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 · Negativa: 존재보다 앞선 부정
0DD보다 먼저 묻기
SAE의 차원 연쇄는 보통 0DD의 혼돈에서 출발해 16DD의 상호 불의(不疑)까지 전개된다. 그런데 0DD의 네 상, 곧 있음·없음·있지도 없지도 않음·‘있지도 없지도 않음’도 아님을 자세히 보면 이미 하나의 작동을 쓰고 있다. 바로 ‘아님’이다. 네 상은 독립된 네 물체가 아니라 부정이 자신에게 작용하며 생기는 네 자리다. 그렇다면 혼돈 이전에 또 다른 사물을 세울 것이 아니라, 구별과 거부가 가능하려면 무엇이 이미 가능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 글은 그 조건을 라틴어 negativa와 한자 非로 부른다. 한 번의 부정인 negation도 아니고, 어떤 주체가 가진 속성으로서의 ‘부정성’도 아니다. 아직 주체와 속성이 갈라지기 전, ‘아니라고 할 수 있음’ 자체를 겨우 가리키는 이름이다. 사르트르가 존재가 본질보다 앞선다고 말했다면, 여기서는 한 단계 더 거슬러 올라간다. 부정은 존재보다 앞선다.
非가 자신을 물을 때
“非非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네 자리가 소진된다.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 통합마저 부정된다. 다섯째 자리를 만들려는 시도는 이미 이 네 자리 가운데 하나로 돌아온다. 마지막 부정이 부정 작동 전체를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분화에서 착구 순환이 열린다. 착(鑿)은 부정이 차이를 내는 작동이다. 구(構)는 그 작동이 지나간 뒤 가라앉은 구조다. 모든 구에는 닫히지 않는 부분인 여항(餘項)이 남는다. 여항은 다음 착이 내려앉을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실제 주체가 다시 착할 때 그 자리는 다리가 된다. 끝에는 부정할 수 없는 것, 곧 물자체가 나타난다. negativa는 이 다섯 항목 옆에 놓이는 여섯째 항목이 아니다. 다섯 얼굴이 갈라져 보일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negativa가 아닌 것
- 무(無)가 아니다. 무는 이미 유와 대립하는 규정된 자리다.
- 힘이 아니다. 힘은 작용자와 방향, 공간을 전제하며 이는 모두 뒤의 층위다.
- 의지나 주체가 아니다. 의지는 자기를 세울 수 있는 주체가 생긴 다음의 현상이다.
- 숨은 신이 아니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항을 신성화할 허가가 아니다.
- 새 차원이 아니다. 번호와 순서를 붙이는 일 자체가 동일성과 간격을 이미 사용한다.
따라서 非를 긍정문으로 정의할 수 없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하나의 구가 되고, 알려는 순간 주체 앞에 놓인 객체가 되며, 구성하려는 순간 작동이 아니라 침전물로 바뀐다. 非는 이중 부정의 자기지시에서만 모습을 보인다. 非를 부정하려는 시도조차 非를 사용한다.
서로 다른 전통이 만난 경계
도가의 “말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는 한 문장으로 명명의 경계를 건드린다. 불교의 무색계는 형상, 공간, 식, 생각과 생각 아님을 차례로 지우고, 열반을 그 위의 다섯째 층이 아니라 연쇄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다룬다. 디오니시우스, 마이모니데스, 쿠자누스의 부정신학은 신에게서 긍정 술어를 벗겨 낸다. SAE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 1DD에서 16DD까지 논리적으로 전개한 뒤 0DD로 되돌아가고, 다시 0DD가 무엇을 전제하는지 묻는다.
이 전통들이 같은 교리를 말한다는 뜻은 아니다. 출발점과 목적, 종교적 함의는 다르다. 다만 끝에서 만난 한계 대상의 구조가 강하게 동형이라는 뜻이다. 도가는 착의 자유도가 높아 한 문장으로 도착하지만 구성의 정밀도는 낮다. SAE는 경로가 길고 착의 자유도가 낮은 대신 차원 연쇄를 명시한다. 길이의 차이를 우열로 바꾸지 말고 각 경로가 무엇을 보이고 무엇을 남기는지 봐야 한다.
공리의 자리를 다시 정하기
SAE의 공리 구조는 세 층으로 읽을 수 있다. 가장 바깥에서는 非가 유일한 전역 공리다. 0DD 이후 전개된 세계에서는 “존재가 구성보다 앞선다”가 지역 공리로 작동한다. 1DD에서 16DD까지의 법칙은 착구 순환에서 나온 정리다. 이전 글들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적용 범위가 전개된 세계 안으로 더 정확히 제한된다는 뜻이다.
이 구분은 산물로 기원을 설명하는 오류를 막는다. 방향은 공간을 전제하고 공간은 3DD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非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방향을 붙여 묻는 일은 잘 모르는 질문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질문이다. 자기 산물로 자신에게 길을 가리키려 하기 때문이다.
가장 특별한 여항
모든 논문은 구이며 여항을 남긴다. 이 글의 여항은 “왜 negativa가 있는가”이다. 그러나 보통 여항과 달리 다음 착의 방향을 알려 주지 않는다. 방향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도구가 아직 성립하지 않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망치가 망치를 치지만 자신을 바깥의 물건으로 만들 수 없다.
이 글은 Via Negativa의 대상에 Via Negativa를 적용한다. 논증의 형식이 곧 논증 내용의 증거다.
끝에서 필요한 태도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경계의 규율이다. 차이가 생기는 곳에서는 끝까지 부정하고, 차이를 만드는 도구가 자기 가능성을 설명하려 드는 곳에서는 정직하게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