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이 함께 결정했어.” 이 말은 평등하게 들린다. 둘 다 대화에 참여했고 마지막에는 같은 답을 말했다. 그러나 한 방에 두 사람이 있었다고 결정이 저절로 공동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두 사람이 말했어도 실제로 성립할 수 있는 답은 한 사람의 답뿐이다.

한쪽이 방향을 제시하고 다른 쪽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한다. 한 사람은 오래 기다려도 괜찮지만 다른 사람은 지연의 비용을 거의 다 감당한다. 한쪽이 반대하면 지금 상태가 유지되지만 다른 쪽이 반대하면 관계가 바로 차가워진다. 결국 후자가 “알겠어”라고 한다.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니라 교착 상태를 더 견딜 수 없어서일 수 있다.

공동 결정인지 보려면 마지막 동의만 보지 말고 누가 의제를 정했고, 누가 사실상 거부권을 가졌으며, 서로 다른 답의 비용이 누구에게 갔는지 봐야 한다. 한쪽의 이유만 계속 증명해야 하는 관계도 있다. 왜 싫은지, 왜 시간이 필요한지, 왜 지금 방식이 불공평한지 설명해야 한다. 반면 다른 쪽의 바람은 기본값처럼 어떤 설명도 필요 없다.

관계를 더 잃기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판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매번 반대할 때 더 큰 값을 치르기 때문에 양보할 수 있다. 상대는 명령하지 않아도 오래 불만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원하는 답을 얻는다. 양보한 사람이 “내가 선택했어”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도 있다. 선택했다는 사실과 선택이 이루어진 환경이 공평했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힘의 차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말하는 능력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위험을 견디는 정도도 다르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보고 이유 대신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더 오래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시간을 정해 지연을 압박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의 말을 자기에게 편한 문장으로 대신 정리하지 않을 수 있다. 관계에서 더 안전한 사람은 반대한다고 바로 벌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모든 일을 반씩 정하는 것도 반드시 공평하지 않다. 결과를 주로 감당하는 사람이 더 큰 결정 공간을 가져야 하고, 실제로 공유하는 자원과 책임은 둘의 동의가 필요하다. 한 사람의 몸과 일과 삶의 방향을 주로 바꾸는 선택을 무조건 반반 결정하면 그 사람은 자기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리를 잃는다. 반대로 비용 대부분을 상대에게 넘기는 선택을 “내 자유”라고 부르는 것도 공동 결정이 아니다.

끝내 함께 결정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둘의 방향이 모두 진짜지만 함께 성립하지 않는다. 계속 대화한다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 잃기 두려운 쪽이 먼저 사라질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같은 결론을 만들 수 없다”고 인정하는 편이 억지 합의보다 정직하다. 공동 결정의 표시는 언제나 같은 답이 아니다. 같아질 수 없을 때에도 아무도 자기 자리에서 없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