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입에서 나온 아름다운 문장
마지막에 월터는 스카일러에게 자기를 위해 했고, 좋아했고, 잘했고, 살아 있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악인이 가면을 벗는 장면이지만 문장 자체는 추하지 않다. 목수나 외과의사, 교사가 같은 말을 하면 자기 일을 찾은 행운아라고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필요하다고 느끼는 일을 평생 찾는다. 드라마의 어려움은 그 바람직한 자기 인식을 수많은 죽음에 책임이 있는 남자의 입에 놓고 욕망 자체를 가짜로 만들지 않는 데 있다. 문제는 살아 있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그 느낌이 가능한 현실을 누구에게 강제로 부담시켰느냐에 있다.
드라마가 거부하는 두 답
첫 답은 마이크의 말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고 맡은 일만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많은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차장과 교실에서 능력을 묻어 둔 20년으로 돌아가라는 말일 뿐 월터의 실제 공백을 해결하지 못한다. 둘째 답은 진짜 자기가 되는 일이라면 대가가 정당하다는 영웅담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대사가 힘의 명언으로 소비되고 스카일러가 방해꾼으로 보일 때 관객도 이 유혹에 들어간다. 작품은 복종도 자기신화도 택하지 않는다. 능력을 살아 보고 싶은 갈망을 인정하면서 그 갈망이 내놓은 모든 해답이 누구를 비용으로 삼는지 끝까지 검사한다.
모든 해답은 누군가를 쓴다
월터는 공포로 이름을 말하게 하고, 제시에게 가르침과 의존을 함께 준다. 가족을 위한 일이라는 설명으로 스카일러를 수혜자로 배정한다. 크레이지-8의 생명을 자기 가족의 안전으로 환산하고, 브록 사건에서는 제시의 추론을 원하는 결론으로 몰아간다. 고백 영상에서는 행크의 진실을 재배열한다. 그의 실패는 타인이 보이지 않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약점과 충성, 두려움을 놀라울 만큼 정확히 본다. 그 정확성을 상대가 자기 목적을 가진 채 곁에 있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답을 실현하는 도구로 쓴다. 62화 동안 해답은 달라져도 다른 사람을 배역으로 만드는 형식은 반복된다.
조각 속에 숨은 다른 답
다른 관계의 가능성은 큰 연설이 아니라 짧은 장면에 흩어져 있다. 제인은 제시의 그림을 구체적으로 본다. 마이크는 그의 일을 간단히 잘했다고 인정한다. 고메즈는 제시를 죽을 수도 있는 미끼로 쓰려는 행크에게 반대한다. 행크는 폭행을 자진 보고한다. 죽기 전 마이크는 월터의 사과 장면이 되기를 거부하고, 제시는 원했던 복수도 월터의 명령으로 받지 않는다. 어느 장면도 세상을 구하거나 완성된 규칙이 되지 않는다. 다만 맞은편 사람이 자기 이유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 결정적 사건을 한 사람의 설명만으로 닫지 않는 태도를 지킨다. 명언보다 작아서 쉽게 권력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빠져나가는 한 사람
마지막 장부에서 월터는 실험실, 행크는 돈 구덩이, 마이크는 강가, 거스는 요양원, 게일은 현관, 제인은 침대, 안드레아는 집 앞에서 죽는다. 브록은 가족을 잃고 플린은 아버지의 이름이 지워져야 돈을 받는다. 한 사람만 차로 문을 부순다. 제시의 탈출은 무죄나 보상이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되돌리지 못한다. 그래도 죽은 이들을 가벼운 설명으로 만들지 못한 부분이 밖으로 나간다. 처음 세차장에 있던 월터의 모욕과 재능은 진짜였다. 작품은 ‘좋아하고 잘하고 살아 있다’는 문장을 버리라 하지 않는다. 그 뒤의 문장을 요구한다. 곁에 선 사람도 자기 삶을 자기 말로 선택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