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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장 가는 부분을 찾아보자.
금빛의 긴 형태가 아래로 모여 거의 선 하나가 된다. 더 내려가면 다시 펼쳐져 좁은 원뿔 모양 발이 되고 옅은 색 원기둥에 닿는다. 가장 가는 곳은 땅에 닿지 않는다. 아주 긴 몸이 이 가는 허리 위에 놓여 있다.
시선을 위로 옮기면 형태는 점차 풍만해지고 윗부분에서는 다시 길게 얇아진다. 마지막 끝은 한쪽으로 기울고 곁에는 작은 사면이 있다. 이 길을 수평으로 잘라 끝내는 가로선은 없다. 아래에서 보면 막 일어선 듯하고 꼭대기에 이르면 올라가는 기세가 아직 다하지 않은 듯하다.
미술관 전체 이미지 보기 · 작품 자료 페이지 열기. 이미지 설명: 길고 가는 금빛 새 몸체가 옅은 색의 짧은 원기둥 위에 서 있다. 아래에는 윤곽이 반복해서 오므라들고 펼쳐지는 짙은 갈색 나무 받침이 있다. 사진은 같은 작품을 한 비스듬한 각도에서 온전히 보여 준다.
이 글이 보는 것은 미국 국립미술관 소장 1927년 《공간 속의 새》, 소장품 번호 1989.31.3이다. 새 몸체의 높이는 185.4cm, 받침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287.7cm다. 미술관의 현재 재료란에는 황동, 석회암, 나무로 적혀 있다. 이 특정 판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1923년 대리석 새도 아니고 모든 금빛 《공간 속의 새》에 공통으로 쓰는 표준 이미지도 아니다. 소장품 기록
‘새’라는 제목은 비상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조각이 눈에 먼저 주는 것은 사실 매우 다른 몇 가지 너비와 그사이의 연속적이거나 갑작스러운 전환이다. 상승감은 이 전환들에서 천천히 자라나야 한다.
브랑쿠시는 1923년 《공간 속의 새》 연작을 시작했다. 초기 판본은 대리석이었고 뒤에는 금속과 석고로도 이 주제를 탐구했다. 눈앞의 1927년 작품은 20세기 근대 조각에서 비례와 재료, 단순화한 형태로 비상을 다시 다룬 지속적인 작업의 일부다. 연작 배경
1. 가장 가는 곳에서 두 형태가 만난다
끝에서 땅까지 한 번에 훑으면 금빛 부분을 길쭉한 방추 하나로 보기 쉽다. 밑의 가는 허리에서 멈추면 그 인상이 바뀐다.
허리 위의 두 윤곽은 바깥으로 펼쳐져 주된 부피를 만든다. 아래의 두 윤곽도 밖으로 펼쳐지지만 곧 돌 받침에 닿는다. 위아래 모두 펼쳐지되 그 길이는 크게 다르다. 짧은 부분은 접촉면을 안정시키고 긴 부분은 시선을 높은 곳으로 이끈다. 둘은 최소 너비에서 만나 ‘받침’과 ‘떠남’을 같은 곳에 밀어 넣은 듯하다.
이 때문에 금속과 돌의 접촉은 둔중해 보이지 않는다. 새 몸체는 가장 풍만한 곳으로 받침을 직접 누르지 않으며, 따로 드러난 지지대에 떠받쳐지지도 않는다. 지지는 이미 금빛 윤곽의 변화 안으로 들어왔다. 아래로 모이고 아주 가늘어졌다가 다시 펼쳐진다. 우리는 닿는 자리를 보면서 그 바로 위에서 한 번 떠오르는 것도 본다.
이 가늘기는 무시해도 되는 전환이 아니다. 이미지를 줄이면 가장 가는 곳이 거의 사라지고 위의 긴 형태는 더 떨어진 듯하다. 원래 보던 크기로 돌리면 짧은 발이 다시 선명해지고 떠 있는 듯한 부피가 돌 표면에 다시 연결된다. 두 인상 사이에 신비한 장치는 없다. 너비 차이가 이미 일하고 있다.
주된 부피를 다시 보면 균일한 곧은 막대가 아니다. 사진 왼쪽의 긴 곡선은 더 뚜렷이 부풀고 오른쪽은 더 곧아 보인다. 위아래가 가늘어지는 길이도 다르다. 눈이 한쪽을 따라 올라갔다 다른 쪽으로 내려올 때 완전히 같은 두 길을 걷지는 않는다. 축 방향은 있지만 대칭적인 상징 도안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형태다. 조금 빗나간 끝은 세로 전체에 기울어 가는 방향을 준다.
따라서 상승은 ‘높고 가늘다’는 말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발과 몸의 길이 차이, 허리와 배의 너비 차이, 양쪽 윤곽의 서로 다른 굽음이 함께 이 정물에 뻗어나가는 듯한 모습을 준다.
2. 금빛 표면은 안쪽도 길게 늘인다
윤곽을 다 본 뒤에는 그 안으로 주의를 옮기자.
여기에는 깃털 무늬도, 가슴과 목과 머리를 구간별로 나눈 새김선도 없다. 금빛 표면은 가로로 좁지만 세로로는 긴 명암 띠 몇 줄을 담을 수 있다. 풍만한 곳에서는 갈라지고 가는 허리 가까이에서는 모인다. 얇은 칼날처럼 밝은 줄도 있고 틈처럼 어두운 줄도 있다.
하지만 그 어두운 줄은 새 몸에 새긴 깃대가 아니다. 사진의 강한 반사는 안에 보이는 무늬가 전부 재료 고유의 색과 결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다. 일부는 표면이 주변의 빛과 어둠을 렌즈로 되돌려 보내는 방식에서 나온다. 무엇이 비쳤는지 이 사진으로 하나씩 확정할 수는 없지만 길쭉한 반사의 모양은 이미 분명히 감상에 참여한다.
바깥 윤곽이 금속이 끝나는 곳을 알려 준다면 안의 밝고 어두운 띠는 금속체를 몇 갈래의 세로 흐름으로 나눈다. 눈은 바깥선을 따르기도 하고 밝은 곳에 이끌려 가운데로 가기도 한다. 실체가 차지하는 폭은 작지만 그 안의 명암 전환은 첫눈에 예상한 것보다 많다.
이 점은 ‘매끈함’의 뜻도 바꾼다. 매끈함은 표면을 백지로 만들지 않았다. 촘촘한 새김이 없기 때문에 반사된 긴 선이 유난히 눈에 띈다. 깃털 백 개를 먼저 알아보고 한 마리 새로 합치는 것이 아니다. 시선은 비교적 연속적인 표면에서 이끌리며 긴 거리를 지난다.
아래의 나무 받침에도 광택이 있지만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갈색 곡면의 결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사진에서 옆으로 돌아간 나무 면도 두툼하게 느껴진다. 옅은 색 원기둥의 명암은 천천히 돌아가며 금속처럼 날카로운 밝은 선이 없다. 세 표면이 나란히 나타나기에 금속의 번쩍임이 더 선명하다. 그 경쾌함은 구체적인 이웃 관계에서 나오며 금빛이 본래 갈색보다 가벼워서가 아니다.
검은 실루엣만 남겨도 주된 부피는 여전히 길고 가늘며 잘록한 허리와 끝도 존재한다. 하지만 금속 안의 좁고 긴 명암은 함께 사라진다. 이제 두 층을 구별할 수 있다. 윤곽은 뻗음을 조직하고 표면은 그 뻗음이 덜 굳어 보이게 한다.
3. 받침이 먼저 눈을 몇 걸음 움직인다
이제 금빛 부분은 잠시 내려놓고 나무 받침만 보자.
밑은 넓고 위로 오므라들었다가 다시 밖으로 부푼다. 중간은 두꺼운 원반 같고 위에서는 또 모인다. 맨 위는 다시 펼쳐져 평평한 받침 면을 남긴다. 사진에서 보이는 가장자리는 넓음과 좁음이 번갈아 나오며 두 군데 들어간 곳이 뚜렷한 어둠을 만든다. 세워 놓은 리듬 같으면서 땅에서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이 곡선은 나무줄기나 새 둥지를 흉내 내지 않는다. 보는 일을 곧바로 동작의 연속으로 만든다. 밖으로, 안으로, 다시 밖으로 간다. 시선은 아직 새 몸체에 닿기도 전에 몇 차례 펼침과 모임을 겪는다.
그러나 금빛 부분은 그 박자를 계속 반복하지 않는다. 나무 받침의 짧고 넓은 굴곡 뒤에서 옅은 원기둥이 먼저 작은 쉼을 준다. 옆면은 거의 수직이고 위아래 가장자리도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방금의 활발한 곡면을 잠시 고요한 간격으로 정리한 듯하다. 위로 더 가면 금속의 짧은 발, 가는 허리가 나타나고, 그다음은 나무 받침의 어떤 굴곡보다 훨씬 긴 뻗음이다.
짧은 리듬은 이렇게 긴 호흡에 이어진다. 받침은 위의 길이를 더 길게 보이게 하고 위의 길이는 아래의 반복을 축적처럼 보이게 한다. 나무 받침을 사진을 찍을 때 작품을 높이는 가구로만 보면 이 순서를 놓친다.
이 판단은 거꾸로 점검할 수도 있다. 끝에서 아래를 보자. 긴 펼침과 모임을 지나 시선은 허리에서 느려지고 짧은 발과 옅은 원기둥을 만나 나무 받침의 더 넓은 곡면으로 떨어진다. 방금 계속 위로 향하던 형태에 이제 차츰 거두어들일 자리가 생긴다. 받침은 출발과 돌아옴을 함께 준다.
따라서 조각의 경계는 여기서 금빛 부분의 경계와 같지 않다. 금속과 옅은 돌, 짙은 나무 사이에는 재료의 분명한 구분이 있지만, 위는 예술을 맡고 아래는 서 있기만 맡는 식의 단순한 감상 분담은 없다. 각 구간이 다음 구간을 보는 방식을 바꾼다.
4. 화면 속 선 하나는 실제로 얼마나 높은가
사진은 작품 전체를 옅은 회색 배경 앞에 놓는다. 주변에는 사람도, 비교할 문이나 창도 없다. 탁자 위의 작은 물건으로 상상하기 쉽다. 제목과 금빛, 매끈한 외관은 트로피나 섬세한 장식품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크기는 그 상상을 넓힌다.
새 몸체만 해도 많은 성인의 키보다 크며 받침을 합치면 전체는 2.9m에 가깝다. 사진에서는 한 번에 훑을 듯한 세로를 실물 크기로 생각하면 낮은 곳에서 머리 위까지 뻗는다. 작은 장신구를 집듯 상상 속에서 크기를 쉽게 통제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높이가 우리가 어떻게 고개를 들지 정하기 시작한다.
사진이 곁에 서는 일을 대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진은 시점과 조명, 거리를 고정하고 삼차원의 부피를 길쭉한 모양으로 압축한다. 그래도 크기를 기억하면 이미지의 여백을 새로 이해할 수 있다. 새 몸 양옆의 넓은 빈 곳은 아주 좁은 실체가 상당한 높이 범위에서 주변을 어떻게 가르는지 상상하도록 돕는다.
넓은 날개를 뻗어 공간을 채우지 않는다. 주변 대부분은 비어 있지만 눈은 긴 형태를 따라 올라가고 그 상승에 이끌려 꼭대기 바깥의 여백으로 간다. 차지하는 면적과 주의를 이끄는 범위가 똑같이 넓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끝이 특히 중요하다. 굵은 기둥이 갑자기 잘린 것이 아니다. 양쪽은 가까워지며 점차 좁아졌고 꼭대기의 작은 사면이 마지막 끝맺음을 준다. 재료가 거기서 실제로 멈추는 것을 보면서도 앞서 세워진 방향을 조금 더 위로 이을 수 있다. 형태는 유한하지만 시선은 마침 그 가장자리 바깥으로 이끌린다.
5. 한 주제를 거듭 새로 만들기
브랑쿠시는 연작을 이어 가며 고정된 모양 하나에 멈추지 않았다. MoMA의 연구는 연작의 금속 새들이 크기가 완전히 같은 반복품이 아니며 비례를 다시 조정하는 일이 창작 자체에 속한다고 특히 설명한다. MoMA 전시 설명문, PDF 2쪽
가는 허리와 반사, 받침을 보고 나면 비례의 변화가 무엇을 건드릴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허리를 더 높이면 주된 부피는 다른 곳에서 시작하는 듯할 것이다. 가장 넓은 곳을 위로 옮기면 상승 전의 부풂은 늦어질 것이다. 나무 받침과 새 몸체의 길이 관계를 바꾸면 ‘짧은 리듬이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달라질 것이다. 이는 감상에서 제안할 수 있는 비교이지 작가가 실제로 이 구체적인 안들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아니다. ‘새를 거듭 만든다’는 일이 같은 개념을 반복해서 고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대신하기 어려운 관계들을 계속 다루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브랑쿠시는 동물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일 밖으로 조각의 작업을 옮겼다. 몸을 항목마다 기술하지 않아도 풍만함과 모임, 방향과 닿는 자리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세부를 없애면 남은 비례가 더 많은 일을 맡아야 한다. 단순화가 조각의 난제를 자동으로 줄이는 것은 아니다.
처음의 가는 허리를 다시 보면 이제 혼자가 아니다. 아래에는 나무 받침의 펼침과 모임, 원기둥의 쉼이 있고 위에는 풍만한 부피와 길고 가는 반사, 차츰 모여 끝나는 첨단이 있다. 우리는 정물 앞에서 근거 없이 비상을 믿는 것이 아니다. 정물이 위로 향하는 한 과정을 충분히 구체적으로 마련하는 방식을 본다.
작품은 줄곧 서 있다. 상승은 바로 그 서 있는 방식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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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몸의 중간으로 돌아오면 가는 밝은 띠만으로도 표면이 매끈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광택 낸 금속’이라는 말로 거두어 버리면 실제로 드러나는 방식을 놓친다. 넓은 밝은 곳은 아래로 좁아지고 옆의 어두운 띠는 그 좁음을 더 날카롭게 한다. 같은 실체 안에서 나란히 가면서도 바깥 윤곽을 완전히 따르지는 않는다.
이 광선이 더 여는 것은 표면과 감상 조건 사이의 관계다. 광택을 전부 조각가가 새겨 넣은 특징으로 돌릴 필요도 없고, 조명의 영향을 받는다고 우연한 방해로 여길 필요도 없다. 사진 속 반사는 작품이 모든 환경에서 갖는 고정된 모습과 같지 않지만 이 매끈한 형태가 실제로 드러낼 수 있는 한 모습이다. 고정된 윤곽과 환경에 의존하는 명암이 여기서 서로를 지지한다.
관객에게 반드시 감탄해야 한다고 정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는 너무 눈부시다고 느끼거나 나무 받침의 어두운 갈색을 더 좋아할 수 있다. 그래도 세 표면이 어떻게 구분되고 세로로 이어지는지 정확히 짚을 수 있다. 지각의 선명함을 위해 같은 광택을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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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광선 에세이 《그 음이 아직 울리지 않았는데 이미 기다리고 있다》는 다른 일을 논한다. 기억은 눈앞의 기대에 참여하며 기대는 실제와 만날 때 조정된다. 익숙한 선율은 다음 음을 미리 기다리게 하고, 예상과 어긋나는 일은 되돌아가 확인하게 한다. 아홉 번째 광선 에세이, 영어로 읽기
이 조각 앞에서는 작은 감상 연습을 할 수 있다. 나무 받침 밑에서 올라가 두 번의 뚜렷한 좁아짐을 차례로 본 다음 돌 원기둥과 금속의 짧은 발을 보자. 새 몸체에 이르면 곧 다시 모일 것을 여전히 기다리는지 살펴보자. 실제로 만나는 것은 길게 이어지는 펼침이며 훨씬 높은 곳에 가서야 천천히 뾰족해진다. 방금 지나온 짧은 리듬이 이 긴 형태의 느낌에 참여하고 있을 수 있다.
이는 조각을 일정한 속도의 음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에서는 눈이 자유롭게 건너뛸 수 있고 모든 사람이 같은 곳에서 굴곡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핵심은 구체적인 왕복 하나를 지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본 짧은 구간은 현재의 긴 구간을 가늠하는 데 계속 도움이 되고, 꼭대기를 본 뒤 받침을 돌아보면 아래의 반복은 더 응축되어 보인다.
나무 받침에서 한 번 더 올라가자. 원기둥은 잠깐의 안정을 주고 가는 허리는 폭을 조이며 이어 금속 안의 밝은 띠가 시선을 길게 당긴다. 아래에서 지나온 몇 번의 굴곡은 위의 긴 형태를 느끼는 데 아직 남아 있다. 마지막에 전체를 한눈에 담더라도 그 길의 길고 짧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지와 자료 안내
이 글은 NGA의 같은 1927년 작품에 대한 미술관 전체 사진 한 장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읽었다. 각도와 표면에 대한 판단은 그 이미지에 한정한다. 원본은 527×900픽셀이며 확대해도 원래 세부 정보가 늘어나지 않는다. 온라인 보기가 재배포 허가를 뜻하지는 않는다.
재료는 소장품 재료란에 따라 황동과 석회암, 나무로 썼다. 같은 페이지의 음성 해설과 크기 항목에서 쓰인 용어 차이는 참고 자료에 자세히 정리했다. 사진으로 숨은 연결이나 돌 받침의 제작 기법을 판단하지 않았다. 형태 분석과 SAE 적용은 이미지를 대조하며 논의할 수 있는 읽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