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관계는 거절을 금지하지 않는다. “싫으면 안 해도 돼”, “억지로 시키지 않을게”, “결정은 네 몫이야”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싫어”라는 답이 나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이유를 계속 캐묻고, 납득할 만한 설명이 나올 때까지 같은 대화를 반복한다. 거절은 불신이나 무관심의 증거가 되고, 관계의 온도는 내려간다.
말로 존재하는 거절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니’가 가능한 결론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오해가 있을 수 있고, 공동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해야 할 수 있으니 대화가 한 번에 끝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화는 새로운 이유를 듣고 마음을 바꿀 가능성과, 듣고도 거절을 유지할 가능성을 함께 품는다. 한 가지 결론만 대화를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은 소통보다 소진에 가깝다.
거절에는 흔히 충분한 사유가 요구된다. “그냥 원하지 않아”, “지금은 불편해”, “준비가 안 됐어”는 약한 이유로 취급된다. 요구한 사람이 타당하다고 인정해야만 거절이 성립한다. 물론 공동 책임을 바꾸는 거절이라면 설명과 조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설명은 결과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상대가 거절을 취소할 심사권을 갖기 위한 것이 아니다.
관계가 ‘아니’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좋아’를 얼마나 자주 얻는지보다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동의는 진심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버림받을까 봐, 상대를 실망시킬까 봐,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일까 봐 나올 수도 있다. 거절해도 기본적인 존중을 잃지 않을 때에야 동의도 믿을 만한 선택이 된다.
거절을 존중한다고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 가려던 계획이 취소되면 다른 사람이 일정을 바꾸어야 하고, 어떤 친밀함을 원하지 않으면 관계의 모양도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이 낳은 변화와 답을 바꾸게 만들려고 가하는 벌을 구분하는 것이다. “계획이 불가능해져서 나는 다르게 준비할게”와 “네가 마음을 바꿀 때까지 불편하게 만들겠다”는 다르다.
거절이 과거의 약속을 모두 없애 주지도 않는다. 상대가 약속을 믿고 삶을 꾸리게 한 뒤 “이제 싫으니 끝”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책임은 함께 한 합의, 실제로 만들어진 의존, 이미 발생한 결과에서 나온다. 다만 상대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거절이 책임 위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약속했고 누가 무엇을 부담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거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눈앞의 사람이 적절한 방법만 찾으면 결국 동의할 대상이 아님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는 나와 다른 속도와 한계와 방향을 가질 수 있다. 관계는 덜 통제 가능해지지만, 그만큼 ‘좋아’라는 답도 더 믿을 수 있게 된다. 동의만 견딜 수 있는 관계는 두 사람을 견디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의 답만 견디는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