다른 쪽은 주의를 새로 나누는 경우가 많다. 둘 다 닫힌 판단을 열 수 있지만 같은 작업은 아니다. 모든 독자가 더 나아진다고 보증하지도 않는다.

작가가 물러서면 판단을 전부 대신 해 주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사람을 어떻게 들을지 독자가 결정해야 한다. 늘 말을 끊던 곁의 사람을 다르게 듣기 시작할 수도 있다.

열려 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한 사람을 완전히 요약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 알겠어’가 곧바로 떠나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어서는 안 된다.

9. 모스크바로

1904년 7월 15일 체호프는 독일 바덴바일러에서 마흔네 살로 세상을 떠났다. 폐결핵을 앓았고 여러 해 전부터 피를 토했다. 의사였다는 이유만으로 진료 중 감염된 직업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내 올가 크니페르는 마지막 밤의 유명한 기억을 남겼다. 그는 의사에게 독일어로 죽어 간다고 말하고 샴페인을 마신 뒤 숨을 거두었다. 기억된 장면이지 호흡 하나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영상은 아니다.

시신이 러시아로 돌아갈 때 굴 운송용이라고 표시된 냉장 화차에 실렸다는 일도 회고를 통해 전해진다. 엄숙함과 일상적인 것의 충돌은 그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본인이 그 죽음과 운송을 꼭 알맞다고 여겼으리라 단정할 수는 없다.

자매들은 극 안에서 모스크바에 도착하지 못하고 작가의 몸은 그곳으로 돌아간다. 이 대비는 우리를 멈추게 할 수 있다. 운명이 소설에 붙여 준 재치 있는 결말은 아니다. 문학에 잘 어울린다고 죽음의 손실이 작아지지는 않는다.

상상의 다리로 돌아가 보자. 체호프가 난간에 기대 조금 기침한다. 흄의 백개먼이 곁에 있고 튜링의 종이에는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 역사적 장면이 아니며 모든 사람을 꿰뚫는 전지적인 체호프도 여기에는 없다.

한동안 바라본다. 누군가는 대화를 마치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직 말할 틈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몸을 조금 비켜 줄 뿐이다. 설 자리를 내어 주고 문장이 나올 시간을 조금 남긴다.

모든 상실에 괜찮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일은 중요하고 어떤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잃은 것이 더는 셈에 들지 않을 때까지 위로하는 일이 아니다.

모스크바로.

아직 가지 못했다. 그러니 조금 더 들어 보자. 여기서부터 당신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읽기 안내와 출처

원작에서 『세 자매』는 사 막이며 바냐는 두 번 쏜다. 열린 결말은 인물의 전 생애를 예언하지 않는다. 1888년 10월 27일 편지의 문제 제기와 해결의 구분은 방법이나 입장, 사회 행동의 부정이 아니다.

임종의 샴페인과 시신 운송은 회고의 전승으로 다루며 날짜와 작품 내용과 구별했다. 의사였다는 사실만으로 감염 경로를 확정할 수 없다. 찻상은 독서 인상을 모은 장면이고 다리는 상상이다. 작가 비교는 무게중심의 비교이지 배타적 영역 구분이 아니다.

체호프 편지: 1888년과 콜레라 방역 서신 · 체호프: 「슬픔」 영어 번역 ·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영어 번역 · 체호프: 『바냐 아저씨』 사 막 · 체호프 희곡집: 『세 자매』와 『벚꽃 동산』 등 · 고리키·쿠프린·부닌: 체호프 회고 · 바덴바일러 문화유산: 마지막 샴페인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