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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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 / 108 ·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베유: 주의를 기울이는 일

기계의 속도에 생각이 끊겨 본 사람이 기다림의 힘을 썼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요구를 조금 내려놓을 때, 아직 보지 못한 누군가가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1. 설탕을 먹지 않던 아이

제1차 세계대전 중, 파리의 한 아이가 설탕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전선의 병사들에게 없는 것을 자신만 먹을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전기에 전해지는 이 이야기 속 아이는 여섯 살 무렵의 시몬 베유다. 아이가 앉은 식탁과 멀리 있는 참호 사이에는 먼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그 거리를 핑계 삼아 편안해질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다른 사람은 지금 그 안에 있는데, 나는 안전한 곳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은 베유의 삶에서 생각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의 몸에까지 그 질문을 가져왔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삶에서 꺼내야 할 답이, 함께 고통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명령은 아니다. 오히려 그처럼 견디기 어려운 물음이 한 사람을 얼마나 멀리 데려갔는지 보게 된다.

철학 교사가 된 뒤 베유는 잠시 교직을 쉬고 공장에 들어갔다. 1934년부터 이듬해까지, 르노를 비롯한 여러 공장에서 일했다. 르노의 한 작업장에서 일 년 내내 지낸 것도, 교사 일을 영원히 버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노동에 관한 책에서 기계 앞의 하루로 옮겨 간다는 것은, 설명할 사례를 하나 더 얻는 일과 달랐다. 자신의 속도가 다른 사람의 명령과 기계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시간이 생겼다.

공장 기록에는 피곤한 몸만 나오지 않는다. 생각이 자꾸 끊기는 일이 나온다. 하나의 생각을 끝내기 전에 다음 동작을 해야 한다. 실수할까 두렵고, 꾸지람을 피하고 싶고, 그날의 일을 버텨야 한다. 기계가 정한 박자는 손을 지나 머릿속까지 들어온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할지 고르기보다, 당장 틀리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잘게 나뉜다. 베유가 훗날 노예의 낙인에 빗댄 것은 이런 경험이었다.

오빠 앙드레는 수학자였고, 베유 자신도 뛰어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주의에 관한 글을 읽을 때 느껴지는 무게를 재능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주의를 기울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여유와 힘을 빼앗기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고 있었다. 나중에 책상 앞에서 기다리는 마음을 말할 때에도, 그 말 아래에는 공장에서 끝맺지 못한 생각들이 남아 있다.

2. 힘주어 생각하는 것과 기다리는 것

베유는 주의를 가장 높은 데까지 기울이는 일과 기도를 이어 놓았다. 이 생각이 담긴 곳은 『중력과 은총』의 ‘주의와 의지’다. 신을 기다리는 마음과 교실에서 문제를 푸는 마음은 얼핏 멀리 떨어져 있다. 『신을 기다리며』에 실린, 학교 공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에 관한 글은 그 둘 사이로 길을 낸다.

수학과 언어를 배우는 데는 지식과 기술 이상의 뜻이 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 앞에서, 아무 답이나 갖다 놓고 끝내지 않는 것. 틀린 풀이를 다시 볼 때, 상한 자존심 때문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 점수로 당장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 시간에는 무언가가 자랄 수 있다. 베유가 공부에서 찾는 것은 바로 이런 주의의 연습이다. 과목을 제대로 배우는 일과 별개가 아니라, 그 일을 하면서 길러지는 힘이다.

이를 악물고 머리에 힘을 준다고 이해가 생기지는 않는다. 의지로 책상에 돌아와 앉을 수는 있다. 손을 움직여 계산을 하고, 읽다가 놓친 문장을 다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깨달음 자체에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여기까지 애썼으니 이제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에, 문제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 노력은 필요하다. 다만 노력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베유가 말하는 기다림은 준비 없는 멍한 상태가 아니다. 이미 배운 것을 없애지도 않는다. 알고 있는 것을 곁에 두되, 그것으로 너무 빨리 빈자리를 메우지 않는다. 눈앞의 대상이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면, 익숙한 설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생각을 사용할 수 있게 갖추어 놓고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견딘다.

이 연작에서 콩트는 관찰을 통해 규칙을 찾는 사람으로, 포퍼는 가설을 시험대에 올리는 사람으로 읽었다. 베유를 그 옆에 놓으면 다른 질문이 들린다. 무엇을 얻을 것인지, 무엇을 시험할 것인지 정하기 전에, 바로 그 질문 때문에 못 보게 된 것은 없는가. 이는 앞선 두 사람의 작업 전체를 반대로 뒤집는 선언이 아니라, 이 글이 만들어 보는 대비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관찰하고 읽고 실험하되, 그 일이 내 예상의 확인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세계가 내 뜻대로 대답할 때까지 압박하는 마음을 조금 늦추면, 질문에 없던 것이 보일 수 있다.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손을 놓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준비한 답을 잠시 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3. 들어가는 사람, 자리를 내주는 사람

앞선 글의 바버라 매클린톡은 옥수수와 오래 함께 있었다. 세포 안으로 들어가는 듯 대상을 알게 되었고, 염색체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익숙해졌다. 번호가 붙은 표본이 가까이 지내는 상대가 되는 시간이었다. 베유의 글을 그 곁에서 읽으면, 가까워지는 또 하나의 몸짓이 보인다. 같은 곳을 향한 것 같지만 움직임의 방향은 다르다.

매클린톡은 대상이 있는 쪽으로 간다. 베유는 대상이 자신에게 나타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준다. 한쪽은 들어가고, 다른 쪽은 맞아들인다. 물론 이것이 두 사람이 같은 이론을 말한다는 뜻은 아니다. 유전학자의 연구와 종교 사상가의 기도는 서로 다른 작업이다. 여기서는 그 차이를 지우지 않은 채, 아는 사람이 자기 편의를 잠시 뒤로 물리는 순간을 나란히 놓아 보는 것이다.

대상이 커지고 자신은 작아진다는 말을 쉽게 오해할 수 있다. 내가 사라져야 한다는 명령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과 성격과 판단력을 모두 지워 버리면, 무엇을 알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책임질 사람도 없어진다. 물러나는 것은 인격이 아니다. 모든 것이 내 기대에 맞아야 한다는 요구, 대상을 알아보기도 전에 이미 안다고 말하려는 성급함이다.

이 연작에서 피히테는 먼저, 알고 있는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물었다. 그 뒤에 베유를 놓는다면, 찾아낸 자리를 나 혼자 차지하고 있지 말라는 움직임이 생긴다. 내가 보는 위치를 아는 일과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일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시선을 알아야, 그 시선의 한계도 알아차릴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보고 있다. 내게는 보고 싶은 것도,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한 뒤에도 상대를 향할 수 있는가. 베유에게서 이 글이 읽어 내는 한 걸음은 그런 것이다. 나를 없애서가 아니라, 상대를 내 성취의 이야기에 가두지 않기 위해 조금 뒤로 물러나는 한 걸음.

4. 중력과 은총, 남겨진 글들

베유는 1943년 8월 24일, 영국 애슈퍼드의 그로브너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른네 살이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의 활동에 참여하다가 요양소로 옮겨 온 뒤였다. 결핵에 영양실조가 겹쳐 있었다. 점령당한 프랑스 사람들보다 많이 먹지 않으려 했다는 설명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먹었는지, 섭취를 줄인 데 어떤 이유들이 작용했는지를 두고는 논의가 남아 있다.

설탕을 거절한 아이에서 식사를 제한한 어른까지, 한 줄을 긋고 싶어진다. 평생 조금도 변하지 않은 마음의 증거로 읽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선이 너무 반듯하면 병과 몸의 한계, 주변 사람들의 염려까지 지워진다. 여기서 베유의 정신 상태를 진단하거나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몸을 해치는 행동을 연대의 모범으로 삼을 수도 없다. 이해하려는 삶 앞에서조차, 다 안다고 말하지 않을 여지가 필요하다.

중요한 책들이 사후에 출간되었다고 해서, 생전에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베유는 정치와 노동 등을 다루는 글을 이미 세상에 내놓았다. 『중력과 은총』은 귀스타브 티봉이 맡아 둔 노트에서 글을 골라 편집한 책이다. 『신을 기다리며』에는 페랭 신부에게 보낸 편지뿐 아니라 여러 논고가 들어 있다. 남겨진 책들을 모두 한 묶음의 비밀 일기에서 나온 것으로 상상하면, 글을 쓰고 타인에게 건넸던 실제의 삶이 작아진다.

중력은 물체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의 이름이지만, 베유의 글에서는 마음이 쉽게 따라가는 길을 비추기도 한다. 상처를 받으면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옳았다는 증거부터 찾는다. 불안할수록 남의 이야기를 내 안심을 위해 사용한다.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는데, 마음은 익숙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흐름은 주의를 다시 나에게 데려온다. 상대에게서 시작한 이야기인데도 끝에 가면 내 두려움, 내 공로, 내 상처가 자리를 차지한다. 중력이라는 비유가 보여 주는 것은 나라는 사람이 존재해서 생기는 잘못이 아니라, 나에게 모든 것을 되돌려 놓으려는 움직임이다. 그 힘은 강해서, 남을 위한 행동 속에서도 쉽게 다시 나타난다.

은총은 더 강한 의지를 동원해 내가 만들어 내는 반대편의 힘이 아니다. 베유에게 이 말은 신과의 관계를 떠나 단순한 심리 기술이 될 수 없다. 열심히 집중한 사람에게 지급되는 보상도 아니다. 내가 결과를 지배할 수 없는데도, 받을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것. 기다림은 그 자리에 있다. 스스로 만들지 않은 무엇이 다가왔을 때, 이미 내 뜻으로 가득 차 있어서 알아보지 못하는 일을 줄이는 것이다.

5. 문 안에도, 문 밖에도

베유는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 배경이라는 말 하나로 신앙의 여정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일 앞에서는 멈추어 섰다. 1942년 페랭 신부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그 문턱의 긴장이 남아 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 그곳에서 만난 진실과 자신을 떼어 놓게 되지는 않을까.

이는 소속을 가진 사람은 모두 남을 배제한다는 간단한 비난과 다르다.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과 교회의 경계를 향한 의문을 손쉽게 화해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문턱은 두 세계를 모두 거느리는 우월한 자리가 아니었다. 어느 쪽에서도 아주 편안해지기 어려운 자리였다.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마저 자랑스러운 신분이 된다면, 그곳도 다시 안전한 관람석이 될 수 있다.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하고 철학자 알랭에게 배운 사람이 공장에서 일하고 밭일에 손을 보탠다. 일터를 잠깐 옮겼다고 노동자의 삶 전체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베유의 선택이 거리를 모두 없애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거리가 있다는 이유로, 설명하는 쪽에만 계속 머물러 있으려 하지도 않았다. 말을 할 틈이 없고 몸이 따라주지 않는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의 일상 안으로 가져왔다.

이 연작의 다리에서 피히테는 널빤지 사이의 틈에 서 있었다. 그것은 그의 사상을 읽기 위해 만든 장면이지 전기의 한 대목이 아니다. 잠시 뒤 베유도 그 곁에 세워 보려 한다. 피히테가 내가 선 자리를 묻는다면, 베유는 그 자리에 선 나 말고도 무엇이 들어올 수 있는지를 묻는다.

발판을 잃는 것과 발판을 독점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자신을 지운다는 큰 말 대신, 조금 자리를 비켜 주는 움직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전히 자기 발로 서 있으면서도 옆 사람을 볼 수 있는 자리. 베유의 문턱을 그렇게 읽을 때, 삶은 불가능한 선택들의 기념물이 아니라 아직 닫히지 않은 물음으로 남는다.

6. 앎의 합주에 생기는 쉼표

지금까지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한자리에서 들어 본다. 콩트는 관찰 속의 규칙을 찾는다. 포퍼는 틀릴 수도 있는 가설을 시험한다. 디랙에게서는 방정식의 아름다움이 길을 열고, 굴원에게서는 아름다운 말이 잃고 싶지 않은 방향을 붙든다. 피히테는 알고 있는 사람의 자리를 묻고, 매클린톡은 살아 있는 대상과 오래 지내면서 그 차이를 느낀다.

이것들은 각자의 사상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 요약이 아니다. 이 연작이 그들에게서 들어 보려 한 선율들이다. 베유가 그 합주에 가져오는 것은 다른 악기만이 아니라 쉼표다. 보기 전에 이미 볼 것을 정하지는 않았는가. 물음을 던지면서,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목소리는 지워 버리지 않았는가. 아는 사람이 하는 일 사이에 잠시 이런 침묵이 들어온다.

그렇다고 관찰과 가설과 감각을 모두 버리고 주의만 남기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일들을 하는 동안에도, 내가 아직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다음 인물인 대처의 결단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에도 이 차이는 따라간다.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하는 힘과, 결정한 뒤에도 새로 들려오는 말에 귀를 여는 힘은 같지 않다. 베유의 조용한 질문은 행동하는 사람 곁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나를 중심에서 물리는 이야기는 불교나 장자, 선을 떠올리게 한다. 뒤에서 만날 용수의 공과도 어떤 울림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소리가 들린다고 같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할 수는 없다. 베유의 기도에는 그리스도교와 플라톤의 배경이 있고, 용수의 질문에는 다른 역사와 언어가 있다. 여러 전통을 하나로 합치면, 그들의 다름을 들으려던 주의가 오히려 사라진다.

이 글이 해 보는 비교는 더 조심스럽다.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이 내 확신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내가 가진 말로 곧장 번역되지 않는 말을 들어 볼 수 있다는 것. 그때 중요한 것은 모두 결국 같은 말을 했다는 결론이 아니라, 아직 같지 않은 상대에게 시간을 내주는 일이다. 그런 읽기 자체가 베유의 질문을 시험하는 자리가 된다.

7. 고통 말고, 그 사람을 보기

고통받는 사람에게 정말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까울 만큼 드물고 어렵다. 학교 공부에 관해 쓰던 베유의 글은 이런 곳에 닿는다. 문제 앞에서 성급한 답을 내려놓는 연습이, 사람 앞에서 내가 준비한 설명을 잠시 미루는 일과 연결된다. 교실의 책상과 누군가의 아픔이 서로 떨어진 세계만은 아니게 된다.

고통을 보면 우리는 먼저 자기 두려움을 볼 때가 있다. 나에게도 저런 일이 생길 수 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지 않아 다행이다. 무언가 도와야 한다. 두려움과 안도, 돕고 싶은 마음은 모두 사람다운 반응이다. 하지만 그 반응이 화면을 가득 채우면, 정작 고통받는 사람은 내 감정을 일으킨 계기로만 남는다. 우리는 많은 것을 느꼈는데도 그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듣지 못했을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은 원하지 않는가. 상대가 한마디를 더 하기 전에 내가 이미 사연을 완성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선의를 설명하는 내 말보다 상대의 말과 침묵에 시간을 내주는 일이다. 고통이라는 큰 이름 뒤에서, 이름이 있는 한 사람이 다시 보이도록 하는 일이다. 그 사람은 내가 배울 교훈의 재료만은 아니다.

가만히 보기만 하라는 뜻으로 읽으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 물이 필요하면 물을 가져오고, 위험하면 도움을 불러야 한다. 다만 그 행동이 곧바로 내가 좋은 사람임을 확인하는 무대가 되지 않도록 살핀다. 내가 생각한 도움이 거절되더라도, 상대는 여전히 나와 별개인 사람이다.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도움을 멈추게 하기보다, 그 도움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시 묻게 한다.

훗날 한나 아렌트에게서 읽게 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경계도 여기 곁에 놓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사유와 부주의를 같은 개념으로 만들거나 어느 쪽이 더 깊은 악인지 판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 글의 비교다. 내 역할을 다했다고 여겼을 때, 내 앞에 있던 사람은 과연 보였는가. 두 사람의 차이를 남겨 둔 채, 우리는 그런 질문을 들을 수 있다.

8. 다리 어귀에서

이제 실제로는 없었던 만남을 상상해 본다. 밤의 다리로 베유가 걸어온다. 마른 몸에 조금 맞지 않는 옷, 두꺼운 안경. 손에는 공장과 들에서 일한 시간의 흔적이 있다. 난간에 손을 올리고 잠깐 쉰다. 눈은 그동안에도 가까운 널빤지와 그 사이의 어둠을 더듬고 있다.

걸음이 느리다. 피로 때문만은 아니다. 발밑을 보고, 틈을 보고, 다리 위에 있는 사람들을 본다. 건너편에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듯 걷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디로도 갈 생각이 없는 사람의 걸음은 아니다. 가는 도중에 만나는 것들을, 목적지로 가는 데 방해되는 풍경으로 밀어내지 않을 뿐이다.

매클린톡이 옥수수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베유도 옆에 몸을 낮춘다. 처음에는 둘이 같은 것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베유의 눈길에는 옥수수뿐 아니라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본 사람이 들어 있다. 흙 가까이 가져간 손, 한쪽으로 기운 어깨, 무언가를 알아차릴 때까지 서두르지 않는 몸.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보다, 여기 있는 이 사람이 보인다.

매클린톡이 고개를 든다. 시선이 마주친다. 어느 쪽도 자기 방법부터 설명하지 않는다. 잠시 서로를 확인하듯 바라보다가, 두 사람이 웃는다. 아주 조용한 웃음이다. 모든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급히 해소하지 않아도, 잠깐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피히테가 널빤지의 이음새 위에 서 있다. 그는 발아래의 어둠을 향하고 있다. 베유가 일어나 그 곁으로 간다. 함께 아래를 본 뒤, 베유의 시선은 조금 위로 움직인다. 무엇이 있는가. 빛일까, 은총일까. 아직 어느 이름도 붙이지 않는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 무언가를 향해, 눈을 열어 둔다.

이 장면에서 베유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쓰고 생각한 일이 필요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티봉에게 맡긴 노트가 있고, 페랭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생전에 세상에 내놓은 글도 있다. 그 글들은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리고 읽힐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것들을 자신이 옳았다는 증거처럼 다리 위에 쌓아 놓지 않는다.

먼 곳을 본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모른다. 지금 아는 말로 불러낼 수 없는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보았다는 성과를 가지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리 약속된 보상이 없다는 이유로, 눈을 닫지는 않는다.

이 기다림은 주변에 등을 돌린 고요함과 다르다. 누군가 부르면 고개를 돌릴 수 있는 자세다. 다른 사람이 다가오면, 내가 세워 놓은 설명을 먼저 통과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을 자세다. 베유는 다리 한가운데를 차지하지 않는다. 그곳에 서 있으면서도 누군가 지나갈 자리를 남겨 둔다.

밤이 깊어진다. 누군가는 하늘을 보고 있다. 누군가는 굴러가는 공을 따라 눈을 움직이고, 누군가는 방정식을 쓰고, 누군가는 시를 읽는다. 매클린톡은 다시 옥수수를 향했다. 다리 위의 일들은 계속된다. 베유도 그 사이에 있다. 지금은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은 아니다.

멈춘다. 곁에 머문다. 본다. 상대가 나타나기 전에 내 설명으로 그 자리를 가득 채우지 않는다. 이 작은 움직임들 사이의 고요함 속에서, 베유의 초상은 끝난다.

읽기 안내와 출처

다리에서의 만남은 이 연작을 위한 문학적 상상이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매클린톡, 피히테, 아렌트 및 불교·동아시아 사상과의 비교 역시 이 글의 독해다. 이들이 같은 사상을 가졌거나 서로 직접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아니다.

주의와 기도의 관계는 『중력과 은총』의 ‘주의와 의지’를, 학교 공부와 고통받는 사람을 향한 주의의 관계는 『신을 기다리며』에 실린 학교 공부에 관한 논고를 바탕으로 풀어 썼다. 본문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뜻을 옮긴 서술이다. 『신을 기다리며』는 편지와 논고를 함께 담고 있으며, 베유의 사후 저작이 모두 노트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설탕 이야기는 전기에 전해지는 일화로 다루었다. 생애를 서술할 때에는 교직의 일시 중단과 1934–1935년 여러 공장에서의 노동, 1942년 페랭 신부에게 밝힌 문턱의 입장, 1943년 8월 24일 애슈퍼드에서 맞은 죽음을 구별했다. 결핵과 영양실조, 음식 섭취 제한의 정도와 동기를 하나의 확정된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으며, 질병이나 자신을 해치는 행동을 도덕적 본보기로 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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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