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받는 일은 괴롭다. 가까운 사람이라면 말하지 못한 이유와 겉으로 드러난 행동 뒤의 사정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너를 알아”라는 말은 대개 위로가 된다. 하지만 그 말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아니까 더 설명할 필요 없어”라는 뜻이 되는 순간, 모른다는 말보다 더 숨 막힐 수 있다.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했는데 “너는 문제를 피할 때마다 그래”라는 답이 돌아온다. 계획을 바꾸고 싶다고 하자 “지금 충동적인 것뿐이야”라고 한다. 새로운 바람을 말해도 예전의 나로 지금의 나를 설명한다. 무엇을 말하든 이미 완성된 이야기 안으로 돌아간다. 이해가 가까이 다가오는 길이 아니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방이 된다.

오래 지켜본 사람의 해석에는 분명 가치가 있다. 압박을 받을 때의 습관, 반복되는 망설임, 과거의 경험이 남긴 흔적을 가까운 사람이 더 잘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편한 이유를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보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과 그 사람을 해석할 권리를 영원히 갖는 것은 다르다.

열린 이해는 “비슷한 상황에서 네가 물러나는 걸 여러 번 봤어. 이번에도 그런 두려움이 있을까?”라고 묻는다. 닫힌 이해는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 지금 네 말은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 앞의 말은 관찰을 내놓고 답을 기다린다. 뒤의 말은 어떤 답도 자기 증거로 바꾼다. 부정하면 방어한다고 하고, 변했다고 하면 아직 자신을 모른다고 한다. 반박될 수 없는 이해는 확인될 수도 없다.

익숙한 사람은 사랑하기 편하다. 반응을 예상할 수 있고,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고, 우리의 계획 안에도 잘 들어온다. 그가 변하면 우리 자리와 미래도 흔들린다. 그래서 “그건 너답지 않아”라는 말로 낯선 변화를 일시적인 이상이라고 처리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과거가 진짜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변화를 인정한다고 과거의 행동과 약속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야”라는 한마디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래된 행동은 여전히 판단의 근거이고, 새로운 설명은 앞으로의 행동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다만 근거가 평생의 판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사람이 과거에 대해 새로운 증거를 만들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한다.

이해받는다는 느낌은 상대가 내 다음 행동을 정확히 맞힌다는 데서 오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면서도 오늘의 말이 그 기억을 수정할 수 있게 해 주는 데서 온다. “나는 네 과거를 가지고 네게 다가가지만, 네가 더 이상 그 모습과 같지 않다면 다시 알아갈게.” 이런 이해는 낯섦을 없애지 않는다. 낯선 부분이 생겼다고 관계가 무너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