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읽기
Non Dubito

언어와 글쓰기 · 01

이름은 붙였다고 끝이 아니다

‘폐품 수거’와 ‘헌 물건 수리’는 몇 글자 차이지만, 어떤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지는 달라진다. 언어의 힘은 이 작은 차이에서 시작된다.

Han Qin ·

이웃 몇 명과 주말에 동네의 빈방 하나를 빌려, 사람들이 차마 버리지 못하는 살림살이를 고쳐 주기로 한다. 누군가는 플러그를 갈 줄 알고, 누군가는 지퍼를 꿰맬 줄 안다. 공구를 가져와 다리가 흔들리는 의자를 살펴보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야기는 거의 끝났고, 이제 안내문만 쓰면 된다.

종이에 ‘폐품 수거’라고 적었다가 잠시 보고 지운다. 수거가 아니다. 물건을 받아 가져갈 생각도 없고, 무게를 달아 값을 매길 생각은 더더욱 없다. ‘헌 물건 새활용’은 어떨까? 그것도 꼭 맞지는 않는다. 라디오를 고치려는 어르신은 그것을 다른 물건으로 바꾸고 싶은 게 아니다. 원래의 라디오에서 다시 소리가 나기를 바랄 뿐이다.

결국 ‘헌 물건 수리 모임’이라고 쓴다. 멋진 이름은 아니다. 조금 투박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하려던 일에는 한결 가까워졌다. 그 아래 한 줄을 덧붙인다. 아직 곁에 두고 싶은 물건 하나를 가져오세요.

안내문을 붙이기도 전에 언어는 이미 많은 일을 했다. 이 모임을 폐품 수거, 중고품 판매, 공예 수업과 구별했고, 흐릿하던 계획에 윤곽을 주었다. 그저 막연히 ‘환경에 좋은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어떤 물건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방법 하나를 마련해 주려는 것이었다.

언어가 일상에서 하는 일은 흔히 이렇다. 뜻이 완전히 분명한 무언가가 먼저 있고, 거기에 몇 마디를 씌우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쓰고 고치다가 비로소 깨닫기도 한다. 아, 내가 하려던 말은 저게 아니라 이거였구나.

하나의 차이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기

이름을 부르면 적어도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서로 뒤섞인 경험에서 어떤 차이를 가려내고, 그 차이에 알아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표시를 준다. ‘수리’가 쓸모 있는 까닭은 단지 짧은 단어여서가 아니다. 그 말을 들으면 물건을 기부하러 오라는 것도, 사러 오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대략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려낸다’는 말은 이름이 없으면 의자가 고장 나지도 않고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지도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세계는 우리가 말하기를 기다렸다가 생겨나지 않는다. 말이 구분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에 주목하고, 이해하고, 서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같은 건물의 방도 용도에 따라 사무실과 거실로 나눌 수 있고, 개방 여부에 따라 공용 공간과 사적 공간으로 나눌 수도 있다. 질문이 달라지면 중요한 차이도 달라진다.

또한 표시에는 다시 보아도 알아볼 만큼의 안정성이 있어야 한다. ‘수리’가 오늘은 고치는 일, 내일은 파는 일, 모레는 아무 설명 없이 수업을 뜻한다면 안내문은 쓸 수 없게 된다. 단어의 뜻이 영원히 바뀌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다. 적어도 이번 대화에서는 서로 무슨 일을 말하는지 되짚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안정적인 표시가 꼭 글자일 필요는 없다. 문에 그린 그림, 약속된 손짓, 말로 전하는 안내도 그 일의 일부를 맡을 수 있다. 매체마다 장점이 있고 오해가 생기기 쉬운 지점도 있다. 언어는 자기 마음속에서 분명하기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도 찾아야 한다.

왜 하필 ‘수리’라는 소리여야 하고 다른 소리면 안 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다른 언어에는 다른 표현이 있고, 사투리에는 더 살가운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뜻을 담으려면 알아볼 수 있는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과, 세상이 이미 뜻마다 유일한 이름을 정해 놓았다는 것은 다르다. 문패가 필요하다는 것과 문패가 반드시 이 문패여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그래서 언어는 약속을 떠날 수 없으면서도 약속을 따르는 일에만 머물 수 없다. 모두 제멋대로 말하면 남들이 내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 모든 표현을 바꾸지 못하게 하면 새로 생긴 경험은 어디에 놓아야 할까? 살아 있는 언어는 사람들이 다시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이전에 그렇게 말한 적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안내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제 자원봉사자는 몇 명인지, 공구는 몇 벌 가져오는지, 몇 명까지 받을 수 있는지 적어야 한다. 여기서 이름 붙이기와 세기는 가까이 있지만 같은 일은 아니다. ‘의자 여섯 개’라고 하면 수를 세는 것이다. 그것들을 ‘수리를 기다리는 것’과 ‘수리가 끝난 것’으로 나누면 또 다른 구분을 하는 것이다. 둘은 서로 도울 수 있지만, 수량을 안다고 해서 이 물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저절로 알게 되지는 않는다.

목록의 물건마다 ‘가, 나, 다’ 또는 ‘1, 2, 3’으로 번호를 붙일 수도 있다. 이때 숫자는 잠시 이름 노릇을 한다. 반대로 ‘수리가 필요한 전기제품’의 수를 세려면 무엇을 그 범주에 넣을지 먼저 정해야 한다. 전등갓도 포함할까? 건전지만 빠진 물건은 어떨까? 언어와 셈은 서로의 도구를 빌릴 수 있지만, 서로의 모든 질문에 대신 답해 줄 수는 없다.

규칙은 때로 돕고, 때로 가로막는다

동네 게시판은 공간이 작다. 담당자가 본문을 여든 자 안에 써 달라고 한다. 조금 못마땅하다. 절약과 환경, 이웃의 상부상조에 관해 써 놓은 문단은 도저히 들어가지 않는다. 지울 수밖에 없다. 끝까지 덜어 내니 시간, 장소, 가져와도 되는 것과 받지 않는 것, 그리고 ‘아직 곁에 두고 싶은 물건 하나를 가져오세요’라는 문장만 남는다.

이상하게도 글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글자 수 제한이 뜻을 대신 생각해 준 것은 아니다. 다 하고 싶던 말들 가운데 무엇을 남길지 고르게 했을 뿐이다. 늘 끝에 두었던 짧은 문장이 이제 안내문 전체의 중심이 된다. 처음에는 따뜻한 분위기를 내는 장식쯤으로 생각했는데, 고치면서 보니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형식은 언제나 뜻을 가두는 우리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크기가 알맞은 탁자 같아서, 그제야 물건을 제대로 펼쳐 놓을 수 있게 한다. 일정한 운율의 시를 쓰다가 어떤 단어가 들어가지 않아 다른 단어로 바꾸었는데, 뜻밖의 연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아이가 알아들을 말로 해야 하니, 자신이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규칙이 많을수록 글이 좋아진다고 할 수는 없다. 여든 자는 안내문을 간결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빼서는 안 될 안전 안내를 밀어낼 수도 있다. 시는 가지런할 수도, 불규칙할 수도 있다. 소설은 여러 겹으로 포개질 수도 있고 극도로 짧을 수도 있다. 형식이 얼마나 엄격한가는 여러 글쓰기 방식을 살펴보는 단서이지, 모든 작품의 우열을 매기는 잣대가 아니다. 문학이 반드시 거쳐야 할 역사의 한 구간은 더더욱 아니다.

정작 물어야 할 것은 이 규칙이 지금 무엇을 돕고, 무엇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가이다. 글자 수가 모자라면 사정을 설명하고 한 줄을 더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고쳐도 어색한 문단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쓸 수 있을까? 좋은 형식은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다시 의논할 수도 있어야 한다.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담당자가 모든 행사에 같은 서식을 쓰라고 한다고 해 보자. ‘의자 고치기’ 대신 반드시 ‘주민 종합 역량 증진’이라고 써야 하고, ‘차마 버리지 못하는’ 대신 ‘자원 최적화’라고 해야 한다. 물론 그대로 채워 넣을 수 있다. 안내문도 아주 공식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물건을 가져오고 싶은 사람은 읽고 나서 오히려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더 알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때는 사람이 형식을 빌려 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이 어떤 말만 할 자격이 있는지 미리 정한다. 구체적인 사정은 듣지 않고 적격인 단어를 썼는지만 검사한다. 전문 용어나 통일된 서식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꼭 필요한 자리도 있다. 문제는 눈앞의 일이 이미 기존 서식으로는 부족함을 보여 주었는데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이런 곤란은 여러 곳에서 겪는다. 분명 구체적인 어려움을 설명하고 싶은데, 먼저 다른 말투로 바꿔 말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바꾸고 나면 낱말 하나하나는 반듯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라져 있다. 그래서 자신이 표현을 못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애초에 그 양식에 이 일을 담을 자리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양식에 빈칸이 없다는 이유로 삶이 멈추지는 않는다. 행사 당일 누군가 묻는다. “저는 물건 수리는 못하고 칼은 갈 줄 아는데, 도우러 와도 될까요?” 또 누군가는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계속 써야 할지 모르는 헌 옷을 가져오고 싶어 한다. 그제야 신중히 고른 ‘수리’라는 이름도 몇몇 사람을 빠뜨렸음을 알게 된다.

제목에 맞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고집할 수도 있다. 새로 생긴 사정을 적어 두었다가 다음번에 다시 준비할 수도 있다. 탁자를 몇 군데로 나눠야 할지도 모르고, 이름을 ‘손봐서 계속 쓰기’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워 보이기 위해 바꾸는 게 아니다. 기존 표현으로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다 담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험이 새 형식을 찾으라고 재촉한다.

일상에서 메시지를 보낼 때도 마찬가지다. 입으로 하면 농담인데 글로 쓰면 나무라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모티콘을 덧붙이고, 누군가는 음성 메시지로 바꾸고, 누군가는 아예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한다. 이런 시도가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용법이라고 모두 남길 만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 시도들은 알려 준다. 기존의 문장과 문장부호가 모든 소통의 방식을 한 번에 정해 놓은 것은 아니라고.

반대편에도 어려움은 있다. ‘헌 물건 수리’도 아니고, ‘손보기’도 아니라고 느낀다. 다른 사람이 어떤 표현을 제안해도 “아니야, 내 느낌을 모르겠구나”라고 한다. 물론 당장은 말로 옮길 수 없을 수도 있고, 모든 느낌을 남에게 내어 줄 의무도 없다. 침묵한다고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정말 다른 사람을 참여시키고 싶다면, 완벽하지 않은 표현이라도 일단 자리를 잡도록 허용해야 한다. 우선 의자를 가리키며 “내가 하려는 건 대략 이런 거야”라고 해도 된다. 모든 낱말이 마음속 느낌 전부를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고 요구하면 어떤 표현도 합격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끝내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언어의 문제는 단순히 ‘규칙이 필요한가, 필요 없는가’가 아니다. 형식은 뜻을 끌어낼 수도, 뜻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있다. 새로운 뜻은 형식을 바꿀 수 있지만, 완전한 표현에 대한 지나친 요구는 잠시 디딜 자리마저 모두 거부할 수 있다. 양쪽 모두 조금씩 여지를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옳은 말뿐인 빈말만 남거나,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만 남는다.

기계가 글을 도와준다면, 무엇을 말할지는 누가 정할까

언어 모델에 안내문을 맡길 수도 있다. 곧바로 제목 열 개가 나온다. ‘헌 물건의 새 삶’, ‘좋은 것을 다시 순환시키다’, ‘삶의 온기를 되살립니다’…. 실제로 내가 쓴 것보다 매끄러운 것도 있다. 어르신들은 예약이 필요한지 모를 수 있다는 점이나 전기를 쓰는 물건에 대해서는 미리 설명해야 한다는 점을 짚어 줄 수도 있다. 빠진 부분을 찾도록 돕고, 생각하지 못한 표현의 방향을 열어 주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모델이 입력받고 출력하는 글은 여전히 각각 구분되는 토큰을 통해 처리된다. 내부에서는 수치 표현을 이용해 여러 맥락에서 단어와 문장의 관계를 계산한다. 벡터를 쓴다는 이유로 글의 형식이 사라졌다거나, 단어의 뜻이 경계 없는 연속체가 되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수치 표현에도 나름의 구조와 제약이 있다.

바탕이 된 논문은 하나의 철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표현이 눈에 보이는 단어의 경계만을 따라 처리되지 않을 때, 원래 잘 보이지 않던 관계를 새로 조합할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물어볼 만한 생각이지만, 이미 입증된 공학적 결론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모델의 연상과 전이 능력이 어떻게 생기는지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멋진 비유가 그 연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연결할 수 있다’와 ‘맞게 말한다’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제목에 ‘새것처럼’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듣기에는 좋지만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모든 헌 물건을 새것처럼 복구해 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다. 어떤 것은 살펴보기만 할 수 있고, 고치지 못하면 다시 집으로 가져가야 한다. 모델이 유창하게 쓸수록 이런 차이는 더 쉽게 넘어가 버린다. 연관성은 후보를 내놓을 수 있지만 사실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새것처럼’을 지우는 까닭은 기계가 영원히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이번 행사에서 무엇을 약속할 수 있는지 내가 알고, 그 약속에 책임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모델은 학습, 지시, 맥락의 영향을 받으므로 아무 방향 없이 마구 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영향들이 다음 질문에 대신 답해 주지는 못한다. 나는 왜 이 이웃들에게 이 말을 하려는가? 이 말이 불러올 기대를 감당할 마음이 있는가?

기계를 거부하면 저절로 자기 뜻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아무 도구 없이도 우리는 그럴듯한 말을 가져다 쓰고, 좋은 글처럼 보이려다가 정작 하고 싶던 말을 닳아 없애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누가 글자 하나하나를 쳤느냐가 아니다. 아직도 이렇게 짚을 수 있느냐이다. 이 문장은 듣기 좋지만 내 뜻이 아니다. 저 문장은 조금 투박해도 지울 수 없다.

그렇다고 표현의 방향이 영원히 고정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계의 제안 하나, 이웃의 되물음 하나가 이번 행사를 다시 이해하게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돈을 조금 아끼도록 돕고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과 잠시 함께 있으려고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생각이 바뀐다고 자신을 잃는 것은 아니다. 차이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한 문단이 매끄럽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따라가는 것과는 다르다.

저녁 무렵 고친 안내문을 문 앞에 붙인다. 아직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다음번에는 또 고칠 것이다. 그래도 이제 어떤 사람은 오래된 라디오를 안고 와도 된다는 것을 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이 아는 작은 기술이 이곳에서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안다.

언어가 각자의 마음속 뜻을 다른 사람에게 완벽히 옮겨 놓은 것은 아니다. 언어가 한 일은 그보다 덜 거창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서로 시작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름은 붙였다고 끝이 아니다. 누군가 그 이름을 따라 들어와 새로운 질문을 내놓으면, 우리는 말을 조금 더 가까이 다듬는다.

출처와 읽기 안내

이 글은 해당 SAE 논문을 바탕으로 산문으로 다시 쓴 글이며, 기술적 논증 전체를 문단별로 옮긴 번역이 아닙니다. 이 한국어판은 논증과 예시의 뜻을 살려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일상 장면은 설명을 위해 지어낸 예시입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 AI 사용을 요구하지 않으며, 좋은 제안을 받아들이는 일 자체를 자기 목소리를 잃는 일로 보지도 않습니다.

Attention Is All You Need · §3.4 ↗

바탕이 된 논문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