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이 끝난 뒤 시작되는 일
애정부에서 윈스턴은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하지 않은 일까지 모두 자백한다. 보통의 독재라면 공개 재판에 쓸 문장을 얻었으니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오브라이언의 작업은 그 뒤에 시작된다. 그는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윈스턴을 치료한다고 말한다. 파괴하기 전에 당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며, 세상 어딘가에 잘못된 생각 하나가 숨어 있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고 한다. 물과 질문, 전기 충격이 수업처럼 이어진다. 겉으로 철회하고 속으로 강요였다고 아는 순교자는 당과 분리된 판단을 남기기 때문이다. 당은 그 판단까지 자기 편으로 바꾼 뒤에야 죽음을 허용한다.
교사의 얼굴을 한 파괴자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오랫동안 관찰했고, 이해해 줄 동료처럼 다가와 금서와 비밀결사의 길을 열어 주었다. 고문실에서도 질문하고 오류를 교정하며 자신이 환자를 현실로 돌려보낸다고 말한다. 좋은 교육 역시 학습자의 시야를 바꾼다는 점에서 형식은 비슷하다. 결정적인 차이는 학생이 언젠가 교사의 이유를 검토하고 교사를 거부할 수 있느냐에 있다. 오브라이언에게는 그런 타인이 없다. 이해는 상대의 세계를 존중하는 일이 아니라 침입할 약점을 표시한 지도다. 친밀감도 신뢰를 키우는 관계가 아니라 가장 깊은 저항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기술로 바뀐다.
네 손가락을 다섯으로 보다
오브라이언은 네 손가락을 들고 몇 개냐고 묻는다. 윈스턴은 고통 때문에 금세 다섯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정말 다섯으로 보아야 한다. 목표는 거짓 진술이 아니라 당이 지각의 근원이 되는 상태다. 반복되는 전기 충격과 피로, 시간의 붕괴는 자기 눈에 대한 신뢰를 느슨하게 만들고, 어느 순간 윈스턴은 실제로 숫자를 확신하지 못한다. 2 더하기 2가 4라는 판단은 논리적으로 반박된 것이 아니다. 올바른 판단을 붙들고 있을 몸과 시간의 조건이 파괴되었다. 진실의 객관성과 인간이 진실을 지킬 능력은 같은 문제가 아님을 잔혹하게 보여 준다.
목적이 권력 그 자체일 때
윈스턴은 당이 사람들의 행복이나 사회의 안정을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답하려 한다. 오브라이언은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라고 잘라 말한다. 돈이나 승리, 미래의 번영은 언젠가 충분하다고 말할 기준이 있지만, 타인에 대한 권력은 끝없이 새 장면을 필요로 한다. 자발적으로 따른다면 지배자의 힘인지 행위자의 뜻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고통을 주고 원하지 않는 일을 시켜야 권력이 눈에 보인다. 사람 얼굴을 영원히 짓밟는 장화의 이미지는 과장된 잔혹성의 장식이 아니다. 다른 의지를 부정하는 순간에만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체제가 반복해야 할 증명 절차다.
101호실에서 사랑을 취소하다
윈스턴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쥐다. 얼굴 앞의 철창이 열리려는 순간 그는 줄리아에게 하라고 외친다. 이미 당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이 외침은 정보 제공이 아니다. 그는 그 순간 다른 사람이 자기 대신 고통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줄리아는 어떤 말도 강요할 수 있지만 마음속까지 들어오지는 못한다고 믿었다. 101호실은 그 믿음을 실험적으로 무너뜨린다. 출소 뒤 두 사람은 공원에서 만나 서로 같은 배신을 했다고 말하고 헤어진다. 관계는 바깥에서 금지된 것만이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이전과 다른 것이 된다. 당은 사랑을 단절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랑의 과거형을 그들 안에서 다시 쓰게 한다.
피해자를 써 버리는 승리
마지막의 윈스턴은 밤나무 카페에서 진을 마시고 전쟁의 승리에 기뻐하며 빅 브라더를 사랑한다. 패배라는 말도 너무 바깥에서 들린다. 패배한 사람은 자기가 어느 편이었는지 알 수 있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판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동시에 오브라이언의 승리에는 기묘한 의존이 있다. 타인의 의지를 침범해야만 권력을 확인하는 체제는 계속해서 침범할 내부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당은 개인의 판단을 무가치하다고 선언하면서도 그 판단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장면을 최고 성과로 삼는다. 이 모순이 윈스턴을 구하지는 않지만, 완전한 승리의 중심에 아무 목적도 없는 빈자리가 있음을 보여 준다.
자백 뒤에 남을 증언자를 없애다
오브라이언이 한 사람에게 그렇게 긴 시간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서 드러난다. 서명된 자백은 값싸고 뜻이 불분명하다. 공포 때문에 한 말인지, 살아남기 위한 계산인지, 실제 믿음인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은 피해자의 내부에서 자기 힘의 증거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통증과 지적 관심, 다정한 이해의 흉내를 함께 사용한다. 윈스턴은 거짓 문장을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문장과 자기 판단의 차이를 가를 위치를 잃어야 한다. ‘치료’가 완성되면 환자는 치료가 자기에게 한 일을 잘못이라고 증언할 수 없다. 세계를 고친다는 말이 세계를 말할 마지막 증인을 제거하는 기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