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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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 108 · 하나의 세계 만들기

알렉산드로스, 네 세대의 파편

이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시작한다.

1. 네 세대

이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이 지식이라 믿던 것을 깎아 냈다. 자신의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확실하다고 여기는 답을 거듭된 질문으로 흔들었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독배를 마셨다.

제자 플라톤은 스승이 남긴 질문 곁에 세웠다. 이데아론, 아카데메이아, 『국가』. 소크라테스가 터를 비워 냈다면, 플라톤은 그 빈터에 커다란 건물을 지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에서 약 이십 년을 보냈다. 이데아를 개별 사물과 분리하는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았다. 논리학, 자연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시학, 생물 연구. 진리를 모두 담아 완성한 백과사전이 아니었다. 지식들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하려는 놀라운 포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이름은 알렉산드로스였다.

소크라테스는 깎는다. 플라톤은 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건축을 백과사전 같은 지도로 펼친다. 알렉산드로스는 지도를 제국 쪽으로 밀어 나간다. 이것은 이 글이 그어 보는 선이지, 철학 수업에서 정복이 필연적으로 나온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는 필리포스의 군대도 물려받았고, 나중에는 페르시아의 통치 자원도 활용했다.

깎기에서 짓기로, 체계로, 정복으로. 네 세대. 이 비유의 선을 따라가면 세대마다 더 멀리 나아가고, 소크라테스의 빈터에서도 더 멀어진다.

2. 열세 살

기원전 343년 무렵, 알렉산드로스는 열세 살이었다. 아버지인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초빙했다.

이후 몇 해 동안 그들은 미에자의 님프 성소 부근에서 공부했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것은 윤리, 정치, 의학, 그리고 호메로스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정했다고 하는 『일리아스』를 단검과 함께 베개 밑에 두었다고 한다. 완전한 수업 시간표는 아니다. 다만 한 소년과 한 권의 책이라는 모습을 남긴다.

이 글은 그 사제 관계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첫째, 세계는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선은 별에서 동물로, 도시에서 인간의 행위로 옮아간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같지 않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이야기를 옆에 놓으면 질문이 생긴다. 세계를 더 알고 싶다는 바람은 언제 세계를 손에 쥐고 싶다는 바람으로 바뀌는가?

둘째, 호메로스. 아킬레우스. 고대 전기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이 영웅과 긴밀하게 연결한다.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왕가도 아킬레우스의 아들에게서 혈통이 이어진다고 했다. 신화가 소년 앞에 거울을 마련해 두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권력만이 아니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클레오스, 후세까지 전해지는 명성이기도 했다.

열세 살. 중국의 역사서도 진시황이 당시의 나이 셈법으로 열세 살에 진왕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장면을 나란히 놓아 보자. 함양의 소년과 마케도니아의 소년. 한 명은 훗날 여섯 나라를 합병하고, 다른 한 명은 페르시아 왕권을 무너뜨린다. 같은 날 벌어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둘 다 젊은 얼굴이다.

3. 십삼 년

기원전 336년, 알렉산드로스는 스무 살이었다.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자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이었다.

이 년 뒤, 그는 출발했다.

기원전 334년부터 323년까지, 원정은 십일 년이었다. 즉위부터 계산한 재위는 십삼 년. 알려진 세계 전체는 아니지만, 에게해에서 인더스강으로 뻗은 거대한 영토였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들어간다.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강에서 페르시아 지방 총독들의 군대를 격파한다. 333년 이소스에서는 다리우스 3세를 이긴다. 다리우스는 달아난다.

다음은 남쪽이다. 티로스를 일곱 달 동안 포위한다. 이집트에 들어가 파라오로 통치한다. 331년에는 나일강 삼각주 곁 해안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운다. 훗날 고대 세계의 큰 도시가 될 곳이다.

다시 동쪽으로. 같은 해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는 또 패주한다.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로 들어간다. 330년 페르세폴리스의 궁전들이 불탄다. 옛 페르시아 왕권은 쓰러지지만 각지의 저항까지 함께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직 멈추지 않는다.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힌두쿠시산맥을 넘고 인도 아대륙으로 들어간다. 326년 히다스페스강에서 포로스를 무찌른다.

더 동쪽의 히파시스강에 이르자 병사들이 끝내 진군을 거부한다. 원정은 이미 팔 년째다. 왕은 영광을 말하고 앞으로 남은 길을 말한다. 코이노스는 지친 병사들을 대신해 말한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리아노스의 서술에서는 연설과 응답이 먼저이고, 왕의 분노와 사흘간의 은거가 그다음이다. 마음을 바꾸었다며 막사 밖에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병사들 가운데는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내 왕이 회군에 동의했다. 그러나 방향을 돌렸다고 곧장 고향에 닿는 것은 아니었다. 인더스강을 따라 벌어질 전쟁과 귀로의 사막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전 323년 유월, 그는 바빌론에서 병으로 죽었다. 서른두 살이었다. 고대 기록에는 열이 계속되고 병세가 악화되는 모습이 남아 있다. 사인을 확정할 수 있는 진료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왕으로 십삼 년, 원정으로 십일 년. 마케도니아에서 인도로, 에게해에서 인더스강으로. 놀라운 속도였다. 그러나 한 인간의 몸은 끝없이 걸을 수 없었다.

4. 파편

그가 죽었다. 제국의 이음매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고대 저자들은 마지막 대답을 전한다. “가장 강한 자에게.” 실제로는 장군 크라테로스의 이름을 말했을 것이라는 후대의 추측도 있다. 어느 쪽도 병상 곁에서 녹음한 말은 아니다. 남은 것은 안정적인 계승 방안이 없는 거대한 왕권이었다.

장군들, 곧 디아도코이, ‘후계자들’은 처음에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과 유복자를 왕으로 받들면서 섭정 자리와 관할 지역을 다투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전쟁, 동맹, 살인이 지도를 계속 바꾸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를 장악했고, 셀레우코스는 서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왕국을 세웠다. 안티고노스는 더 큰 통일을 추구했고, 그 후손들은 나중에 마케도니아에 기반을 잡았다.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와 소아시아 일부를 다스렸지만 그 왕국도 그의 전사 뒤에 해체되었다.

공자 이후, 여러 세대의 전승을 거쳐 『한비자』에는 유가가 여덟 갈래로 나뉘었다는 말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스 이후,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세우고 아카데메이아는 다시 변화를 겪는다.
석가모니 이후, 불교는 전승과 논쟁을 거치며 상좌부와 대중부 등의 분파를 낳는다.
예수 이후, 바울은 초기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목소리가 되고, 후대의 교회는 거듭 갈라진다.
진시황 이후, 『사기』는 조고 등이 계승 방안을 바꾸었다고 전한다. 통일에서 십오 년이 지나 진 왕조가 무너진다.

알렉산드로스 이후, 다툼은 곧 시작되었지만 분열이 하룻밤에 완성된 것은 아니다. 약 사십 년의 후계자 전쟁도 지도를 영구히 네 조각으로 고정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두드러지는 세 왕조 외에도 작은 왕국과 도시들이 저마다 변동을 겪었다.

이 다른 역사들을 이어 붙이면, 되풀이되는 어려움 하나가 보인다. 스승이나 지배자가 떠난다고 계승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파편이 흩어진다. 사람들은 하나씩 주워 각자의 집을 짓는다. 이 몽타주가 말하는 것은 물려받기의 어려움이지 모든 분열의 원인이 같다는 주장이 아니다.

더구나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 무너지는 양상은 진의 경우와 달랐다.

진이 무너진 뒤 한은 그 제도적 자원을 물려받아 바꾸었다. 군현, 문자 규범, 중앙 관청. 한동안 봉국과 직접 통치하는 군현이 함께 존재하기도 했다. 진 왕조는 죽었지만 그 건축의 일부는 살아남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영역이 나뉜 뒤에도 그리스어, 호메로스, 극장, 체육장, 그리스식 교육은 이주민과 도시와 궁정을 따라 움직였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박트리아에 이르기까지 문화들은 만나고 서로를 바꾸었다. 지방의 언어와 믿음과 생활이 모두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진시황은 제도를 남기고 알렉산드로스는 문화를 남겼다는 말은, 이 대조가 어디에 무게를 두는지 보여 준다. 두 사람의 유산 사이에 배타적인 경계선을 긋는 말은 아니다.

제도는 계승될 수도, 뒤집힐 수도 있다. 문화는 왕조의 죽음을 넘어설 수 있지만, 문화 역시 달라지고 물러나고 새로 자란다. 정치 지도가 깨졌다고 모든 것이 영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5. 진시황과 나란히

두 사람 사이에는 약 한 세기가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기원전 323년, 진의 여섯 나라 통일은 221년이다. 백이 년의 간격. 둘 다 왕권을 확대하고 넓은 지역을 하나의 중심 아래 두려 했다. 누구도 세계 전체를 담지는 못했다.

먼저 어떻게 지었는지 보자.

진은 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차이를 가진 제후국의 세계에서 파편들을 하나로 용접했다. 문자 규범, 도량형, 명령을 통일했다. 도구는 표준화였으며 폭력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진이 흉노나 백월의 지역으로 팽창한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를 떠나 언어와 종교, 정치 전통이 다른 사람들을 정복했다. 그중 많은 지역은 이미 페르시아 제국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스인이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는 백지가 아니었다. 그는 군대와 개인의 위신뿐 아니라 지방 행정을 이어받고 조정하는 방식으로도 통치했다.

진은 차이를 눌러 평평하게 만들며 지배를 강화했다. 『사기』는 책을 불태우고 학문하는 이들을 대규모로 처벌한 일을 기록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일부 차이를 왕권 속에 편입했다. 박트리아 귀족의 딸 록사네와 결혼하고, 뒤에는 수사에서 페르시아 왕가의 여성들과 혼인했다. 장교들의 결혼을 주선하고 페르시아 복식과 궁정 의례를 일부 받아들였다. 그러나 관용의 동화는 아니다. 테바이와 티로스의 파괴, 살육, 노예화 역시 그의 정복에 속한다.

두 경향에 각각 목소리를 준다면 이렇다.
진시황은 말한다. 하나의 질서로 맞추어라.
알렉산드로스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왕권에 엮어 넣어라.
이것은 이 글이 만들어 붙인 목소리이지, 두 사람의 실제 발언을 인용한 것이 아니다.

결과는 어땠는가?

진 왕조는 통일 뒤 약 십오 년, 진시황 사후 사 년 만에 무너졌다. 제도의 일부 요소는 후대에 거듭 변형되며 오래 이어졌다. 똑같은 제도가 이천 년 동안 그대로 살아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의 다툼도 문화적 연결을 지우지는 못했다. 헬레니즘 시대는 보통 기원전 일 세기 말까지로 구분한다. 그러나 그 날짜는 그리스 문화의 사망일도 아니고, 모두가 평등하게 참여했다는 증거도 아니다.

진의 균열은 진승과 오광 같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옛 귀족과 새 군사 지도자들도 함께 보아야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균열은 위에서 벌어진 계승 전쟁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각지의 저항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로, 다른 카메라는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균열의 방향은 다르다. 어느 중심도 자신이 모으려는 모든 힘을 붙잡아 두지는 못한다.

하나의 구축물이 모든 것을 담고 완전히 닫힐 수 있는가? 이 글이 두 역사에 묻는 것은 그것이다.

6. 아킬레우스와 나란히

고대 전기 속 알렉산드로스에게 아킬레우스는 줄곧 거울이었다.

아시아 원정 초기에 그는 트로이아를 찾아 아킬레우스의 무덤에 경의를 표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기름을 바르고 알몸으로 달리며 화관을 바치는 모습을 쓴다. 아리아노스는 일리온의 아테나 신전에서 가져온 방패도 언급한다. 트로이아 전쟁 시대의 것으로 여겨진 방패다. 인도 원정에서도 그 방패는 군대와 함께 다시 나타난다.

그는 자주 선두에서 위험을 무릅썼고 심한 부상을 입었다. 말리인들의 도시에서는 화살이 가슴 깊이 박혔다. 호메로스의 아킬레우스는 짧은 생과 오래가는 명예의 관계를 안다. 알렉산드로스가 거듭 몸을 위험에 내주는 모습은 후대의 독자에게 그 선택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역사와 서사시를 나란히 두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간격이 보인다.

『일리아스』 제24권.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찾아온다. 두 적이 함께 운다. 분노가 우주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자리를 내준다. 아킬레우스가 적의 슬픔을 본다. 시는 마지막에 헥토르의 장례를 놓는다.

알렉산드로스의 이야기에는 그렇게 준비된 제24권이 없다.

기원전 328년, 술자리의 논쟁 끝에 그는 클레이토스를 죽인다. 그라니코스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이다. 필리포스의 공적, 마케도니아인들의 기여, 달라지는 왕권의 태도를 둘러싸고 말다툼이 격해진다. 알렉산드로스는 창을 집어 그를 찌른다. 고대 기록은 이후의 고통과 은거, 음식을 거부하는 모습을 전한다. 그러나 뉘우침으로 죽은 사람을 돌아오게 할 수는 없다.

아킬레우스는 적인 헥토르를 죽인 뒤 프리아모스 앞에서 연민에 자리를 내준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우 클레이토스를 죽인 뒤 회한 속으로 떨어진다.

나란히 놓인 이 두 장면에서 한 곡선은 화해 쪽으로 휘고, 다른 곡선은 꺾인다. 알렉산드로스가 누구에게도 연민을 느낀 적 없다는 단정은 아니다. 물어야 할 것은 회한이 어떻게 다른 삶의 방식으로 바뀔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하나의 맺음을 마련했다. 현실에는 알렉산드로스에게 같은 맺음을 마련할 의무가 없었다.

그는 서른두 살에 죽었다. 호메로스가 쓴다면 제24권에는 무엇이 들어갈까? 인더스강 가에 앉아 동쪽을 보며, 익숙한 세계 바깥에 아직 더 많은 미지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일까. 바빌론으로 돌아와 남은 삶을 다음 정복보다 통치에 더 많이 바치는 사람일까. 패배시킨 뒤에도 왕으로 남겨 두고 영토까지 늘려 준 포로스와 마주 앉아, 상대에게도 상대의 호메로스가 있음을 발견하는 장면일까.

그러나 호메로스는 쓰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제23권에서 죽었다는 말은 독자의 비유다. 그의 시신마저 뒤에는 권력 다툼의 일부가 된다. 여기서는 카메라를 바빌론에 멈춘다. 열. 호흡을 멈춘 서른두 살의 몸. 우리의 바람대로 도착하지 않은 다음 권.

7. 깎기에서 제국으로

이제 네 세대를 다시 한 줄에 놓아 보자.

소크라테스: 깎기. 거짓 지식을 묻고 빈터를 만든다.
플라톤: 짓기. 이데아론, 아카데메이아, 질문 곁의 큰 건물.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를 백과사전 같은 체계로 펼친다.
알렉산드로스: 군대로 정치 지도를 멀리 밀어 나간다.

이 비유의 선에서는 세대마다 빈터에서 더 멀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책을 남기지 않았지만 질문하는 힘을 남겼다.
플라톤은 주장도 있고 풀리지 않은 의문도 있는 대화편을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류와 논증과 답을 남겼고, 더 연구해야 할 난제도 남겼다.
알렉산드로스는 제국을 남겼다. 생각으로 포괄할 뿐 아니라 땅 위에서 소유했다.

마치 “나는 아직 모른다”에서 “나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싶다”로 가듯이. 네 세대. 이 두 문장은 이 글이 그림에 붙인 말이지, 사료에 남은 대화가 아니다.

더 크게 지으면 그만큼 이음매도 많아지는가?

소크라테스의 빈터에는 이천사백 년 뒤에도 사람들이 선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여전히 논의되고 반박되고 다시 해석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설명 가운데 많은 것은 대체되었지만, 논리와 윤리와 정치의 질문은 계속된다.
알렉산드로스의 통일 왕권은 그의 죽음 뒤 급속히 중심을 잃는다.

크면 클수록 수명이 짧다는 역사 법칙은 아니다. 다만 이 그림에서 빈터는 가장 가벼우면서도 뒤에 오는 사람들이 다시 발을 디딜 수 있게 한다. 제국은 가장 무겁지만 무게만으로 내일을 보장하지 못한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형식 체계를 다룬다. 정치사의 명제를 대신 증명해 주지 않는다. 여기서 구축물은 완전히 닫힐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철학적 비유다. 소크라테스의 질문, 짧았던 진 왕조, 알렉산드로스 뒤에 벌어진 이음매는 우리에게 묻는다. 하나의 세계를 지은 다음,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8. 다리 어귀에 온 젊은이

이 연작이 상상하는 다리 어귀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진시황은 검은 용포를 입고 있다. 발밑에는 균열이 있다.
워싱턴은 농부의 옷을 입고 있다. 발밑에는 흙이 있다.

이제 한 젊은이가 온다. 서른두 살. 갑옷에는 피가 묻었고, 손에는 『일리아스』가 있다. 눈은 여전히 동쪽을 본다. 이미 걸어온 길 너머, 다음에 더 가고 싶은 곳을 향한다.

그토록 젊다. 우리가 그를 위해 쓰고 싶은 제24권은 아직 오지 않았다. 서사시 같은 화해의 맺음도, 고향으로 돌아와 밭을 가는 결말도 없다.

그는 진시황 옆에 선다. 두 사람 모두 멀리까지 지었다. 한 사람은 주로 제도를 같은 틀에 눌러 담았고, 다른 사람은 차이를 팽창하는 왕권에 엮었다. 둘 다 폭력에 의지했다. 누구도 제국을 영원히 하나로 붙들지는 못했다.

이 상상의 장면에서 그는 워싱턴을 흘끗 본다. 농부의 옷과 흙 묻은 손을 본다.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권력을 내려놓는다고? 왜? 영광을 좇는 아킬레우스라면 그럴까?

하지만 아킬레우스에게는 제24권이 있다. 그는 헥토르의 시신을 프리아모스에게 돌려준다. 그 순간, 적을 놓아주지 않으려던 손을 편다.

알렉산드로스의 이야기는 그만큼 또렷한 순간을 우리를 위한 결말로 놓아 주지 않는다.

다리 어귀의 이 젊은이는 호메로스를 손에 쥐고 있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맺음을 주었다. 그러나 실제 한 생애의 빈 페이지를 모두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이것이 이 글이 그에게 주는 결말일 것이다. 다리 어귀에 서 있는 서른두 살, 영원히 동쪽을 바라보는 모습.

읽기 안내와 출처

사제 관계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으나 빈터, 건축, 백과사전, 제국으로 이어지는 선은 이 글의 해석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질문만 또는 답만 있는 사상가로 줄일 수 없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폭넓은 연구도 현대적 의미의 완결되고 닫힌 체계는 아니다.

미에자, 호메로스, 의학, 아킬레우스 전통은 플루타르코스 『알렉산드로스 전』 7–8절과 15절을 참조한다. 고대 전기는 사건에서 수백 년 뒤에 쓰였고, 앞선 자료를 전하면서도 인물의 성품과 모범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하루하루의 발언을 그대로 옮긴 기록은 아니다.

히파시스의 진군 거부는 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5권 25–28장, 말리인 도시의 부상은 6권 9–11장, 수사 혼인은 7권 4장을 참조한다. 록사네는 박트리아 귀족 옥시아르테스의 딸로, 수사의 페르시아 왕가 혼인과는 별개다.

죽음과 “가장 강한 자에게”라는 말은 『원정기』 7권 25–27장에 전한다. 같은 대목에는 이미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전승도 있다. 크라테로스라는 해석은 후대의 추측이지 확정된 유언이 아니다. 이 기록들만으로 진단이나 마지막 말을 단정하지 않는다. 후계 국가들은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죽는 순간 네 나라로 확정 분할된 것이 아니다.

진한의 대조는 특정한 유산과 균열을 강조한다. 여섯 나라 통일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의 죽음은 210년, 진 멸망은 206년이다. 유가·불교·기독교의 분파에는 각기 다른 연대와 제도적 원인이 있다. 헬레니즘화는 지역 문화의 소멸이나 지위의 평등을 뜻하지 않는다.

클레이토스 사건은 플루타르코스 『알렉산드로스 전』 50–52절과 아리아노스 4권 8–9장을 참조한다. 『일리아스』 24권은 프리아모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되찾는 이야기를 쓰고 헥토르의 장례로 끝난다. 아킬레우스의 전체 생애가 끝나는 것도, 분노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아니다.

제23권, 쓰이지 않은 다음 권, 네 세대의 직선, 괴델과의 비유, 다리 어귀의 만남은 문학적·철학적 구성이다. 역사적 인과를 증명하지 않으며 알렉산드로스·진시황·워싱턴의 내면 독백을 기록한 것도 아니다.

플루타르코스 『알렉산드로스 전』: 교육과 초기 원정 · 플루타르코스 『알렉산드로스 전』 50–52절: 클레이토스 · 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24권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헬레니즘 시대와 그 전통 · Livius: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아리스토텔레스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