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오른쪽의 짙은 파랑을 보자. 화면 중간에서 아래쪽 끝 가까이까지 넓게 자리 잡고, 거기서 굵은 팔 하나가 왼쪽으로 뻗어 나온다. 밝은 옷을 입은 여성과 아이는 그 너머에 있다. 노를 젓는 남자의 등이라는 것을 알아보아도 시야가 곧 트이지는 않는다. 그 큰 몸은 여전히 우리 앞을 차지한다. 모자 아래로는 옆얼굴 일부만 보인다. 표정을 읽기도 전에, 아주 가까이에 누군가 앉아 있다는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손을 따라 왼쪽 아래로 눈을 옮기면 황록색 노가 비스듬히 이어져, 시선을 배 안으로 이끈다.

커샛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미국 화가로, 1879년부터 1886년 사이 네 차례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했다. 극장과 나들이, 아이를 돌보는 장면 등에서 당대의 일상을 살폈다. 《뱃놀이》는 프랑스 남부 앙티브에서 지낸 경험과 연결된다. 미술관이 1970년에 발행한 도록에는 커샛이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며 이 그림을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화가의 배경; 체류지 기록, 인쇄본 16쪽과 28쪽
이 글은 가까운 곳을 가로막는 등에서 시작해 그림을 읽으려 한다. 커샛은 바다 위 나들이를, 몇 사람이 한정된 공간을 함께 쓰는 구체적인 상황으로 그린다. 아이를 안고, 노를 쥐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는 동작은 저마다 방향이 다르지만 모두 같은 작은 배 안에 들어가야 한다. 밝은 색 속에서도 몸은 무게를 잃지 않는다. 이 그림의 친밀함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자리를 내주고, 그 곁에 자기 몸을 놓아야 한다는 무게가 담겨 있다.
1 등이 먼저 자리를 차지한다
그림의 가로 폭은 1미터가 넘는다. 원작 크기를 떠올리면 오른쪽 남자의 몸이 얼마나 큰 존재감을 지니는지 알 수 있다. 풍경에 작게 덧붙여진 인물과는 다르다. 어깨가 넓게 벌어지고, 상체는 앞으로 기울며, 허리에는 조금 밝은 푸른 띠가 둘려 있다. 그 아래 몸은 왼쪽 아래로 펼쳐진다. 이렇게 방향이 바뀌는 지점을 따라가다 보면, 앉아 있으면서도 힘을 쓰는 자세가 드러난다.
등은 아무 차이도 없는 검은 그림자가 아니다. 소매에는 팔의 방향을 따라 푸른 붓질이 이어지고, 어깨와 등 한가운데의 파랑은 짙기가 다르며, 허리띠는 위아래를 나눈다. 다만 색조가 서로 비슷해서 조금 떨어져 보면 하나의 묵직한 형태로 모인다. 맞은편 여성의 옷은 분홍빛 선들로 잘게 나뉘고, 아이의 옷은 밝은 분홍색 덩어리를 이룬다. 그 곁에서 남자의 몸은 좀처럼 나뉘지 않는 커다란 한 덩어리처럼 다가온다.

인물화를 볼 때는 대개 얼굴부터 찾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크게 그려진 사람은 등을 돌리고 있다. 얼굴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귀와 콧날, 뺨은 보이지만 눈매는 모자챙 아래에 가려 있다. 표정을 살피려고 하면 넓은 등이 다시 눈길을 붙든다. 장면 안의 한 사람을 알아보는 일과, 바로 앞의 거대한 형태를 보는 일이 번갈아 일어나는 것이다.
아이와 비교하면 이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 아이의 얼굴은 화면 정중앙에 있지는 않지만, 밝은 모자와 분홍 옷에 둘러싸여 쉽게 눈에 들어온다. 남자의 얼굴은 그보다 큰데도 방향과 어둠 때문에 읽기 어렵다. 크기와 밝기, 중요성이 언제나 같은 순서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먼저 보았더라도 남자가 부수적인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보고 있는가. 가까운 쪽의 배는 화면 아래 가장자리에 잘려 있고, 오른쪽에도 남자의 옆으로 돌아갈 만한 넉넉한 틈은 없다. 한편 우리는 배 안을 조금 내려다본다. 다리와 가로대, 바닥 일부가 보일 만큼이다. 같은 배에 탄 사람 바로 곁까지 다가온 느낌이 들지만, 그림만 보고 관람자의 좌석을 정확히 정할 수는 없다. 커샛은 화면 한가운데를 우리를 위해 비워 두지 않았다. 이미 몸과 동작이 들어차 있는 곳에, 보는 사람이 자신의 몸 감각을 맞추어야 한다.
2 노를 쥔 손 곁에서 아이를 안는다
뻗은 팔을 따라가면 화면 가운데쯤에서 노를 쥔 손에 닿는다. 황록색 노는 왼쪽 아래로 기울어 흰 뱃전을 가로지르고, 그 너머로 화면 밖까지 이어진다. 아래에는 거의 수평으로 놓인 황록색 가로대가 따로 있다. 색이 비슷해서 처음에는 둘 다 배를 두르는 장식처럼 연결되어 보일 수 있다. 노와 가로대를 구별하고 나면, 비교적 안정된 구조를 가로지르는 사선의 움직임이 보인다.
노는 배를 움직이는 도구이면서, 그림을 보는 눈의 방향도 바꾸어 놓는다. 화면에서 상당한 폭을 차지하고, 윗변에는 더 밝은 색이 나 있어 윤곽이 선명하다. 물과 뱃전, 치마 가까운 공간을 비스듬히 가르며, 높이 올라간 끝에서는 남자의 손과 만난다. 손목에는 짙은 소매가 바로 이어진다. 천에서 피부로, 피부에서 나무로 넘어가는 작은 자리에 명암의 변화가 모인다. 손이 무엇을 어떻게 쥐는지, 그 구체성이 이런 맞닿음에서 살아난다.

그 손 바로 가까이에서는 또 다른 동작이 이어진다. 여성은 아이의 몸을 받치고 있다. 연한 푸른 소매가 아이의 앞을 가로지르고, 반대편에서는 손이 작은 몸을 받아 준다. 아이는 비스듬히 기대어 머리를 화면 오른쪽으로 기울였고, 한 손은 여성의 소매 위에 놓았다. 아래로 늘어진 다리 끝의 갈색 신발 두 짝은 높이가 서로 다르다. 이 작은 어긋남에서도 여성의 팔에 받쳐진 작은 몸의 무게가 느껴진다.
안고 있는 모습을 조금 더 보자. 여성의 상체는 비교적 곧지만, 아이가 그 몸을 따라 수직으로 반듯하게 앉은 것은 아니다. 옆으로 기우는 몸을 받치려면 팔을 가로질러 두고 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얼굴은 조용해 보여도 팔은 계속 일하고 있다. 여성에게 어떤 감정이 있는지 먼저 정하지 않아도, 아이를 안는 일이 지속적인 몸의 조정이라는 점은 볼 수 있다.
노를 젓는 동작과 아이를 안는 동작은 하나로 합쳐지지 않은 채 바짝 붙어 있다. 남자의 손은 앞에, 여성의 소매와 아이의 분홍 옷은 뒤에 놓인다. 윤곽들이 거의 맞닿을 듯 가까이 모여 있다. 노는 아이의 다리 곁을 차지하고, 작은 신발은 뱃전에 가깝다. 일상의 나들이는 이런 세부의 간격을 통해 자리를 잡는다. 인물들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친밀한 소재를 다루기 때문만이 아니다. 각각의 동작이 같은 배 안에서 제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림은 이 노 젓기 동작의 앞뒤를 보여 주지 않는다. 노 끝도 화면 밖에 있어 배의 속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도 앞으로 향한 팔, 기울어진 상체, 아래로 처진 다리는 정지된 이미지에 여러 힘의 방향을 더한다. 가로대와 휘어진 뱃전은 그 움직임들을 안쪽에 담아 둔다. 여기서 느끼는 안정은 모두가 꼿꼿이 앉아 가만히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방향이 잠시 한곳에서 함께 유지되고 있다.
3 얼굴의 뜻을 서둘러 정하지 않기
다시 위쪽을 보자. 여성의 머리는 비교적 곧게 서 있고 아이의 머리는 기울었으며, 남자는 배 안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다. 크기가 다른 두 밝은 모자와 오른쪽의 어두운 모자. 세 모자는 푸른 수면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높이에 놓여 있다. 조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거기서 다시 조금 위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 눈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간다.

여성과 아이는 남자를 보는 듯도 하고, 그의 곁 어딘가를 보는 듯도 하다. 작은 차이지만 그대로 남겨 둘 만하다. 같은 방향을 향한다고 해서 서로 눈을 맞추는 장면까지 확인한 것은 아니다. 남자의 눈은 모자 그늘에 가려 더 읽기 어렵다. 세 얼굴에 행복, 걱정, 소원함 같은 말을 서둘러 붙이면 그림의 더 풍부한 부분을 지나치게 된다.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은 몸과 동작으로 가까이 있을 수 있으며, 얼굴마다 똑같은 뜻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아이의 표정은 이런 성급함을 늦춰 준다. 머리는 기울고 뺨은 둥글며 눈은 한쪽으로 향한다. 입술은 분명한 웃음이 될 만큼 벌어져 있지 않다. 졸린 것 같다고 느낄 수도 있고,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소매 위의 손과 아래로 늘어진 다리는 그대로 남는다. 표정에 이끌려 다가간 눈은 자세를 따라가면서 그 인물 곁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된다.
흔히 ‘어머니와 아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장면이지만, 소장품 자료는 이 세 사람의 친족 관계를 확정하지 않는다. 우선 아이를 안은 여성, 아이, 노를 젓는 남자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림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본다고 돌봄의 의미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소매가 어디를 지나고 손이 몸을 어떻게 받아 주는지, 구체적인 자리에서 돌봄이 드러난다. 그림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관계는 먼저 동작을 통해 유지된다.
옷은 그 연결을 더 넓힌다. 여성의 연한 푸른 옷에는 가늘고 고르지 않은 분홍 선들이 지나간다. 가슴에서는 촘촘하고, 무릎에서는 벌어지며, 치맛자락이 접히는 곳에서는 방향을 튼다. 이 선들은 천의 굴곡을 보여 주면서 아이의 분홍색을 여성의 몸 전체로 옮겨 놓는다. 맞닿은 손뿐 아니라, 두 옷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색도 두 몸을 눈앞에서 가깝게 만든다.
분홍색 아래를 가로지르는 짙은 푸른 소매는 다시 남자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그는 관람자에게 등을 보인 채, 팔을 통해 이웃한 색들의 묶음 안으로 들어온다. 세 얼굴이 같은 표정을 짓지 않아도 세 사람은 하나의 화면을 이룬다. 금세 뜻을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 하나로 묶지 않을 때, 이 그림의 친밀함에는 더 오래 살펴볼 여지가 생긴다.
4 화면 위로 올라온 바다와 넓게 펼쳐진 배
인물들을 살펴보았으니 그 뒤의 물을 보자. 먼 해안은 화면 위쪽 가장자리에 붙을 만큼 높다. 나무들은 가늘고 긴 초록 띠를 이루고, 밝은 집 몇 채가 그 사이에 작은 쉼표처럼 놓인다. 하늘이 넓게 펼쳐질 자리는 거의 없다. 그래서 원래 먼 곳으로 물러나야 할 바다가 이 그림에서는 넓은 파란 면으로 퍼져 나온다. 모자와 어깨, 돛의 윤곽 바로 뒤에 그 파랑이 닿아 있다.
그렇다고 바다가 고른 색의 벽이 되지는 않는다. 짧고 밝은 붓질이 물 위를 가로로 지나가다가 휘어지고, 그 사이에는 더 짙은 파랑이 남아 있다. 왼쪽 뱃전 가까이에서는 자국 하나하나를 비교적 쉽게 따라갈 수 있다. 해안 쪽으로 눈을 옮기면 자국들은 더 촘촘히 모여 보인다. 여전히 거리가 읽히지만, 넓게 퍼진 색은 눈길을 자꾸 캔버스 표면으로 되돌린다.
왼쪽 돛에 잠시 머물러 보자. 연한 녹회색 돛이 화면 밖에서 들어와 오른쪽의 한 귀퉁이로 좁아진다. 그 아래 가장자리는 다시 왼쪽 아래로 비스듬히 이어진다. 아래에서는 뱃전도 휘어 올라가며, 흰색과 황록색의 폭이 다른 두 곡선이 배 안을 감싼다. 돛과 뱃전 사이에는 푸른 물이 띠처럼 남아 있다. 양옆의 윤곽이 함께 잘라 낸, 뚜렷한 색의 모양으로 보이는 자리다.

이 곡선들은 시선을 배 안으로 보내고, 반대편의 넓은 등은 그 시선을 다시 가로막는다. 왼쪽의 밝은 돛과 오른쪽의 어두운 몸은 모양도 무게도 다르지만, 양쪽 가장자리에서 들어와 여성과 아이가 있는 가운데 공간을 좁힌다. 화면은 가득 찬 듯하다. 그래도 모자와 모자, 어깨와 어깨 사이에는 배경의 푸른 물이 드러나는 틈이 있다. 빽빽함 속에 숨통이 남아 있는 셈이다.
커샛은 1890년 파리에서 일본 판화 전시를 보았고, 이후 자신의 다색 판화 연작을 제작했다. 이 경험은 분명한 윤곽과 넓은 색면, 비스듬한 시점에 대한 관심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미국 국립미술관 역시 이 작품을 일본 판화의 영향과 연결해 설명한다. 판화 제작의 배경; 미술관 작품 해설 직접 본보기로 삼은 작품을 증거 없이 정할 필요는 없다. 그림 안에서 이미 두 가지 구성을 함께 볼 수 있다. 배는 안쪽 깊이로 이어지고, 색은 화면 양옆으로 펼쳐진다.
따라서 여기서 ‘평면화’라는 말을 쓸 때는 뜻을 조금 살펴야 한다. 공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이는 여성 앞에 있고, 남자는 그 둘보다 앞에 있다. 노는 뱃전을 가로지르고, 가로대는 치마 일부를 가리며, 배의 바닥은 틈으로만 보인다. 앞뒤 관계는 세부마다 살아 있다. 달라지는 것은 그 관계를 따라가는 눈의 리듬이다.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마다 넓은 황록색과 짙은 파랑, 분홍색이 시선을 옆으로 끌어낸다. 깊이와 표면이 서로 작용하면서, 배는 몸을 담는 공간인 동시에 화면을 단단하게 채우는 형태가 된다.
마지막으로 짙은 푸른 등을 다시 보자. 처음에는 시야를 막는 거대한 장애물 같았을지 모른다. 이제는 노를 쥔 손, 노의 사선, 허리띠, 아이의 신발, 왼쪽 뱃전의 곡선이 그 등을 주위 전체와 연결한다. 그 무게 덕분에 곁의 가볍고 밝은 형태들도 기댈 자리를 얻는다. 바로 여기에서 《뱃놀이》의 힘이 드러난다. 가벼운 나들이처럼 보이는 장면이 여러 몸이 함께 유지하는 공간으로 바뀐다. 아주 가까이 다가간 우리의 시선도, 이미 그곳에 있는 몸들이 차지한 자리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
선택해서 읽기 SAE로 같은 배 안을 다시 보기
여기서는 SAE(Self-as-an-End)를 빌려, 그림을 보는 과정 자체를 조금 더 살펴보려 한다. 앞의 네 절은 이 부분을 읽지 않아도 독립적인 감상 안내로 읽을 수 있다.
먼저 “나는 이 색이 좋다”는 느낌과 “이 색은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에 각각 시간을 주어 보자. 파랑을 바다로, 짙은 파랑을 옷으로 알아보기 전에 폭과 밝기, 가장자리와 이웃한 형태를 잠시 살피는 것이다. 지각의 아름다움
구체적인 왕복을 해 볼 수 있다. 전체 그림을 본 다음 그림 2의 등 부분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전체로 돌아온다. 부분 이미지에서는 짙은 색이 눈앞을 채운 벽처럼 보일 수 있다. 전체로 돌아오면 왼쪽의 밝은 돛, 황록색 곡선, 가운데의 분홍색 때문에 같은 등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등의 색 자체를 바꾼 것은 아니다. 볼 수 있는 관계가 달라졌다. 그러면 ‘무겁다’는 말은 한 사람에게 붙이는 막연한 수식어를 넘어, 넓이와 이웃한 색의 밝기, 가로막힌 시야처럼 함께 짚어 볼 수 있는 근거를 얻는다.
한편 노를 알아보고, 손이 쥔 모습에서 힘의 방향을 짐작하는 일에는 이미 과거의 경험이 관여한다. 제목을 듣고 하늘이 널찍하게 열리고 모두의 얼굴이 잘 보이는 한가로운 뱃놀이를 예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화면 높은 곳까지 차지한 수면과 커다란 등을 만나면 그 예상은 달라져야 한다. 기억과 기대에 관한 SAE의 논의는 새로 발견한 세부가 앞서 품었던 그림의 인상을 어떻게 다시 정리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인지의 아름다움
모두가 같은 변화를 겪을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짙은 파랑에 이끌리는 사람도 있고, 아이부터 보는 사람도 있다. 더 시험해 볼 만한 일은 구체적이다. 노를 따라 쥔 손에 도착하고, 그다음 여성의 소매를 따라 아이의 몸으로 눈길을 옮겨 보자. 전체 그림으로 돌아왔을 때 배 안의 비좁음과 받쳐 주는 동작, 서로에게 필요한 자리를 전보다 뚜렷하게 느끼는가. 그렇다면 이론은 막연한 ‘친밀함’을, 한곳에 함께 있는 몸들의 감각으로 더 자세히 읽도록 도운 셈이다.
이미지와 자료에 관하여
이 글의 시각적 묘사는 미국 국립미술관이 제공하는 4096 × 3136픽셀 공식 이미지를 관찰한 데 근거한다. 전체 이미지는 내려받은 파일 그대로다. 네 부분 이미지는 직사각형으로 잘라 내기만 했으며, 색 보정, 선명도 조정, 복원, 덧그리기 또는 생성형 작업을 통한 내용 추가는 하지 않았다. 화면의 색과 확대 비율은 원작을 관람하는 조건과 다르다.
이미지에는 미술관의 CC0 공개 정책이 적용된다. 이 공개 이용 허락이 현대 연구 글까지 자유롭게 전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필요한 역사적 사실에는 출처를 연결했다. 글의 중심이 되는 읽기는 오늘의 관람자가 제안하는 해석이며, 화가의 직접 설명이나 미술관의 승인을 뜻하지 않는다. 참고 자료와 이미지 출처 및 이용 안내도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