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 《체인소 맨》 읽기
1 / 5

잼 바른 빵

Han Qin (秦汉) · 한국어판 · 2026-10-09

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작을 한국어 독자를 위해 새로 쓴 글이다. 원문 사이트에서는 간체와 번체를 전환해 읽을 수 있다.

허름한 오두막 하나. 그 안에 십 대 소년과 전기톱이 달린 개 한 마리가 산다.

소년의 이름은 덴지다. 아버지는 야쿠자에게 3천8백만의 빚을 남기고 죽었고, 그 빚은 고스란히 덴지 몫이 되었다. 달리 갚을 길이 없어 악마를 사냥한다. 악마의 시체는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그래서 제 몸도 팔았다. 눈 하나, 신장 하나, 고환 하나.

전부 팔아 봐야 빚의 끄트머리만 조금 갚을 수 있었다. 남은 빚에는 이자에 이자가 붙었다. 갚는 속도보다 불어나는 속도가 빨랐다.

매일 먹는 것은 빵이다. 샌드위치도 아니고 속에 뭐가 든 빵도 아니다. 흰 식빵이다. 어쩌다 다른 것을 조금 곁들일 수 있다.

작품은 처음부터 덴지를 개와 나란히 놓는다. 남이 그에게 붙인 비유가 아니다. 그 자신이 하는 말이다. 남은 음식을 먹고, 일을 하고, 개집에서 자고,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다.

덴지에게는 소원 목록이 있다. 이 글은 그 목록에서 출발한다.

그 목록에는 무엇이 적혀 있나

대략 이런 것들이다.

잼을 바른 빵 먹기.

버터가 나오는 밥 한 끼 먹기.

저절로 눈이 떠질 때까지 자기.

여자애와 자기. 가슴 한 번 만져 보기.

그게 전부다.

초라한 꿈이라고 부르지 말자. 덴지의 꿈은 실제로 그만한 크기다.

이 말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 읽으면 우리는 손쉽게 그 소원들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려 하기 때문이다. 덴지가 진짜 바라는 것은 사람 대접을 받는 일이고, 자신을 신경 써 주는 누군가이고, 평범한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 글에서는 그렇게 값을 올려 붙이지 않겠다. 감상적인 해석을 피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이렇다. 당시 덴지에게는 자기 삶과 비교해 볼 다른 삶이 없었다.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이런 것도 바라 봐도 된다고 말해 준 사람도 없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동안의 시간은 전부 빚을 갚고 살아남는 데 썼다.

사람이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이것이다”라고 말하려면, 먼저 그런 것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덴지는 몰랐다.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나날이 있다는 것을, 아무 대가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맛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겪어 보지 못한 것들이니 원하는 것들 속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목록에 적힌 것이 전부다. 빵에 잼이 발려 있으면 좋겠다. 그 밑에 숨은 다른 층위는 없다.

이 연작은 끝까지 이 선을 지킬 것이다. 빵은 빵이고, 한 번 만지는 것은 한 번 만지는 것이다. 더 비싼 의미를 붙이지도,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대신 찾아 주지도 않겠다.

소원을 채워 주는 데 드는 돈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목록을 보자. 이것들을 마련해 주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빵 한 조각. 작은 잼 한 병. 밥 한 끼. 잠잘 자리 하나.

그런 소원 하나를 채워 주는 데 드는 것은 빵 한 조각이다.

그렇게 주고 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당신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 하나. 다음 끼니를 위해 악마와 목숨 걸고 싸울 사람 하나.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하나.

이 비율이 작품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작동 원리다. 1화에서 이미 돌아가기 시작한다.

야쿠자가 덴지에게 준 것은 간신히 연명할 만큼의 푼돈이다. 덴지에게서 받아 낸 것은 제 목숨을 돌보지 않는 사냥꾼이다.

소원이 작고 구체적일수록, 그것을 손에 쥔 사람은 힘을 덜 들인다.

여기에는 칭찬도 비난도 없다. 들이는 것과 얻는 것의 관계일 뿐이다. 집 한 채를 바라는 사람을 붙들어 두려면 집 한 채를 내놓아야 한다. 잼 바른 빵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빵 한 조각이면 된다. 후자가 훨씬 싸다. 게다가 하루에 한 번씩, 계속 줄 수도 있다.

포치타

오두막에 함께 사는 그 개의 이름은 포치타다.

덴지가 포치타를 만난 곳은 아버지의 무덤 앞이었다. 다쳐서 죽어 가던 포치타에게 자기 피를 먹여 살렸다. 그 뒤 둘은 함께 살며 일하게 되었다.

그때 덴지 자신도 먹을 것이 별로 없었다. 가진 것을 반으로 나누어 준 것이다.

첫 계약은 목숨을 구하던 그 자리에서 맺었다. 덴지가 포치타를 살려 주는 대신, 포치타도 덴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속이다. 음식을 나누고 함께 일하는 생활은 그 도움을 매일 이어 가는 방식이었다.

이 작품에서 보기 드문 계약이다. 양쪽 다 내용을 알고, 양쪽 다 약속을 지킬 수 있으며, 양쪽 다 제 몫을 받는다. 뒤에 나오는 계약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 아키가 세 악마와 맺은 계약들도, 덴지가 공안과 맺은 계약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 첫 번째 관계다. 그 모양은 이후의 모든 관계와 같다. 교환이다.

다른 점은 이번만큼은 서로 내놓은 것이 대등하다는 데 있다. 죽어 가던 존재가 살아났고, 살려 준 사람은 일손을 얻었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움켜쥐고 있지 않다.

기억해 둘 만한 대목이다. 작품에서 이런 관계는 이 한 번뿐이다.

쓰레기봉투에 담긴 소년

그다음 일은 순식간이다.

야쿠자는 좀비의 악마와 계약을 맺고 그 부하가 되었다. 덴지를 속여 불러낸 뒤 죽였다.

그를 몇 토막으로 잘라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려 두었다.

작품은 이 대목을 놀랄 만큼 무심하게 처리한다. 음악도, 슬로모션도, “감히 나를 배신하다니”라는 대사도 없다. 주인공이 1화에서 죽는다. 몇 컷이면 끝이다.

무심히 끼워 넣은 세부 하나가 있다. 죽는 순간 덴지가 생각한 것은 아직 잼 바른 빵을 먹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때 포치타가 덴지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심장이 되었다. 덴지는 다시 살아났고, 체인소 맨이 되었다.

가슴의 줄을 잡아당기자 머리에서 전기톱이 돋았다. 덴지는 그들을 모조리 잘라 버렸다.

싸움이 끝난 뒤 그는 피 웅덩이에 앉아 있었다.

첫 끼니

한 여자가 다가온다.

마키마다. 내각 직속 공안의 데블 헌터다. 몸을 낮추고 덴지를 바라본 뒤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

내 개가 되든가. 여기서 죽든가.

덴지는 앞쪽을 골랐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정말 중요해지는 장면이다.

마키마가 덴지에게 맨 먼저 준 것은 명령이 아니라 밥 한 끼였다.

마키마는 덴지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갔다.

대다수 사람에게는 평범한 식사였다. 덴지는 먹다가 울었다. 자신도 왜 우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너무 맛있다는 것만 알았다.

작품은 여기서 감정을 자극하려고 별다른 장치를 쓰지 않는다. 한 사람이 밥을 먹고, 눈물을 흘리고, 다시 먹게 할 뿐이다.

그다음은 살 곳이었다. 그다음은 뜨거운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그리고 침대, 깨끗한 이불, 저절로 눈이 떠질 때까지 잘 수 있는 아침이었다.

소원 목록의 여러 줄이 하룻밤 사이에 지워졌다.

몇 시간 만에 마키마는 덴지의 목록을 절반 넘게 지웠다. 그러는 데 쓴 돈은 아마 한 달 월급에도 못 미쳤을 것이다.

크기

이 글에서 본 것들을 한데 놓아 보자.

덴지의 소원 목록: 잼 바른 빵, 맛있는 밥 한 끼, 실컷 자는 아침, 한 번 만져 보기.

이것들을 대 주는 비용: 아주 적다.

대 주고 나서 얻는 것: 악마와 목숨 걸고 싸우러 갈 사람 하나.

야쿠자도 이 계산을 했고 마키마도 했다. 같은 장부다. 다만 마키마가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영리하게 준다. 덴지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다. 소원 목록의 항목을 하나씩 지우는 것이다. 한 줄을 지울 때마다 마키마의 손에는 덴지를 움직일 손잡이가 하나 더 생긴다.

작품은 1화에서 이미 이 모든 것을 내놓았다. 숨길 생각도 없었다. 마키마는 “내 개가 돼”라고 말했다. 말을 곱게 바꾸지도 않았다.

덴지도 그 말에 별다른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 처지에서 ‘개’는 덴지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를 가리켰다. 밥을 주는 사람이 있고, 잘 곳이 있고, 빚을 갚지 않아도 되고, 오늘을 살아 넘길 수 있을지 날마다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다.

속아서 굴욕적인 신분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덴지는 그것을 승진으로 받아들였다.

오두막에서 공안 숙소로. 흰 식빵에서 마키마가 데려가 먹인 그 밥으로. 덴지가 손에 쥔 자로 재면 삶은 엄청나게 나아졌다.

그 자가 어디서 왔는지는 앞에서 이미 말했다.

이날부터 덴지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런데 다들 같은 것을 써서 다가온다.

다음 글에서 보자.

원문 연작 · 다루는 범위: 후지모토 타츠키 《체인소 맨》 제1부, 1–97화. 결말까지의 내용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