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얼굴을 보고, 그다음에는 얼굴에 바짝 붙어 있는 것들을 살펴보자. 이마에는 밝은 면이 넓게 펼쳐지고, 볼의 밝고 어두운 부분은 서서히 이어진다. 그런데 양옆의 곱슬머리에서는 가느다란 빛의 선이 끊임없이 원을 그린다. 그보다 바깥에서는 식물의 바늘잎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하나씩 셀 수 있을 듯한 세부가 있는가 하면, 어디가 경계인지 거의 알 수 없는 곳도 있다. 서로 다른 세 가지 묘사가 나란히 놓이면서, 움직임 없는 얼굴은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여인 뒤의 주니퍼, 곧 서양노간주나무를 기억해 두자. 같은 목판을 뒤집으면 이 식물이 다시 나타난다. 다만 크기도, 자리도, 하는 일도 달라진다. 이 글은 그 변화를 따라가려 한다. 한 사람의 얼굴을 눈앞에 보여 주는 초상화가, 어떻게 그 사람의 이름과 찬사를 읽을 수 있는 이미지로 함께 만드는가. 얼굴과 이름과 찬사는 서로 이어져 있지만, 서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이 글에서 제안하는 읽기이며, 다빈치의 제작 의도를 확정하는 설명은 아니다.
이 그림은 젊은 다빈치가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시기인 1474–1478년경에 그려졌다. 15세기 피렌체의 여성 초상화에서는 옆모습이 흔했지만, 여기서는 얼굴이 우리 쪽으로 돌아온다. 옆얼굴에서 4분의 3 각도의 얼굴로 바뀌는 것은 자세만의 변화가 아니다. 얼굴의 부피감과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달라진다. NGA 작품 안내
바늘잎 사이에서 얼굴이 드러나는 방식
그림의 높이는 40 cm도 되지 않는다. 화면에서 확대한 이미지를 보면 여인이 실제 사람만 한 크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원작의 크기로 돌아가면 속눈썹, 입꼬리, 곱슬머리가 차지하는 자리는 모두 아주 작다. 다빈치는 커다란 몸짓으로 시선을 끌지 않는다. 그가 우리의 주의를 모으는 곳은 이런 작은 차이들이다.
몸은 화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향하고, 얼굴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 있다. 그렇다고 얼굴이 완전히 정면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양쪽 눈과 볼이 드러나는 폭은 서로 다르고, 코도 조금 돌아가 있으며, 턱 아래의 그늘은 머리를 목에서 도드라지게 한다. 옆모습에서는 뚜렷한 외곽선이 얼굴을 이루지만, 여기의 4분의 3 각도에서는 얼굴 안쪽의 굴곡이 시선을 붙든다. 이마가 관자놀이 쪽으로 물러나는 모습이나 콧등에서 눈 주위의 움푹한 곳으로 이어지며 어두워지는 변화는 바깥 윤곽선이 아니라 명암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NGA 작품 안내

콧등 옆의 회색을 보자. 따로 붙여 놓은 한 줄의 그림자가 아니다. 조금씩 짙어지다가 눈 주위의 움푹한 곳에 드리운 어둠으로 이어진다. 위아래 입술 사이에는 비교적 분명한 어두운 선이 있지만, 아랫입술 밑의 그림자는 훨씬 부드럽다. 눈도 같은 굵기와 농도의 선으로 한 바퀴 둘러져 있지 않다. 위 눈꺼풀은 뚜렷하고, 아래쪽 경계는 훨씬 옅다. 눈이나 입이라는 한 부분 안에서도 선명한 정도가 달라진다. 여기서 섬세하다는 것은 어느 경계를 약하게 해야 하는지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곱슬머리는 다른 일을 한다. 짙은 갈색 속에서 밝은 선이 맴돌며,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 어떤 머리카락은 큰 머리 타래에서 빠져나와 얼굴 가까이 살며시 뻗어 있다. 배경의 바늘잎도 빽빽하지만, 이쪽은 거듭 바깥으로 방향을 이끈다. 둥글게 감기는 형태와 사방으로 뻗는 형태가 이웃하기 때문에, 무늬가 적은 볼의 밝은 면은 더 고요하게 느껴진다. 눈과 코와 입만 잘라 내도 인물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 형태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고요함은 약해질 것이다.
입은 다물어져 있고, 입꼬리는 뚜렷하게 올라가 있지 않다. 눈꺼풀이 눈동자를 조금 덮고 있으며 시선은 이쪽으로 향하지만, 누구와 눈을 맞추는 중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거리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은 침착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느낌에는 화면에서 짚을 수 있는 출발점이 있다. 그렇다고 그림이 확인 가능한 속마음의 독백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다. 얼굴의 구조를 잘 볼 수 있어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여전히 모를 수 있다. 정확히 묘사된 외모와 선뜻 단정할 수 없는 속마음이 한 그림 안에 함께 있는 것이다.
옷에도 조금 더 눈을 두어 보자. 네모나게 파인 목둘레를 좁은 금빛 테두리가 두르고, 푸른 끈은 작은 금색 고리들을 차례로 통과한다. 가슴 위의 얇은 베일은 비스듬한 가는 선, 약한 명암, 작은 금빛 고정 장식 덕분에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보석을 겹겹이 늘어놓은 화려함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장식도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얼핏 차분해 보이는 옷에도 자세히 보면 재료와 손길의 차이가 겹쳐 있다. 이 사람이 구체적인 한 사람으로 느껴지는 데에는 이런 세부도 한몫한다.
오른쪽에는 아직 세계가 열려 있다
주니퍼는 머리 주변의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어둠으로 얼굴을 감싸는 듯하다. 하지만 화면 전체를 막아 버리지는 않는다. 오른쪽 곱슬머리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나무줄기와 수면을 만나고, 그 너머로 갈수록 옅어지는 푸른 형태를 만난다.

가까운 나무의 가는 줄기는 물속으로 아래까지 이어져 보인다. 물에 비친 그 모습을 가로로 그은 밝은 붓자국들이 끊어 놓는다. 물가의 비탈은 비스듬히 솟고, 먼 곳에서는 꼭대기가 뾰족한 건물 몇 채가 청회색 사이로 드러난다. 아주 작지만, 공간이 나무 바로 뒤에서 끝나지 않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시선은 여러 겹의 가림을 지나, 가지와 잎을 구별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대략적인 형태만 알아볼 수 있는 먼 곳으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길을 서둘러 가는 인물도 없고, 풍경 속에서 계속되는 이야기도 없다. 풍경이 하는 일은 오히려 숨을 한 번 쉬는 것에 가깝다. 어두운 배경 덕분에 얼굴은 가까이 다가오지만, 세계는 여전히 뒤로 펼쳐질 수 있다. 사람과 환경에는 서로 다른 거리와 선명함이 주어진다. 탑을 하나씩 알아맞히지 않아도, 여인이 공간 없는 바탕색 위에 떠 있는 것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눈앞의 갈색 잎은 쉽게 가을을 떠올리게 하고, 창백해 보이는 얼굴은 병약함이나 우울함을 추측하게 한다. 하지만 이 색들 자체에도 역사가 있다. 기술 조사에 따르면 중경의 나무와 비탈에 쓰인 구리계 녹색 안료는 갈색으로 변했고, 얼굴의 적색 레이크 안료도 퇴색했다. 오늘의 색은 우리가 실제로 보는 출발점이지만, 곧바로 15세기 제작 당시의 효과와 같다고 여길 수는 없다. 더구나 그 색만으로 한 사람의 건강이나 기분을 판단할 수는 없다. 안료와 밑층 조사; 색 변화 연구
같은 기술 조사는 주니퍼와 하늘 사이의 경계가 조정되었다는 사실도 보여 준다. 어떤 가지와 잎은 나중에 칠한 하늘 때문에 폭이 줄었고, 다른 것들은 하늘 위로 다시 뻗어 나갔다. 자연스럽게 자란 듯한 나무도 실은 그리는 과정에서 배치와 모양을 다듬은 것이다. 앞면을 다시 보면 주니퍼는 바늘잎과 깊이를 지닌 식물인 동시에, 얼굴이 어떻게 드러나고 원경이 어디에서 열릴지를 결정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뒤집으면 주니퍼의 자리가 달라진다

사람이 사라졌다. 앞면에서 하나로 이어지던 밝은 면 대신 짙은 붉은색의 반점 바탕이 나타나고, 식물은 가지마다 따로 놓인다. 왼쪽에서는 비교적 넓은 잎이 가지를 따라 펼쳐지고, 오른쪽에서는 가늘고 긴 잎이 촘촘히 늘어선다. 두 가지는 위에서 교차하며 한 자리를 둘러싸는 듯하다. 가운데 주니퍼는 상대적으로 가늘어, 바늘잎을 한 무리씩 따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배경은 보통 붉은 반암을 본뜬 무늬로 설명된다. 앞면의 하늘과 수면은 없으며, 시선을 더 먼 곳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돌을 흉내 낸 표면 앞에서 잎과 가지가 펼쳐지고, 전체 배치는 일종의 상징 문양에 가까워진다. 아직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더라도 보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앞면에서는 식물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뒷면에서는 식물 자체가 알아보아야 할 중심이 된다. 2001년 전시 도록
주니퍼의 이탈리아어 이름은 ginepro이며, Ginevra라는 이름과 소리가 닿는다. 작품 속 식물의 단서와 오래된 문헌이 함께 인물의 신원 확인을 뒷받침하는 것이지, 그림에 여인의 성명이 쓰여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피렌체 여성은 1457년에 태어났고, 1474년 열여섯 살에 루이지 니콜리니와 결혼했다. 따라서 결혼을 기념한 초상이라는 해석은 중요하다. 다만 누가 왜 주문했는지를 두고 다른 가능성까지 모두 배제한 결론은 아니다. NGA 소장품 해설; 2001년 도록 작품 항목 16
이름과의 연결을 알고 앞면으로 돌아오면, 주니퍼는 더 이상 보기 좋은 배경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렇다고 본래 그림에서 하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무는 여전히 뒤를 가리고, 어둠으로 얼굴을 받쳐 주며, 푸른 하늘 쪽으로 바늘잎을 뻗는다. 앞면에서는 이름을 암시하는 식물이 환경 속에 들어가 살고, 뒷면에서는 그 암시가 따로 꺼내어져 가지와 잎이 감싼 가운데 놓인다. 같은 식물이 한 사람이 자리한 공간의 일부가 되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대신 불러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순수한 자연’에서 ‘순수한 기호’로 옮겨 가는 과정이 아니다. 앞면의 환경에는 이미 이름이 담겨 있고, 뒷면의 상징 문양도 여전히 정성 들여 그린 식물이다. 차이는 배치에 있다. 한쪽에서는 먼저 얼굴을 만나고 나중에 암시를 알아본다. 다른 쪽에서는 암시들이 한데 모여,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말하려 한다.
찬사의 문장이 그림이 되는 방식
띠에는 VIRTVTEM FOR / MA DECORAT라고 적혀 있다. 이어 붙여 일반적인 철자로 쓰면 VIRTUTEM FORMA DECORAT이며, ‘아름다움은 덕을 장식한다’라고 옮길 수 있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주어이고, ‘덕’은 장식되는 대상이다. 아름다운 외모 자체가 덕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과 칭찬받을 만한 내면의 자질을 한 문장 안에 놓는다.

이 문장은 오늘날의 전시 설명문처럼 옆에 평평하게 붙어 있지 않다. 띠는 왼쪽에서 뻗어 나오다가 가운데에서 접혀 돌아가고, 다음 부분은 오른쪽 위로 올라간다. 글자도 그 곡선을 따라 움직인다. FORMA를 끝까지 읽으려면 윗부분의 끝에서 다음 부분의 처음으로 시선을 이어야 한다. 눈은 뜻을 읽는 동시에 한 사물의 굴곡을 따라간다. 띠의 안쪽은 어두워지고, 말린 끝에서는 얇은 층이 드러난다. 평면적인 글자가 이렇게 작은 입체의 움직임 속에 들어간다.
미술관의 해석에 따르면 양옆의 월계수와 종려는 지적·도덕적 덕과 관련되며, 베네치아 외교관 베르나르도 벰보의 개인 상징 문양에도 나타난다. 더 구체적인 단서는 지금 보이는 문구 아래에 숨어 있다. 적외선 조사에서 벰보와 관련된 ‘덕과 명예’라는 표어가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뒷면의 제작은 그가 주문했을 가능성이 높다. 앞면까지 그가 주문했는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뒷면 연구 해설
벰보와 지네브라의 관계는 대체로 인문주의적 시문을 통한 찬양과 정신적 연모라는 맥락에서 논의된다. 이렇게 보면 뒷면은 추상적인 식물 장식보다, 실제 교류를 배경으로 한 찬사에 가까워진다. 결혼 기념과 친구의 찬양도 반드시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앞뒤가 서로 다른 단계에서 완성되었다는 설명도 연구에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해석일 뿐, 주문의 경위를 입증할 계약서를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시문을 주고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체적인 육체적 연애 관계를 입증할 수도 없다. 2001년 도록의 논의
이제 ‘아름다움은 덕을 장식한다’를 다시 읽으면, 그 안의 사회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이는 그녀를 어떤 말로 칭찬할 것인가에 관한 문장이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품성 안에 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찬사가 무엇을 두드러지게 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은 채 남기는지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곧바로 여인 자신의 자기소개로 받아들이거나, 이 한 문장만으로 그 가치관에 본인이 동의했는지 판단할 수는 없다.
이 글은 앞뒷면 사이의 거리를 남겨 두려 한다. 뒷면에는 이름의 암시와 덕의 표지, 질서 있게 다듬은 찬사가 있다. 앞면에는 여전히 살짝 돌아간 얼굴, 다문 입술, 부드러운 명암을 지닌 구체적인 한 사람이 있다. 찬사는 당시 누군가가 그녀를 어떻게 말할 수 있었는지 알려 준다. 얼굴은 그 문장으로 전부 대신할 수 없는 한 사람을 계속 보게 한다. 양쪽 모두 공들여 구성한 이미지이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남겨 놓았다.
잘려 나간 아래쪽으로 돌아오기
이제 두 전체 이미지의 아래 가장자리를 다시 보자. 앞면에서는 옷과 끈이 중간에서 잘리고, 뒷면에서도 가지가 아래쪽에서 끊어진다. 뒷면 중앙 아래에는 불규칙한 갈색 영역도 있다. 이 작품은 하단이 잘려 나갔다. 오늘날의 거의 정사각형인 구도, 얼굴에 바짝 다가선 듯한 구도에는 이런 물질적 변화의 결과가 포함되어 있다. 그 거리 전체를 다빈치가 처음부터 선택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잃어버린 부분에는 두 손이 그려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널리 알려진 복원안에서는 다빈치의 손 습작 한 장을 이 초상과 연결한다. 하지만 그 소묘를 소장한 영국 왕실 컬렉션은 현재 제작 시기를 1490년경으로 잡고, 양식이 이 초상보다 늦다고 판단한다. 또 《흰담비를 안은 여인》의 초기 구상과 관련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종이에는 두 손을 포갠 자세를 두 차례 탐색한 모습이 있으며, 위아래 위치까지 확정된 한 쌍의 손을 완성형으로 그려 놓은 것이 아니다. 원래 그림이 잘렸다는 데에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어느 복원도가 손의 자리와 들고 있던 물건까지 정확히 되찾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영국 왕실 컬렉션 RCIN 912558
이 사실을 알면 상상에도 적절한 범위를 둘 수 있다. 원작에 손이 포함되었다면, 얼굴과 손짓 사이에는 지금 볼 수 없는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임의로 꽃 한 송이를 골라, 사라진 동작의 의미를 대신 완성할 수는 없다. 미술관이 별도로 적은 42.7×37 cm는 아래에 후대에 덧댄 나무 조각까지 포함한 크기이며, 잘리기 전 원작의 높이가 아니다. 뒷면 오른쪽 위의 붉은 봉랍 인장 역시 후대의 소장 이력에서 비롯되었고, 1733년의 리히텐슈타인 컬렉션 기록과 관련된다. 다빈치가 구성한 식물과 문구의 일부가 아니다. 크기와 소장 이력
이런 변화 때문에 오늘의 감상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마주하고 있는지 더 분명해진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이미지를 구성한 그림이자, 잘림과 변색을 겪고 여러 소장처를 거쳐 온 물건이다. 작품이 허락하는 가까움은 실제다. 다만 아무것도 빠지지 않은 15세기로 그대로 돌아가는 경험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앞뒷면을 번갈아 보자. 화면에서는 둘을 나란히 놓을 수 있지만, 실제 작품은 한 장의 목판이어서 뒤집어야 반대편이 보인다. 얼굴이 잠시 사라지면 우리는 그 얼굴을 기억한 채 찬사의 문장을 읽는다. 다시 얼굴로 돌아왔을 때 식물에는 이미 이름의 의미가 더해져 있다. 그래도 입꼬리나 시선이 더 쉽게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작은 그림을 자꾸 돌아보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주니퍼는 얼굴과 이름과 찬사를 연결하지만, 모두를 하나의 답으로 압축하지 않는다. 아는 것이 늘어나도 우리는 그 얼굴을 다시 보아야 한다. 여인이 구체적인 한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은 초상이 누군가를 닮았느냐에만 달려 있지 않다. 다시 볼 때마다 차이가 발견되고, 여전히 머물러 볼 만한 그림 속 관계에서도 그 느낌이 생겨난다.
선택해서 읽기 SAE로 앞뒤를 다시 오가기
앞의 세밀한 감상은 여기서 마쳐도 된다. 아래에서는 SAE(Self-as-an-End) 미학을 빌려 방금의 감상을 한 걸음 더 이어 가려 한다. SAE는 개인이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는가와 판단에서 함께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구분한다. ‘광선’은 질문을 향하는 방향이며, 작품을 분류하거나 등급을 매기는 잣대가 아니다. 여기서 도움이 되는 것은 먼저 눈앞에 드러나는 것을 구별하고, 그다음에는 기억이 다음 감상에 어떻게 들어오는지 살피는 일이다. SAE 미학 총론
‘주니퍼’, ‘덕’, ‘지네브라’라는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그림 2만 보자. 볼의 밝고 어두운 부분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밝은 선은 어떻게 곱슬머리로 감기고, 바늘잎은 어떻게 바깥으로 뻗는가. 인물의 신원을 확인하거나 성격을 짐작하는 데 쓰기 전에도 우리는 세 가지 다른 형태를 느낄 수 있다. SAE의 지각이라는 방향은 눈앞에 나타난 것에 그 자체의 모습이 있음을 일깨운다. 유용하거나 즐겁다는 사실을 먼저 증명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바라볼 만하다. 여기서 자신의 표현도 점검할 수 있다. 얼굴이 ‘차갑다’고 느낄 때, 말하는 것은 색조와 경계와 표정인가. 아니면 이미 어떤 성격을 끌어들인 것인가. 지각의 아름다움
다음에는 뒷면만 보고, 조금 뒤 앞면으로 돌아오자. 이미 알게 된 ginepro와 Ginevra의 연결 때문에 시선이 전보다 일찍 나무로 향하는가. 그렇다면 앞서 배운 것이 다음 감상에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지식이 만든 기대는 빗나갈 수도 있다. 상징 문양을 이해하면 표정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얼굴로 돌아와 보니 여전히 알 수 없음을 깨닫기도 한다. 기억한 것이 눈앞의 장면으로 향하고, 눈앞의 세부는 다시 기대를 수정하게 한다. 여기서 인지의 방향을 따라 살필 수 있는 것은 그 관계다. 유래를 하나 더 외우는 일 자체가 결론은 아니다. 인지의 아름다움
마찬가지로 안료의 변색과 하단의 잘림을 알고 나면, 현재의 이미지는 과거를 지닌 채 눈앞에 나타난다. SAE의 인과라는 방향은 일어난 일이 그 뒤의 사물 안에 어떻게 남는지에 관심을 둔다. 손상을 좋아하라고 요구하지 않으며,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아름답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 있다. 어느 부분의 끊김이 사라진 부분을 의식하게 하는가. 지금의 색 가운데, 눈으로만 역사를 추측할 것이 아니라 연구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과의 아름다움
이 질문들은 모두 같은 작품으로 돌아오지만, 살피는 관계는 각각 다르다. 눈앞의 얼굴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기억한 상징 문양은 다음 시선을 어떻게 바꾸는가. 작품의 과거는 현재의 이미지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이론이 돕는 것은 이런 관계를 구별하는 일이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으며 어떤 근거로 판단하는지 짚을 수 있다면, 더 구체적인 질문을 가지고 그림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미지와 자료에 관하여
이 글의 독자적인 시각적 묘사는 미국 국립미술관의 공식 이미지인 앞면 3971×4096픽셀, 뒷면 3942×4096픽셀을 관찰한 데 근거한다. 두 전체 이미지는 내려받은 파일 그대로이며, 세 부분 이미지는 픽셀 좌표에 따라 잘라 내기만 했다. 색 보정, 선명화, 복원, 덧그리기, 생성형 작업을 통한 내용 추가는 하지 않았다. 디지털 복제 이미지의 표시 조건은 원작을 보는 조건과 다르다.
두 소장품 이미지에는 미술관의 CC0 공개 정책이 적용된다. 이미지의 공개 이용 허락이 연구 글, 기술 조사 도판, 현대의 복원도에도 같은 이용 허락이 적용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 패키지에는 참고한 원전 PDF나 복원도를 넣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과 논쟁점은 본문에 연결한 자료에 근거하며, 이 글의 감상과 해석이 미술관의 지지나 승인을 뜻하지는 않는다. 참고 자료와 이미지 출처 및 이용 안내도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