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글쓰기 · 03
쓰다 보니 자기 목소리가 생겼다
책에서 빌려 온 리듬, 더는 써지지 않던 밤, 멋진 문장을 지운 자리에 남은 빈칸. 문체는 골라 놓고 걸치는 옷이 아니라 이런 왕복 속에서 서서히 자란다. AI는 길을 보도록 도울 수 있지만, 글을 생성하는 속도로 그 길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아버지에 관한 산문을 쓰는 한 사람을 떠올려 보자. 그녀는 벌써 사흘 밤째 쓰고 있다. 아버지가 젊어서 어떻게 일했고, 어떻게 돈을 아꼈으며, 어떻게 자신을 역까지 데려다주었는지 모두 적었다. 끝맺음도 있다. 평생 말주변은 없었지만 가족에게 가장 깊은 사랑을 남긴 사람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면, 종이 위의 그 사람은 누구의 아버지여도 될 것 같은데 정작 자기 아버지 같지는 않다.
먼저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단어를 바꾼다. ‘고생’을 ‘노고’로, ‘말없음’을 ‘침묵’으로 바꾸고, 두 번 들어간 ‘깊이’를 지운다. 문장은 조금 가벼워졌지만 문제는 남아 있다. 그러자 자신이 애초에 글을 못 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글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막상 자기 차례가 되면 왜 이미 닳아 버린 말들밖에 없을까?
많은 사람의 글쓰기가 여기서 멈춘다. 막힌다는 느낌은 분명하지만, 그 느낌에 붙인 설명까지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정말 단어 하나가 부족한 것일 수도 있고, 글 전체가 사실은 별로 관심도 없는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써지지 않는다’는 것은 한 가지 병이 아니며, 재능이 없다는 진단서는 더더욱 아니다. 먼저 어디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지 보아야 한다.
빌려 온 문장은 서둘러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처음 글을 쓸 때 그녀는 한 작가의 짧은 문장을 좋아했다. 많은 설명 없이 문득 멈추는 리듬이 창문 하나를 열어 주는 것 같았다. 따라 연습하면서 길게 늘어지던 자기 문장을 나누었다. 나중에는 또 다른 글쓰기를 만났다. 한 문장이 먼 길을 돌아가면서 망설임과 번복, 미처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생각까지 담아냈다. 그제야 긴 문장이 반드시 장황한 것도, 짧은 문장이 저절로 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모방은 서둘러 씻어 내야 할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언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직 모를 때에는 우선 남의 방법을 빌려 시험해 볼 수밖에 없다. 많이 읽는다는 것은 머릿속에 좋은 문장을 쌓는 일이 아니다. 같은 장면에도 이렇게 들어갈 수 있구나, 같은 관계라도 마지막에 꼭 결론을 내려 주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고 조금씩 알아 가는 일이다. 독서가 주는 것은 눈앞의 방법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다.
하지만 빌려 온 방법이 통하지 않는 때도 온다. 아버지를 말을 아끼는 사람으로 그리자, 문장이 짧아질수록 그 작가를 더 닮아 간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실 식탁에서 자잘한 이야기를 무척 즐겼다. 무엇을 고쳤는지, 채소 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돌아가며 이야기했다. 그렇게 차갑고 엄격한 사람으로 그리니 글에 분위기는 생겼지만 그 사람의 한 부분이 잘려 나갔다. 그녀는 여기서 처음으로 그 멋진 리듬을 그대로 따라가기를 거부한다.
자기 목소리는 흔히 ‘독창적이어야겠다’는 결심보다 이 작은 거부에서 나타난다. 좋은 방법이지만 이번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라 보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눈앞의 사람과 일이 그런 식으로 배치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개성 있는 형용사 몇 개가 아니라, 아버지를 담아낼 수 있는 다른 글쓰기 방식이다.
여기에는 연습도 필요하다. 처음에는 문장부호, 문장 연결, 앞뒤에서 무엇을 가리키는지까지 신경을 써야 해서 뒤를 쓰다 보면 앞에서 하려던 말을 잊는다. 기본적인 동작이 익숙해져야 더 어려운 질문에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생긴다. 이 문단은 왜 여기 있어야 할까? 아버지가 답한 적 없는 문제에 내가 대신 답하고 있지는 않을까? 기술은 목소리의 적이 아니다. 불필요하게 드는 힘을 덜어야 자신이 정말 망설이는 지점도 더 잘 들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람의 수준을 나누는 사다리는 아니다. 온갖 수사법에 익숙한 사람도 이번에 왜 쓰려는지 모를 수 있다. 문장을 아직 능숙하게 쓰지 못하는 사람도 꼭 해야 할 말을 이미 알아봤을 수 있다. 두 어려움은 얽힐 수도 있고 따로 다룰 수도 있다. 명료하게 쓰는 법을 익힌다고 원하는 것이 저절로 분명해지지는 않는다. 원하는 것을 안다고 문장을 명료하게 쓰는 일을 거부할 필요도 없다.
문장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도 고친다
넷째 날 밤, 그녀는 친구에게 원고를 보여 준다. 친구가 말한다. “아버지가 널 위해 뭘 해 줬는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오래 기억하는 순간은 없어?” 말다툼 뒤에 아버지가 부엌 문간에 서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 아버지는 다가와 달래지도 않았고, 돌아서 가 버리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써 넣었지만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 나중에 지운 장면이었다.
이제야 보인다. 글 전체를 증명 문제로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자신도 아버지를 이해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런데 부엌 문간의 그 순간은 거기에 맞춰 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가오고 싶었을 수도, 화가 났을 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수도 있다. 누군가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기억은 없다. 안심할 수 있는 결말을 얻으려고, 설명할 수 없는 그 저녁부터 없애 버렸던 것이다.
다시 쓴다. ‘깊은 사랑’을 더 좋은 말로 바꾸는 게 아니라 글 전체의 무게중심을 옮긴다. 아버지가 해 준 일들은 남기고 말다툼도 다시 넣는다. 아버지가 어디에 섰고, 손을 어디에 두었는지 쓴다. 그가 다가오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은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는 것도 쓴다. 여기까지 쓰고서야 단지 아버지를 칭송하고 싶었던 게 아님을 안다. 끝내 이루지 못한 가까움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었다. 그것은 ‘실은 다 너를 위해서였어’라는 말 한마디로 덮을 수 없었다.
수정이 때로 정말 바꾸는 것은 이것이다. 원고뿐 아니라 원고를 쓰던 사람의 생각도 바뀐다. 글쓰기는 언제나 이미 정리한 뜻을 종이에 옮겨 적는 일이 아니다. 문장을 실제로 써 봐야 자신이 무엇을 피해 가고 있었는지 드러나는 뜻도 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침묵을 쓰려 했는데, 쓰다 보니 그 침묵에 자신도 참여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물론 부엌 문간에 빈자리를 남긴다고 해서 함축이 언제나 설명보다 낫다는 뜻은 아니다. 앞에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면 독자는 한 사람이 서 있는 모습만 볼 뿐, 왜 그녀가 그를 기억하는지는 느끼지 못한다. 말다툼의 까닭을 충분히 밝혀야 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 짐작하는 문장도 덜어 내야 한다. 여백은 게으름의 허가증이 아니다. 어디서 멈추고 얼마나 설명할지는 이 글 안에서 다시 정해야 한다. 문체에 관한 격언 하나에서 답을 받아 올 수는 없다.
좋은 피드백은 여기서 도움이 된다. 독자가 작가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작가의 삶을 자기 것으로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 짚을 수 있다. 이것을 쓰고 싶다고 했지만, 독자가 실제로 읽게 되는 것은 저것이라고. 더 펼쳐 쓰라고 할 수도 있고 덜어 내라고 할 수도 있다. 좋은 편집이 작가의 원문을 무조건 그대로 남기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작가로 하여금 작품을 더 잘 보고, 이해하고, 발전시키게 하는지, 아니면 바깥을 만족시키는 완성품만 남기는지이다.
그러므로 문법을 따로 연습하거나 날마다 정해진 분량을 채우는 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 지점에 저절로 도착하지는 않는다. 쓰고, 구체적인 반응을 받고, 원고로 돌아와 다시 해 보아야 무엇을 연습한 것인지 알 기회가 생긴다. 반대로 당장 써지지 않는 상태를 낭만화할 필요도 없다. 한숨 자고, 질문을 바꾸고, 누군가에게 방향을 짚어 달라고 하는 편이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이 고생을 견딜 줄 안다고 증명하는 것보다 나을 때가 많다.
AI가 비춘 곳을 한 번 더 들여다보기
친구에게 시간이 없다면 AI도 비슷한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때로는 가능하다. 단순히 ‘다듬어 줘’라고 하는 대신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글은 매끄러운데 내 아버지 이야기 같지 않다. 당장 고치지 말고, 어디가 요약에 머물러 있는지, 어디에 장면이 더 필요한지 먼저 짚어 달라. 이렇게 물으면 도구에 더 알맞은 일을 맡기게 된다. 문제가 없는 버전을 서둘러 내놓게 하는 대신, 우선 문제를 알아보도록 돕게 하는 것이다.
‘집’이라는 주제를 여러 출발점으로 펼쳐 달라고 할 수도 있다. 건물, 음식, 떠나온 도시, 말하는 언어. 마지막 것을 보고 그녀는 외국에서 살아온 지난 몇 년을 떠올린다. 다른 언어로 일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점점 익숙해졌는데, 가끔 모국어의 익숙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 방향을 AI가 짚어 주었을 수는 있다. 그다음 무엇을 쓸 만한지는 자기 경험으로 돌아가 찾아야 한다. 책 한 권이 문득 무언가를 깨닫게 해 주듯, 누군가 환기해 주었다고 발견이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이미 쓴 글에 대해서도 AI는 구체적인 기술적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가 방에 들어왔다’를 ‘비집고 들어왔다’나 ‘슬그머니 들어왔다’로 바꾸면 인물의 처지가 달라진다. 같은 세 가지 일을 써도 결과부터 쓰는지 원인부터 쓰는지에 따라 독자가 기다리는 것도 달라진다. 여러 수정안을 내게 한 뒤 무엇이 달라졌는지 비교하고, 하나를 골라 원고에 넣어 볼 수 있다. 이런 연습을 쌓으면 예전에는 오랫동안 혼자 더듬어야 했을 차이가 더 일찍 분명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차이를 보았다고 이미 익힌 것은 아니다. 도구는 문장을 고쳐 줄 수 있지만, 그 덕분에 작가가 다음번에 어떻게 써야 할지까지 배웠다는 보장은 없다. 왜 이 동사가 맞는지, 왜 저 문단은 옮겨야 하는지 직접 설명해 볼 수 있다. 며칠 뒤 다른 대목을 쓸 때 다시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목적은 글자마다 노동 증명서를 내는 데 있지 않다. 이번 도움이 다음에도 쓸 수 있는 능력이 될 기회를 주는 데 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어떤 한 번 AI가 나보다 잘 쓴다고 느끼는 일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일이고, 좋은 제안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위험은 다른 순간에 생길 수 있다. 도구가 모든 문단의 뜻을 찾아 주는 데 익숙해지면서, 그것이 애초에 내가 묻고 싶었던 일인지 돌아보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순간이다. 부엌 문간의 아버지는 어느새 ‘동양적 부성애의 절제된 표현’으로 확실히 정리된다. 문장은 매끄럽고 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제 막 열어 본 질문을 다시 닫아 버린다.
그 설명을 지워도 된다. 아버지를 단정하지 않는 방식을 AI에게 찾아 달라고 한 뒤, 그중 알맞은 문장을 받아들여도 된다. 핵심은 거절했는지, 몇 글자를 고쳤는지가 아니다. 좋은 문장을 일부러 나쁘게 고친다고 더 자기 것이 되지는 않는다. 정작 물을 만한 것은 이것이다. 선택지들의 차이를 보았는가? 왜 이렇게 쓰려는지 여전히 설명할 수 있는가? 내일 새롭게 이해하게 되면 다시 고칠 마음이 있는가?
때로는 도구나 독자를 한 명 더 찾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하나는 시간 순서가 뒤섞였다고 지적하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에게 그녀의 기억 속 아버지로서의 삶 말고 자기 삶은 없었느냐고 묻는다. 서로 다른 반응은 서로 다른 사각지대를 비출 수 있다. 하지만 투표하는 자리는 아니다. 세 모델이 모두 따뜻한 결말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결말이 이 글에 맞는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반응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관점을 하나 더 갖는 가치는 가능성을 하나 더 보는 데 있지, 찬성표를 하나 더 모으는 데 있지 않다.
AI는 더듬고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 줄여 주고, 자신이 무엇을 피하는지 더 빨리 알아보도록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 전체를 환산할 수 있는 믿을 만한 배수는 없다. 기술 연습, 삶의 경험, 자기 이해는 서로 영향을 준다. 각기 따로 도는 시계가 아니다. 잘 던진 질문 하나가 정말 빠르게 사람의 방향을 돌려놓을 수도 있다. 다만 열 가지 해석을 만들어 내는 속도가 열 가지 삶을 이미 겪고 감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몇 달 뒤 글을 다시 꺼내 읽던 그녀는 자기가 이제 모든 결말에 말없는 뒷모습을 남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한때 자신을 구해 주었던 방법도 조금씩 습관이 된다. 도구가 과거의 리듬을 배워 언제든 ‘꼭 그녀 같은’ 글을 써 줄 수 있다면 이 문제는 오히려 더 가려지기 쉽다. 과거의 나를 닮았다고 지금도 계속 자라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번에는 또 문간에서 멈추는 대신 끝까지 말해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문체는 남들이 알아보는 습관 한 벌을 마침내 모아 놓고, 그 뒤로 그대로 실행하는 일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람과 일을 쓸 때마다 기존 방법으로는 모자라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금 더 시도하는 일이다. 우리는 언어를 빌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며, 실제로 더 나은 수정을 많이 받아들인다. 그러다 어떤 선택은 남고 어떤 선택은 스스로 다시 뒤집는다. 목소리는 이렇게 오가는 과정에서 자란다. 외로움이나 서투름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새 문서를 연다. 이번에는 아버지 이야기가 아니다. 첫 문장은 여전히 조금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서둘러 ‘나는 글을 못 써’라고 설명하지도, 멋진 첫머리로 채워 넣으려 하지도 않는다. 먼저 물어볼 마음이 있다. 어디가 맞지 않는 걸까? 이번에는 내가 아직 무엇을 보지 못했을까?
출처와 읽기 안내
이 글은 해당 SAE 논문을 바탕으로 산문으로 다시 쓴 글이며, 기술적 논증 전체를 문단별로 옮긴 번역이 아닙니다. 이 한국어판은 논증과 예시의 뜻을 살려 독립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일상 장면은 설명을 위해 지어낸 예시입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 AI 사용을 요구하지 않으며, 좋은 제안을 받아들이는 일 자체를 자기 목소리를 잃는 일로 보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